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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나는 삶 이야기 [2021/05] ​남한산성 만해기념관 전보삼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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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한용운을 현재에서 만나고 미래로 이어가는 공간 


화엄정신에 입각한 철학

만해의 모든 것 쫓아온 한평생


글·사진 | 편집부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한참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작은 집, 심우장(尋牛莊). 남향을 선호하는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 집인 이유는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3년 만해 한용운이 지은 집으로 조선총독부를 등지기 위해 산비탈 북쪽을 바라보는 북향집. 이곳에서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살다가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생을 마감했다. 그 후 외동딸 한영숙 여사가 머물렀지만 일본대사관저가 건너편에 자리 잡은 후 핏줄마저 떠나간 심우장을 지킨 이는 한평생 만해와 만해의 사상을 사랑하며 따르던 이었다. 한때 <님의 침묵>을 품고 <한용운 연구>를 읽고 또 읽던 소년이었던 전보삼 관장은 만해의 행적을 쫓으며 자료를 모으던 청년이었고 만해기념관을 개관하고 심우장을 국가 사적으로 추진한 장년이었으며 누구보다도 만해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노년이 되었다.


객승들 통해 보고 듣던 너른 세상


  인구 7만 여의 조그맣던 도시 강릉에 1922년 강릉 불교 포교당이라는 현대식 사찰이 생겼다. 매일 보던 사람들 매일 똑같던 일상에 다른 지역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설악산으로, 오대산으로 향하는 거점이었던 강릉에는 객승들이 수시로 드나들기 시작했고 그 객승들은 호기심 많았던 소년의 눈에 ‘바깥소식을 전해주는 파랑새’ 같았다. 사찰 바로 옆이 집이었던 덕에 절 마당을 운동장처럼 누비며 만나는 객승들을 붙들고 바깥 도시들의 이야기를 묻곤 했다. 그 도시는 어떻게 생겼는지 뭐가 유명한지 묻던 질문들은 자연스럽게 불교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뜻도 모르면서 반야심경을 외우고 팔만대장경을 읽고 읽다보니 궁금한데 뜻을 모르니 지나가는 스님들을 붙잡고 물어보기 일쑤였다. 


“물어보면 설명은 해주시는데 못 알아듣겠는 거예요. 내가 못 알아듣는 건 생각도 안 하고 왜 쉽게 이야기 안 해주나, 당신이 틀렸다, 시비도 걸고 그랬지요.” 

스님들에게 소년은 당돌하지만 기특하고 귀찮으면서도 거절할 수 없는 강릉의 명물이었고 소년에게 스님들은 삶의 지표가 되어주었다. 만해와 원효의 이야기들은 특히 소년의 마음을 설레게 했고 어느 날 한 스님에게 받았던 <님의 침묵>은 소년의 평생을 결정해주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동안 답답해하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떠올랐다.


만해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싶었던 소년은 꾸준히 자료를 찾아다녔고 1963년경 통문관에서 <한용운 연구>가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문관에 편지를 써서 보냈다. 고맙게도 통문관에서 기꺼이 책을 보내주었다. 


“책을 받고 보니 국한문 혼용인 거예요. 먼저 한글만 읽었어요. 읽고 또 읽다보니 내용 파악이 되더라고요. 강릉 하늘 아래 이 책을 가진 사람은 나밖에 없다며 아끼고 좋아하고 읽고 또 읽었어요.” 


불과 중학생 때의 일이었다. 중학교 때 불교청년회 부장, 고등학교 때는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불교에, 만해의 사상에 더욱 매료되었다.


만해와 만해를 그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만해를 사랑하던 소년은 만해에 대해 더욱 알고 싶은 열정적인 청년이 되었다. 1968년 강릉을 떠나 상경하던 청년의 품에는 해야 할 일들을 적어놓은 수첩이 있었다. 성북동 심우장 찾기, 망우리 만해 묘소 참배, 만해를 직접 모셨던 강석주 스님 만나기가 그것. 그중 당시 삼청동에 거주하고 계셨던 강석주 스님을 가장 먼저 찾았다. 만해에 관해 알고 싶다며 무작정 찾아온 청년이 귀찮을 법도 하건만 언제고 인자하고 온화한 모습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시던 강석주 스님의 모습은 이미 노년이 된 전보삼 관장에게 잊히지 않는 일들이다.


