순국 People

의병전쟁과 의병장 [2021/03] 의병장 열전(3) │ 안중근 의사

페이지 정보

본문

여순감옥에서 처형되기까지 5개월간의 행적 

‘인(仁)’으로 악을 대적한 진정한 ‘대장부’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월간 순국』 3월호 의병장열전에서 만난 인물은 1910년 3월 26일 여순 형장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이다. 안 의사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5개월 동안의 행적을 통하여 거룩하기만 한 그의 진면목을 우리는 만날 수 있게 된다. 이제 필자는 안 의사의 수감생활을 몇 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월간 순국』 3월호 의병장열전에서 만난 인물은 1910년 3월 26일 여순 형장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이다. 뜨거웠던 안 의사의 삶을 찾아가 보자.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이토는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 의사는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에게 권총을 발사하였다. 첫 발은 이토의 가슴을 맞혔고, 또 한 발은 옆구리, 또 한 발은 배를 맞추어 이토를 쓰러뜨렸다. 이토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우(森泰二郞),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남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우(田中淸次郞) 등도 한 발씩 맞아 쓰러졌다. 이토는 피격 30분 만인 오전 10시 경에 숨졌다.


곧바로 “코레아 우라(대한독립 만세)”를 세 번 외친 안 의사는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었고,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여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26일 순국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의 유해를 아직까지도 찾지 못하고 있다. 


차고 넘치는 이토의 죄목을 당당히 밝히다


  안 의사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5개월 동안의 행적을 통하여 거룩하기만 한 그의 진면목을 우리는 만날 수 있게 된다. 이제 필자는 안 의사의 수감생활을 몇 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장면! 먼저 안 의사는 재판과정에서 이토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그가 밝힌 이토의 죄상은 다음과 같이 차고 넘친다. 


첫째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 

둘째 한국 황제를 폐위한 죄 

셋째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넷째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다섯째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여섯째 철도 광산과 산림 하천을 강제로 빼앗은 죄 

일곱째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여덟째 군대를 해산한 죄  

아홉째 교육을 방해한 죄 

열째 한인의 외국 유학을 금지한 죄 

열한 번째 교과서를 압수하고 소각한 죄 

열두 번째 한국인이 일본의 보호를 받겠다고 말한 죄 

열세 번째 현재 한일간 다툼이 끊이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도 한국이 무사  태평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열네 번째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 

열다섯 번째 일본천황의 부친인 태황제를 시역한 죄 등이다.


둘째 장면! 안 의사는 재판소 내의 수많은 회유에도 시종일관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일본 감옥 당국은 안 의사의 감방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많은 배려를 했다. 안 의사 자신도 한국에 온 일본인은 그렇게도 고약했는데 여기에서 보는 일본인들은 어찌 이렇게도 인후(仁厚)한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의아스럽게 생각할 정도였다. 감옥 당국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을 시키고, 매일 오전에 감방을 나와 사무실까지 갈 수 있게 하고, 각국의 고급 담배를 주고, 서양 과자와 차, 고급 백반의 식사, 감귤 사과 배를 하루에 몇 차례씩 주고, 우유도 매일 한 병씩 주고, 좋은 내복에다 면이불 4벌을 지급했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을 안정시켜 국제적으로 조선을 합병하고 나아가 만주 대륙으로 진출할 구실을 마련하기 위한 일제의 계략이었다. 재판이 신사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외국에 보이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로 안 의사 자신의 입으로 이토 저격이 너무했다는 말이 나오도록 회유하기 위함이었다. 그 말 한마디가 일본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말이 나올 가망이 없어지자 후했던 그동안의 대우는 사라지고 공판이 이루어졌다.


