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전쟁과 의병장 [2021/04] 의병장 열전(4) │ 강기동 의병장
페이지 정보
본문
일제 헌병보조원에서 의병으로… 무장투쟁에 투신
민족에서 존재 가치 찾으려는 뜨거운 결단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월간 순국』의 의병장 열전 4월호에서 만나 볼 인물은 1911년 4월 17일 순국한 강기동 의병장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강기동 의병장에 대한 1차 자료가 부족하다. 따라서 필자는 기존의 각종 자료(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 위키백과 / 김도훈-이달의 독립운동가 강기동 / 용산구 소식 등)를 활용하여 독자들에게 의병장 강기동의 활동을 친절하고 생생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주어진 소임을 다하고자 한다.
총과 실탄 등 무기 탈취해
이은찬 창의원수부에 투신
헌병보조원(憲兵補助員)이란, 일제가 우리 민족을 탄압할 목적으로 1907년 7월에 만든 제도이다. 당시 군대해산과 한일신협약 등으로 많은 의병들이 봉기를 했는데, 이때 일제는 이들 의병들을 진압하고 탄압하기 위해서 4천여 명의 한국인 헌병보조원을 모집하였고, 1908년에는 6천여 명으로 확충하였다.
그런데 이 제도를 만들 것을 제의한 인물은 바로 당시 대한제국 총리였던 이완용이었다. 이완용이 하세가와 요시미치 대장을 찾아가서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논의 중에 고안해낸 수단이었다. 일본 제국은 이를 이용해 같은 한민족 동족끼리 서로 싸우게 함으로써 식민통치를 앞당기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1909년 1월 15일 아침에 강기동은 옥문을 부수고 의병 길인식 등을 탈주시키는 한편, 총과 실탄 등 무기를 탈취하여 의병장 이은찬이 이끄는 창의원수부에 투신하였다. 의병을 진압하던 헌병보조원에서 의병으로 전환한 것이다.
일제의 첨병인 헌병보조원으로 의병들의 무장투쟁을 일선에서 저지하던 그가, 어떠한 심적 변경을 일으켜 의병으로 투신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의병전쟁이 거의 소멸되어가는 단계에 의병으로 투신한 그의 행동은, 지금까지 그가 해 온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반성을 의미하는 것임과 동시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민족으로부터 찾으려는 결단이었음에 분명하다.
세금탈취 계획으로 일제의 허를 찌르다

이 시기에 창의원수부에 투신한 강기동은 의병장 이은찬에게 우편물 탈취를 통한 군자금 확보 계획을 건의하였다. 강기동이 헌병보조원 시절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계획되었던 군자금 확보 계획은 이은찬으로 하여금 “우편물 중의 현금은 한국 신민(臣民)으로부터 징수한 것으로 왜적 관리의 회(懷)를 배불리하는 것이다. 이를 약탈하여 한국 빈민을 구휼함은 우리 의병의 의무”라는 인식을 마련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강기동의 계획은 세금탈취를 통해 일본제국주의와 매판정부에 반대하는 전시효과를 노림과 동시에 의병부대의 군자금 확보를 목적한 다각도의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이러한 공로로 강기동은 투신한 지 불과 1개월여 만인 1909년 2월경 일약 의병장 이은찬의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09년 2월 한 달 동안 19회에 달하는 전투를 전개했다. 특히 2월 25일 양주군 석곡면(石積面) 항동(項洞) 부근의 ‘돌압산(乭壓山) 전투’에서는 대승을 거두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전력을 거의 소진한 이은찬 의병부대는 이틀 후 다시 전투를 벌임으로써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이은찬 의병부대가 타격을 입은 것을 계기로 일제는 3월부터 양주경찰서와 헌병분견소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이은찬 의병부대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3월 16일 창의원수부 우군장 윤인순(尹仁淳)이 일본군 토벌대와 전투 중 사망한 데 이어 3월 31일에는 의병대장 이은찬마저 일경에 피체되어 6월 27일 교수형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이은찬이 피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강기동은 곧바로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한다.
