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 Theme.2 3·1운동 사적지, 역사공간의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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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상징을 살리지 못한 ‘죽은 공간’
기억 공유할 공동체 붕괴
기억 매개할 공간의 파괴 ‘기록과 전달’ 함께 고민해야
글 | 최우석(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1919년 2월 28일 저녁,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 진행 장소에 대한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기존의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기로 한 것이었다. 현재 서울 종로구에 가면 옛 태화관 자리인 태화빌딩과 탑골공원 사이는 고작 도보 5분 거리에 불과하다. 3·1운동 100주년을 거치면서 옛 태화관 자리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80년 현재의 12층 태화빌딩이 세워졌는데, 2019년 그 앞에 3·1독립선언기념광장이 새롭게 조성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광장’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무엇을 상징하고 전달하려는 공간인지 파악하기 힘든 ‘통로’로 현재 남겨져 있다. 3·1운동의 시작점을 다시 잇고 되새길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상황이다.
3·1운동의 시작점, 태화관과 탑골공원
1919년 2월 28일 저녁,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 진행 장소에 대한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기존의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기로 한 것이었다. 현재 서울 종로구에 가면 옛 태화관 자리인 태화빌딩과 탑골공원 사이는 고작 도보 5분 거리에 불과하다. 이 5분의 거리에 많은 역사적 의미가 담겨있다.
태화관은 본래 조선시대 중종이 순화공주를 위해 지어준 순화궁이 있던 자리였다. 그런데 1919년 당시 이곳의 소유주는 대표적 친일파 이완용이었다. 태화관은 궁중요리 전문점이었던 명월관에서 임대받아 운영하던 고급 음식점이었다.
탑골공원은 1464년 건립된 원각사 터로 원각사지십층석탑이 현재도 자리하고 있어 탑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연산군 때 사찰이 철폐된 후 민가로 빼곡했던 이곳에 고종황제가 근대식 공원인 탑골공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그 안에 팔각정을 설치하고 황실군악대의 공연장소로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운동의 실행자이자 전파자였던 서울지역 학생들은 탑골공원에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민족대표 중 누구도 나타나지 않자 동요하였다.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의 폭력화 우려로 끝내 탑골공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후 2시의 독립선언식은 민족대표와 학생들이 각각 태화관과 탑골공원에서 진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서울에서의 3·1운동은 시작되었다.
악질 친일파의 집에서 이루어진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식, 황제의 군악대가 연주하던 장소에서 황제를 대신하여 새로운 국가의 독립을 선언한 학생들의 독립선언식, 양자 모두 상징성 있는 사건이었다.

지방시위 중 전국 최대 규모의 현장
강화군 강화읍내 만세시위
고종황제의 장례식을 전후한 서울에서의 3월 1일과 3월 5일 만세시위 이후, 만세시위는 전국 방방곡곡으로 전파되었다. 3월 초에 기독교, 천도교의 조직적 전파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던 평안도 지역을 제외하고는 학생들과 장례식 참배객에 의한 전파가 대부분이었다. 수천 수백 명이 거리를 메웠고 평화적인 만세시위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지방시위 중 전국 최대 규모의 사람들이 모였던 만세시위는 3월 18일 강화군 읍내 장날에 이루어졌다. 1만~2만 명가량의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진행하였다. 강화 읍내 만세시위는 3월 초 연희전문학교 학생 황도문이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 전달로 촉발되었다. 구 대한제국 군인 출신인 유봉진이 강화 각지의 기독교도들과 연락을 취하여 운동을 조직했고 ‘강화인민에게’, ‘독립가’, ‘조선독립선언서’ 등의 문건을 준비하였다. 3월 18일 오후 2시경 강화읍내 시장에서 군중들이 ‘조선독립’ 깃발을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강화군청, 경찰서 앞에서 계속해서 시위를 이어나갔고 검거되었던 사람들을 석방시키기도 했다. 만세시위는 밤 11시까지 이어져 해방구를 연출하였다.
3월 18일 강화읍내 만세시위는 강화군의 만세시위에 불을 붙이는 사건이었다. 이후 온수리, 철산리, 교동, 망월리, 석모리, 냉정리 등지로 만세시위가 확산되어 갔다. 서울과 강화를 잇는 중간에 위치한 김포군에서도 3월 22일 월곶면 군하리 장날에 400명이, 3월 23~24일 양촌면 양곡시장에서 8,000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길과 장날을 따라 만세시위는 일파만파 확산되었다.