“강석주 스님이 기억하는 만해 스님은 ‘나라사랑에 부처 같은 분’이며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분’이셨어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자 3·1독립운동의 선봉에 계셨던 만해의 업적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인연은 강석주 스님에서 그치지 않았다. 강석주 스님을 통해 해우 선생님을 만나고 다시 소개로 진주 효당 스님을 뵙고 다시 통도사 경봉 스님을 소개 받았다. 좋은 어른들을 찾아뵙고 그분들로부터 당신들이 봤던 만해의 모습, 만해가 해주었다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던 건 물론이요,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을 아낌없이 볼 수 있었다. 이 시절의 경험은 따뜻한 자양분이 되어주었기에 현재 만해기념관에서는 만해의 스승인 박한영과 만해, 만해와 석주스님, 만해와 경봉 스님 등 정기적인 ‘스승과 제자’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경봉 스님은 1911년 통도사 사미승 시절에 강사로 찾아온 만해를 만났다고 합니다. ‘화엄이란 무엇인가’로 시작된 이야기는 ‘월남지망국’으로 이어져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월남의 이야기가 담긴 <월남망국사>를 소개해주셨다고 해요. 전쟁에서 패한 채 식민지로 전락한 우리나라의 상황을 직접 이야기하지 못하고 타국에 빗대어 이야기해주신 거였죠. 그 강의를 들으며 모두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슬퍼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즐거워 보이기도 하던 경봉 스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스쳐간 분들과의 이야기를 하는 전보삼 관장에게서도 고인이 되신 분들에 대한 그리움, 지나간 시절에 대한 애틋함, 함께 나누었던 것들에 대한 즐거움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만해의 흔적을 모으고 담아낸 기념관


  1981년 만해기념관을 개원하고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긴 세월 사립으로 운영해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60여 년간 모아온 콘텐츠들이에요. 만해와 관련된 자료라면 열일 재치고 달려가 수집했습니다. 대한민국 어느 박물관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현재 만해기념관에 있는 희귀본 <님의 침묵> 초간본의 경우 1978년 고서 경매장에 나왔던 책이었다. 사실상 판매보다는 경매장의 흥행을 위한 상징성이 강했기에 시세 대비 10배의 가격이 붙여져 있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소장자를 알아놓고 당시 10만 원이던 교수 월급을 꼬박꼬박 모아 1년여 만에 50만 원을 주고 구입해왔다.


만해기념관의 소장품 중에는 1962년 대한민국 정부가 추서한 건국공로 최고 훈장인 대한민국장도 있다. 이 훈장 역시 사연을 안고 있다. “소장자의 집 화재로 한 차례 소실되었던 훈장입니다. 당시 총무처에 재발급을 의뢰했는데 훈장을 재발급한 사례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포기할 수 있나요. 여러 차례 기념관에 전시해 후세에 알릴 거라고 설득한 끝에 재심의가 열렸고 결국 훈장을 재발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훈장 재발급 사례였어요.”


그 외에도 <님의 침묵> 130여 종의 판본, 영어와 프랑스어 번역 시집과 3천 여 점의 학술논문 및 연구 자료 등이 소장되어 있다. 기념관에 소장한 자료들 중 전보삼 관장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료는 단 하나도 없다.


품에 간직하고 있던 수첩 속 약속은 고스란히 실행되었다. 1979년 12월, 만해의 묘소를 찾아 주변을 정비했을 뿐만 아니라 상석과 비석을 세워 묘비 제막식을 주도했다. 그리고 1981년에는 심우장에 만해기념관을 설립했다. 그 사이 1980년에는 <한용운 사상연구>를 펴냈고 ‘만해의 사상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도 취득했다.