지금 왜적이 국권을 전횡하여 삼천리 강토와 이천만 백성은 마침내 생활대책이 없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창의한 지 수년이나 터럭의 이익도 없고 군기(軍器)마저 불리하다. 또한 국민이 각자 마음에 뜻한 바가 혹은 재물을 탐하며 혹은 왜적과 내통하여 도리어 황실을 해롭게 하니 천하만국에 이와 같은 민심이 있겠는가? 먼저 일어서 창의한 것이 민권의 선진일 뿐이니 앉은 자 일어선 자 어찌 모두 의병이 아니겠는가? 빈손으로 힘을 합해 곳곳에서 봉기하니 하늘을 우러러 감사한다. 그러나 이때를 당하여도 아직 민심이 돌아오지 않는구나. 앞으로 5일 이내로 총환 등을 적극 주선하여 도움으로써 의(義)를 구함이 옳을 것이다. 국가의 흥망이 마땅히 시각에 있으니 양단하라. 만약 움직일 생각이 없다면 어찌 군율을 거역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에 유념하여 후회하지 않도록 할지어다.
융희(隆熙) 3년 기유(己酉) 4월 초하루
창의원수부(倡義元帥府) 중군장(中軍將) 강(姜)
이어서 강기동은 이은찬이 사용했던 ‘창의원수부 중군장’이라는 칭호를 그대로 계승해 사용하였다. 1909년 6월경부터 본격적인 대일항쟁을 시작하면서 경기 동북지방에서 가장 활발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1909년 6월 8일 의병 20여 명을 무장시키고 양주군에 집결하였다. 이때 고안헌병분견소 헌병들이 추격해오자, 양평군 남종면(南終面) 우천동(牛川洞)으로 유인한 그는 계속 추격해 오는 헌병대원들과 우천동 부근 한강연안에서 교전을 벌인 뒤 양주군 분원(分院)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한 달 뒤인 7월 6일 강기동은 십수 명의 의병을 이끌고 양주군 건천면 독정동(獨井洞)에서 일본헌병대와 전투를 벌인 뒤, 양주군 와공면(瓦孔面) 월곡리(月谷里)를 경유하여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7월 11일 2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양주군 둔야면(芚夜面)에서 밀고자를 처단한 뒤 포천 방면으로 사라졌다.
7월 25일 15명의 의병을 이끌고 양주군 둔야면 도봉산 천황사(天皇寺)를 방문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8월 1일에는 의병 24명과 함께 둔야면 누원에 숙박 중인 양주군 우편전신취급소 체송부를 습격하여 모자와 피복을 탈취하였다. 이후 8월까지 강기동 의병부대의 활동은 의복·식량·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보급투쟁과 밀고자 처단 등의 활동을 하였다.
강기동 의병부대가 본격적으로 대일투쟁을 전개한 것은 9월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1909년 9월 13일 22명의 의병을 이끌고 퇴계원에서 주재헌병대와 전투를 벌였고, 이어서 양평군 서종면 도장동 매곡마을을 습격하였으나, 헌병대의 추격을 받아 1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한강을 건너 양주군 화도면 금남리 백월리마을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다시 고안헌병대의 습격을 받은 의병부대는 재차 한강을 건너 가평군 북면으로 이동하였다. 9월 하순경 20여 명의 의병을 대동한 강기동은 가평군 외서면(현 청평면)에 나타나 군자금을 모집한 뒤 양평군 방면으로 출발하였다. 이와 같이 9월 한 달간 17차례에 걸쳐 교전을 벌인 강기동은 일본군과 직접적 전투는 될수록 피하고 소규모로 부대를 편성하여 산악을 근거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일본 토벌대와 끝없는 격전

이로 인해 더 이상 소규모 부대의 유격전으로는 일본군을 궤멸시킬 수 없음을 깨달은 강기동은 군자금을 모집, 저축한 후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러나 군자금 액수가 부족한 까닭에 필요한 액수를 모을 때까지 국내에 잔류하면서 다시 활동을 하게 된다.