셋째 장면! 안 의사는 자당(慈堂)이 바라던 바와 같이 상고를 포기하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안 의사의 모친인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의 작은 실수 하나로 인하여 그동안의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될 것이 염려가 되었는지, 아들이 교수대에서 입을 수의(壽衣)를 지으면서 상고를 하지 말라고 당부한 위대한 어머니였다. 조마라아 여사는 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장한 편지를 보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고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넷째 장면! 최후의 5개월 동안 안 의사는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나무라는 일이 없었다[不怨天 不尤人]’는 점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장면이다. ‘위엄은 있되 결코 사납지 않았던[威而 不猛]’ 안 의사의 인품에 전옥(典獄·감옥의 우두머리)을 비롯한 감옥의 모든 일본인들로부터 엄청난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그들에게 써준 유묵(遺墨)을 통해 우리는 안 의사의 고결한 인품을 오늘날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다섯째 장면! 안 의사는 옥중에서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이 자서전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고 일본어 번역본과 한문 등사본이 전해진다. <안응칠 역사>를 끝내고 사형 집행일이 다가올 무렵, 그는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의 집필에 착수했다. <동양평화론>은 서언(序言)에 이어 (1)전감(前鑑) (2)현상(現狀) (3)복선(伏線) (4)문답(問答) 등의 네 장으로 구상되었는데, 애석하게도 형 집행으로 서언과 (1)전감의 첫 부분에서 집필이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짧은 첫머리에 안 의사의 사고(思考)가 잘 나타나 있다. 서양 세력의 동양 침략을 동양 삼국이 협력하여 잘 막아내야 동양의 평화가 유지될 터인데, 이토가 주장하는 ‘동양평화(東洋平和)’는 이웃나라를 침략해 일본에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자신의 이토 제거는 동양평화를 지키려는 정의의 응징이었기에 안 의사는 ‘하얼빈 의거’를 ‘동양평화의전(東洋平和義戰)’이라 하였다.


아! 의로운 전쟁(義戰)


  그런데 ‘의로움(義)’의 뜻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의로움(義)’의 의미를 그 글자 자체에서 찾으려 한다면 작업 자체가 공허해진다. 그 글자가 사용된 실제 사례를 통해서 살펴볼 수밖에 없다. 비유하자면 모든 색은 실체가 없는 것과 같다. ‘붉은 색’ 자체는 실체가 없다. 하지만 ‘붉은 장미’ 또는 ‘붉은 종이’ 등 그 구체적인 대상을 만날 때 우리는 그것이 ‘붉은 색’ 임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안 의사는 바로 ‘의로운 전쟁[義戰]’, ‘의로운 군대[義軍]’ 등을 통해 ‘의(義)’의 참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안 의사 스스로 만든 본인의 직함은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大韓國 義軍 參謀中將)이었다.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쳤던[見利思義 見危授命] 안 의사였다. 이 의로움을 가지고 동양평화를 이룩하고자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안 의사는 실로 한 시대의 ‘영웅’이었고, 이 땅의 진정한 ‘대장부’였다.


<안응칠역사>에는 안 의사가 롤 모델로 여긴 두 명의 영웅이 등장한다. 한 명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다. 안 의사는 “미국 독립의 주역인 워싱턴은 7, 8년의 풍진(風塵) 기간에 수많은 곤란과 고초를 어찌 참고 견뎌낼 수 있었던가? 진실로 만고에 둘도 없는 영웅호걸”이라며, “내가 만일 훗날에 일을 이룬다면 반드시 미국으로 달려가서 특별히 워싱턴을 위해 추억하고 숭배하며 마음이 같았음을 기념하리라”고 하였다.


 안 의사가 생각했던 다른 한 명의 영웅은 안 의사가 어린 시절 흠모한 중국 초나라 군주 항우다. “만고의 영웅 초패왕의 명예는 천추에 남겨 전한다. …그는 장부이고, 나도 장부”라고 <안응칠역사>에 적어 놓았다. 


한 시대의 영웅 안 의사는 당시 최고 권력을 가졌던 이토를 도모하는 일을, 작은 쥐새끼 한 마리 잡는 것으로 여겨 버렸다. 안 의사가 의거에 나아가기 전에 지은 〈장부가(丈夫歌)〉를 힘차게 읽어본다! 


丈夫處世兮,其志大矣。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英雄造時。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雄視天下兮,何日成業。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고

東風漸寒兮,壯士義烈。 

동풍이 점점 차가와짐이여! 