만해가 있던 곳에서 만해가 있을 곳으로


“성북동 심우장에 세를 얻어 만해기념관을 만들었을 때는 이제 다 되었구나 싶었어요.” 당시를 회상하던 전보삼 관장의 얼굴에 웃음이 머문다. “비탈길 타고 구불구불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 길인데 교통은 불편하지요. 관리운영비는 계속 들어가는데 방문객이 없으니 고민, 그러다 어느 날 단체가 방문하면 10여 명이 앉을 공간이 없으니 그것도 고민. 와도 걱정, 안 와도 걱정을 하며 고민하던 시간들이었어요. 자생력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운영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매일 고민하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지요.”


전보삼 관장이 찾은 해답은 ‘사람이 있는 곳’이었다. ‘내 콘텐츠를 보러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쉬이 볼 수 있는 곳에 콘텐츠를 내어놓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찾은 곳이 남한산성이었다. 지금은 호국의 성지이자 세계문화유산이지만 당시에는 유원지였다. 


“호국정신과 선비정신이 공존하는 곳이며 민족자존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터라는 것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지만 유원지였던 것도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결국 문화는 여유 속에서 누릴 수 있으니까요.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괜한 말은 아니거든요. 유유자적 풍경을 보고 닭볶음탕 먹으러 오는 사람들 중 10%만이라도 기념관에 들러 만해를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990년 30여 평 집을 얻어 평생 모아온 콘텐츠들로 알차게 채웠고 주말이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하나 둘 들어섰다. 남한산성에 만해기념관이 있다는 작은 신문기사가 올라간 후로는 주말마다 사람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집을 팔아 터를 사고 1998년 다시금 사재를 털어 현재의 기념관을 재개관해 오늘에 이르렀다.


조그마한 셋집에서 시작해 흘러온 26년여의 시간 중 단 일각(一刻)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1995년에는 강원도 인제 백담사에 만해기념관을 개관하였고, 2006년 만해 한용운의 고향인 충남 홍성에 만해 문학체험관을 열었다. 성북동 심우장은 전보삼 관장의 노력으로 서울시기념물 제7호에서 사적 제550호로 승격된 채 여전히 만해를 위한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만해의 사상과 철학이 마음을 울리기를


  만해기념관을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남한산성 복원에도 일조해왔다.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을 만들고 이끌었으며 ‘남한산성복원정비기획단’ 초대 운영위원장으로 복원에 앞장섰다. 그 결과 유원지였던 남한산성은 2000년 성곽 복원을 시작으로 역사의 현장, 문화유산의 보고로 탈바꿈했으며 2014년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중구난방 지어져 있던 집과 숙박시설을 헐고 행궁을 복원한 뒤에는 목조 저택만 건축할 수 있도록 했어요. 그렇게 세계문화유산으로 자리잡은 남한산성 안에 만해기념관이 있습니다.”


많은 세월을 한결같을 수 있었던 건 ‘신념’이었다. 손익의 계산 없이 오롯이 마음으로, 찰나의 즐거움이 아닌 오랜 시간 한결같음으로 걸어온 길은 ‘금강심’이라는 단단한 결정체의 마음으로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지식에 회유되지 않았던 만해와도 닮아있다. 


전보삼 관장은 만해에 대해서 “문학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불교의 화엄사상을 공부하면서 철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님의 침묵>에서 문학적 관점인 ‘님’이 아닌 철학적 관점의 ‘침묵’에 주목하기를 바라고 <님의 침묵>이 한글로 만들어진 최초의 철학서이자 어엿이 ‘NIM’으로 표기된 세계 속 우리의 철학서인 것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무언가로부터의 자유, 소극적 자유이자 상대적 자유인 Freedom을 뛰어넘어 누군가 줄 수도, 누군가에게 받을 수도 없는 절대자유와 누구에게나 자유가 있고 평등하다고 말했던 칸트의 개인적 자유를 뛰어넘는 집단 및 단체의 자유, 공동체의 자유까지 아우르는 만해의 자유에 대한 사상과 정신, 철학을 누구나 보고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전보삼 관장이 내내 지켜온 만해기념관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황금과 권력, 명예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아요.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하는가가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만해의 철학과 정신,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관람객들의 마음속에 울림을 주고 싶습니다. 보다 크고 보다 높은 곳을 바라보는 안목을 가지면 마음의 즐거움이 따라온다는 것을 만해기념관에서 느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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