1910년 4월 1일 강기동 의병대의 의병 1명이 연합수색대에 잡혔고, 4월 14일에는 37명의 부하를 인솔하고 포천군으로 행군하던 강기동 의병부대가 서면 묵동(黙洞) 신기리(新基里)에서 이 지방을 수색 중인 마전(麻田)·적성(積城) 헌병분견소의 연합대와 충돌하여 교전을 벌였다. 이후 부대를 나눈 강기동은 의병 17명만 대동하고 4월 28일 양주군 어등산면(於等山面) 이리(二里)에서 유산리분견소 토벌대와 교전한 뒤 회암면(檜岩面)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다음날인 4월 29일 강기동은 전성서 의병부대와 합류하여 양주군 어등산면 일리(一里)에서 유산리 헌병분견소 헌병과 재차 격전을 벌였다.
1910년 5월 7일 강기동은 의병 20명과 함께 포천군 외소면 추산동(秋山洞) 연령(蓮嶺)에서 정찰 중이던 송우리헌병분견소 대원과 1시간 가량 교전하였고, 5월 15일에는 양주군 노원면 간촌에서 의정부분견소 토벌대와 전투를 벌여 일본군 1명이 부상당하였다. 그러나 갈수록 강화되는 토벌대와 항전 속에 강기동 의병부대는 거의 세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에 강기동은 부대를 해산한 다음, 5월 27일 서울로 잠입하려 하였으나, 불행히도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러나 강기동은 일본 경찰을 넘어뜨리고 탈출에 성공함으로써 다시 의병 대열에 합류하였다.
강기동을 놓친 일제는 다시 강기동과 그의 의병들을 소탕하기 위해 6월 2일부터 약 1개월 예정으로 포천군 무림리(茂林里)·길모리(吉毛里)·능현(陸峴)과 양주군 송현리(松峴里) 4개 지역에 각각 하사 1명, 상등병 2명, 보조원 6명으로 구성된 임시파견소를 설치하고 일대 토벌을 단행하였다. 강기동은 6월 18일 10여 명의 대원들과 함께 양주군 구지면 평촌을 습격하여 군자금을 징발한 뒤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강원도로 이동하며 점차 북상하였다.
일제에 맞서 계속된 무장투쟁
용산 일본군 감옥에서 순국
1910년 8월 한국을 강점한 일제가 1910년 9월 하순부터 11월 초순까지 40여 일간에 걸쳐 황해도 지역내 의병 대토벌작전을 단행함에 따라 강기동은 북간도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북간도 방면으로 이동하던 도중 1911년 2월 함경남도 원산에서 피체되었으니, 아! 원통하다.
2윌 17일에 서울로 이송된 강기동은 군사재판에 넘겨졌고, 용산의 일본군 ‘위수감옥’에 수감되었다. 1909년에 만들어진 위수감옥은 서대문형무소와 달리 군형법을 어긴 일본 군인, 군속들을 가두기 위해 만든 시설이었다. 즉 일제는 선생을 군속(헌병보조원) 신분으로 처벌했던 것이다. 위수감옥은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일본군 감옥으로, 광복 이후에는 이태원 육군형무소로 사용되었다. 현재까지 감옥을 둘러싼 벽돌담장과 내부의 일부 건물들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여기서 필자는 당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기사를 인용하니, 이는 우리 독자들과 함께 이 원통한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달포 전에 서울로 압송돼 조사를 받고 용산 군사령부 군법회의에 부쳐졌던 적괴(賊魁) 강기동은…보병 65연대 병사 3명으로 해금 포형(砲刑:총살형)을 거행케 했는데 불과 한 발에 왼쪽 이마를 관통해 봄풀의 한 점 이슬이 됐다더라. (매일신보 1911년 4월 19일 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