장부의 의기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必成目的。 

분개하여 한 번 떨침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鼠竊伊藤兮,豈肯比命。 

쥐도적 이토여! 어찌 산 목숨에 비기리오

豈度至此兮,事勢固然。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사세가 그리 되었도다

同胞同胞兮,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大韓獨立。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

萬歲萬歲兮,大韓同胞。 

만세 만세여! 대한 동포


  이렇게 호탕한 영웅의 모습과 더불어 안 의사가 보여준 대장부의 면모를 우리는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조국의 원수 이토를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주살한 안 의사였지만 자신이 속한 의병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다 사로잡힌 일본군 포로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했던 실로 대장부였다. 


헤이그밀사 사건, 정미조약, 고종의 폐위, 군대해산 등 국가의 존망이 위협받게 되었을 때, 안 의사는 북간도로 망명해 독립군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1908년 6월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에서 일본 군사와 교전하여 피차간에 죽거나 다치고 혹은 사로잡힌 이가 많았다. 그때 포로로 잡힌 일본 군인과 장사치들을 불러다가 안중근이 이렇게 물었다.


“그대들은 일본국의 백성인데 무슨 까닭에 러일전쟁 때 선전포고문에서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대한의 독립을 굳건히 한다고 하는 천황의 성스러운 뜻을 받들지 않고 오늘날 이처럼 경쟁하듯 침략하고 있으니, 이것을 평화이고 독립이라 할 수 있는가? 이것이 역적이나 강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랬더니 일본인이 눈물을 떨어뜨리며 “이것은 우리의 본심이 아니라 부득이 그런 것입니다. 모두 이토 히로부미의 잘못입니다. 임금의 성스러운 뜻을 받들지 않고 제 멋대로 권세를 농락하며, 한일 양국 간에 귀중한 생명을 수없이 살육하고… 우리가 비록 분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형세가 어찌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안 의사는 포로를 석방하며 “돌아가거든 그 같은 난신적자(亂臣賊子)를 쓸어버려라”고 권했고 이에 포로들이 이를 수락하자 안 의사는 즉시 그들을 풀어주었다. 포로들이 “군기 총포를 안 가지고 돌아가면 군율을 면하기 어렵다”고 하자, 안 의사는 총포까지 주며 돌려보냈다.


이 모습을 보고 장교들이 “어째서 사로잡은 적들을 놓아주느냐”고 항의하자 안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현재 만국 공법(公法)에 포로가 된 적병을 죽이는 법은 없고 다른 곳에 수감한 뒤에 송환하는 것이오. 더구나 그들이 말하는 것이 진정에서 나오는 의로운 말입니다. 석방하지 않고 어쩌겠소?”


하지만 안 의사의 포로 석방은 의병부대 내에 파문을 불러왔다. 일부 부대원은 불만을 품고 러시아로 돌아갔고 풀어준 일본군이 의병의 위치를 알고 기습해 피해가 더 컸다. 


자책감과 좌절감에 빠져 의병부대를 떠난 안 의사는 1909년, 뜻이 같은 동지들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였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 피로써 항일투쟁의 의지를 다졌다. 태극기에다 혈서로 ‘大韓獨立’이라 쓰고 “대한독립 만세”를 3창(唱)했다.


  일본군 포로를 풀어준 것에 대해 의병 내부에서 불만이 제기될 때에, 안 의사는, “일본의 4천만 인구를 모두 죽인 뒤에 국권을 되찾을 계획이요?… 우리는 약하고 저들은 강하니 힘든 싸움은 옳지 않소. 충성스러운 행동과 의로운 거사를 통해 이토의 폭압적인 정략을 성토하고 세계만방에 널리 알려 열강들의 동감하는 뜻을 얻은 뒤에야 국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오. 이것이 이른바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제거하고 인(仁)으로 악을 대적하는 방법”이라 답했다.


‘의로운 행위’를 통해 ‘의로움’의 실체를 알 수 있듯이, 안 의사의 ‘인(仁)으로 악을 대적하는’ 이 말에서 우리는 ‘어짊[仁]’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영웅 역시 영웅적인 순간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안 의사의 영웅적인 순간을 통해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