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1/04] 건국훈장 독립장│이석용(李錫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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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 중시한 선비의 절개
만 번 죽어도 마음 변치 않으니
글 | 편집부
진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벌였으며 비밀결사 임자밀맹단을 결성했다. 주요약력 ● 1878년 11월 29일 전라북도 임실 출생 ● 1907년 진안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킴 ● 1912년 임자밀맹단을 결성해 남원, 전주, 임실 등지에서 활약 ● 1914년 4월 4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천고의 강상을 짊어짐은 중요하고 / 삼한의 해와 달은 밝게 비치는데 외로운 신하 만 번 죽어도 마음 변치 않으니 / 사람으로 머리 숙여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네 - 이석용 선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시 나라 위급한 상황에서 효보다 충의 중시한 선비 이석용 선생은 1878년 음력 11월 29일 갑술일에 전라북도 임실에서 태어났다. 3대 독자 귀한 아들이라, 어려서 갑술이라 불렸고, 손아래 누이 2명과 함께 성장했다. 그의 선조 중에서 이목과 그의 아들 이세장이 급제해 관직에 진출해 이름을 알렸으나, 그 이후에 관직에 나간 사람을 배출하지 못하고 임실의 향반으로 살아갔다. 1895년에는 명성황후 살해 사건과 단발령이 내려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선생도 학업을 중단하고 분통해 했지만, 스승의 “마음만으론 위급함을 구할 수 없다”는 말에 마음을 잡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선생은 각지를 돌며 고명한 학자들을 만나 학문과 시대를 이야기했다. 그중에서도 연재 송병선, 면암 최익현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선생은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서는 부모에 대한 효(孝)보다는 국가를 위한 충(忠)을 우선해야 한다는 송병선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겼다. 마이산에 울려 퍼진 의병의 함성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한 태인의병이 일어서자 선생은 태인의병에 가담하려 했지만 약 열흘 만에 해산했고 최익현과 임병찬 등은 잡혀가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굳혔다. 1906년 가을부터 1년 동안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1907년 8월 하순 아버지께 하직인사를 올렸다. 선생은 만약을 대비해 가족들을 여러 곳에 나누어 피신시키고 가산을 정리했다. 마침내 1907년 음력 9월 12일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선생은 의병장에 추대됐다. 기삼연이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해 전라남도 후기 의병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면 전라북도에서의 그러한 역할은 이석용 선생이 담당했다. 선생이 세운 호남창의소는 임실을 비롯한 전라북도 동부지역에 거주하는 가난한 유생들이 지휘부를 구성했고 병사는 주로 농민과 일부 천민으로 구성됐다. 창의동맹단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주위 산봉우리마다 파수를 세우고 고천제를 지냈는데 인근 주민과 장정 등 1천여 명이 집결해 일본군조차 섣불리 행동하지 못했다. 고난과 역경 딛고 나선 의병활동 이석용 선생은 의병을 결성한 다음날 진안읍을 공격해 헌병분파소와 우편취급소를 점령하여 파괴했으며 일본 상품을 불사르고 통신망을 사용할 수 없도록 전선을 끊었다. 아울러 일진회원 스스로 사무소의 깃발을 내리게 했다. 첫 번째 출진으로 커다란 성과를 거두자 이석용 의진의 명성이 전라북도 지방에 곧바로 퍼졌다. 며칠 후 김동신의 의병부대가 부대를 합치자고 요구했다. 지휘권 문제로 의견 충돌이 있던 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했다. 그 후 선생의 의병진은 좀처럼 초기의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의병을 해산했다. 1907년 음력 11월 중순 선생은 다시 의병을 규합하고 군자금을 확보하여 의병을 재정비했다. 전의 실패를 거울삼아 전투 능력 향상에 집중했고 성능을 향상한 화승총을 개발함과 동시에 군대와 같은 제도를 갖췄다. 이를 바탕으로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재개했다. 다시 일진회원을 처단하고 세무서 등을 공격했다. 하지만 이석용 선생의 의병부대는 장기항전으로 인해 전력이 크게 약화한 데다 일제 군경의 공격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일본군의 회유와 공격에 결국 이석용 선생은 3년에 걸친 의병활동을 접고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의병 시신 수습해 추모하며 결의를 다지다 1911년 3월 동지들과 함께 일왕 암살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1912년 겨울에는 조국의 광복을 위한 비밀결사 임자밀맹단을 결성했다. 이석용 선생은 밀맹단을 중심으로 을사5적과 정미7적의 처단, 일본 도쿄와 오사카 등지의 방화 그리고 중국 망명을 추진했다. 그러나 군자금 후원을 약속했던 친구의 배반으로 1913년 음력 10월에 일본 경찰에 잡히고 말았다. 이석용 선생은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이 확정된 후 이석용은 15세의 아들과 최후 면회를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아들 부부와 2명의 누이 앞으로 쓴 유서를 아들에게 전달하고 <창의일록>과 <불망록>을 남겼다. <창의일록>은 의병을 조직한 후의 진중일기고 <불망록>은 후원을 받은 내용을 남긴 기록이다. 선생은 대한만세를 세 번 부르고 왜적을 멸하겠다고 맹세한 후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다. 1914년 4월 4일, 나이 37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