2만 명의 시위군중이 모였던 강화군의 인구는 1919년 12월 말 기준으로 72,785명이었다. 강화인구 4분의 1이 참여한 엄청난 운동이었다. 그런데 2022년 1월 현재 강화군 인구는 69,748명이다. 100년의 시간 동안 강화의 인구는 그대로 정체되어 있다. 이는 지역이 쇠락해감을 의미한다. 여전히 강화 오일장은 2일과 7일에 열리고 있지만, 최근에는 강화와 그 주변 섬들을 잇는 다리들이 개통되면서 강화읍내의 중심성도 약화되고 있다.
가장 많은 현장 사상자가 발생했던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만세시위

3월 20일 군북시장 만세시위는 3월 19일 함안시장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조상규, 조용효, 이재형, 조정래, 조성규, 조경식, 조형규 등에 의해 진행되었다. 오후 1시에 약 3,000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시작하여 오후 5시에는 5,000명에 달하였다. 시위군중이 경찰주재소로 몰려가자 일본 군경은 공포탄과 실탄을 사용하였고 분노한 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여 주재소를 파괴하였다. 이날 일제 경찰이 파악한 현장 사망자가 17명, 최종 사망자만 21명에 달하였다. 물론 이 수치에도 의도적 누락이 가미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군북시장 만세시위에서 3·1운동 기간 중 유일한 일본인 민간인 사망자도 1명 발생하였는데, 이는 일본 군경이 쏜 유탄에 의한 것이었다. 비폭력 만세시위가 무력저항이 된 것은 대항폭력적 성격이 강하였으며, 그 과정 중에도 일제 공권력을 향한 폭력시위를 행했을 뿐 일본인 민간인에 대한 폭력 행사는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함안군 군북면에는 석교천을 끼고 3·1독립기념공원과 3·1기념탑이 위치해 있고 맞은편에 군북3·1기념체육관이 있다. 지금은 한적한 시골 동네인 함안군 군북면에서 치열한 투쟁과 가혹한 탄압이 이루어졌던 이유는 이곳이 과거에는 부산, 마산에서 진주, 순천으로 향하는 마산우수영선 도로가 지나는 중요 교통로였기 때문이다. 이곳에 대한 강한 진압이 다른 지역으로의 만세시위 확산을 차단한다는 생각이 작동했던 것이다. 하지만 교통의 발달은 함안군을 비켜나갔고 격렬한 투쟁의 역사는 희미해졌다. 현재는 조용한 시골의 정취만 흐르고 있다.
독립운동 사적지 보존을 위한
그간의 노력과 앞으로의 과제
본 글에서는 3·1운동의 시작점이 되었던 서울의 태화관과 탑골공원, 그리고 최대 규모 만세시위지인 강화군과 최대 규모 희생자 발생지인 함안군 군북면 만세시위를 다루었다. 필자의 모자람과 지면의 부족으로 수많은 사적지들 중에서 매우 조금만을 소개할 수 있음이 안타깝다. 1945년 해방 이후,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3·1운동 사적지에 대한 기록과 기억이 전수되어왔다. 그리고 지역마다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 기념탑, 기념공원 등이 조성되었고 또 2019년, 100주년을 맞이해서 다시 한번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3·1운동의 현장들을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3·1운동 현장들에 대한 체계적이고 심도 깊은 조사는 지속적으로 요구된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국내 독립운동 사적지 조사를 2007년도부터 2010년도까지 진행했고 2018년도부터는 심화조사를 실시 중이다. 그 결과물은 우리가 독립운동 사적지를 기억하고 가꾸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과거에 만들어진 기념비, 기념탑, 기념공원들이 시민들의 삶과 한데 어우러지지 못하고 기념일에만 방문하는, 평소에는 ‘죽은 공간’이 되어 버렸다. 시대가 너무나도 빠르게 변하고 있고 과거의 기념방식은 현재 우리가 소비하는 여러 매체 문화와는 동떨어져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요소도 적다. 그렇기에 독립기념관과 같은 학술기관이 사실관계에 대한 연구를 고도화한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어떻게 하면 밝혀진 사실을 시민들과 잘 공유하고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도 앞으로 녹록하지 않을 것이다. 전국적으로 산재해있는 독립운동 사적지와 달리, 대한민국의 인구는 점점 더 도시로, 수도권 중심으로 집중되고 있고 이로 인해 지역에서는 기억을 공유할 공동체의 붕괴가, 도시에서는 기억을 매개할 공간의 파괴가 가속화되고 있다. 3·1운동의 무대였던 전통시장은 쇠퇴하고, 학교는 폐교할 위기에 처한 곳도 있다. 도시개발의 파괴와 지방소멸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현 사회에서 독립운동 사적지를 어떻게 보존하고 기억하며 후대에 전달할 수 있을지는 전 사회적인 관심과 심도깊은 고민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성균관대학교를 나와 석사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학예사를 거쳐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공저로 『3·1운동 100년』, 『3·1운동과 경기, 인천지역』, 『1919년 3월 1일 그날을 걷다』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