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 Theme.3 만주지역 독립운동 사적지 실태와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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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적지를 가꾸고 보존해야 하는가?
선열들의 위대한 정신 항일투쟁의 의미 넘어
남북통일 당위성까지 확장
글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 소장)
만주지역에서 독립전쟁을 벌이지 않았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항일이라는 목표 앞에서는 국가와 민족을 따지지 않았다. 좌우도 없었고 노소도 없었다. 남녀도 없었다. 살이 찢기고 손발톱이 뽑혀나가면서도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조국을 버리지 않았다. 단언컨대 그분들은 우리 조국의 위대한 아버지이다. 위대한 아버지들의 숭고한 정신을 만주지역 독립운동 사적지에서 새길 수 있다.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사적지는 177개소이다. 이 중 62%에 해당하는 110개소가 길림성에 분포하고 있다. 이른바 북간도로 불린 곳으로,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이기도 하여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장소성의 가치를 비견할 데가 없다. 그런데 일종의 터에 해당하는 사적지가 무려 72%에 이르는 128개소나 된다. 조선혁명군 영릉가성 전투지,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터와 같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무형의 빈터가 많다는 것이다.
주요 사적지의 역사적 의의
대한제국이 멸망할 무렵, 사회 지도층 인사들 가운데는 기존의 영예를 버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한 신민회 인사들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3년부터 1920년까지 3,500명에 달하는 독립군을 양성했다. 이들이 청산리대첩을 이끌었으며, 1920년대 서간도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북간도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결성한 주역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신흥무관학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곳에는 황량한 벌판만이 펼쳐져 있다.
반면 일본군 토벌대는 청산리에서 대패한 후 한인들의 마을과 학교에서 학살을 감행했다. 『연변조사실록』에는 그때의 참혹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침략자들은 도처에서 조선인 촌락에 대하여 위협, 공갈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조리 집안에 가둔 채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 그리고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자가 있으면 총칼로 찔러 죽이거나 땅을 파서 생매장했다.” 바로 경신참변(庚申慘變)의 서막이었다. 일본군 토벌대의 만행은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그중 기념비가 남아 있는 곳은 단 두 곳뿐이다. 길림성 용정시 동성용진의 ‘경신참변 장암동 참변 기념비’와 길림성 통화시 통화읍의 ‘7인열사능원’이다.
그러자 100만 명의 한인들을 기반으로 일종의 자치정부 또는 군정부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독립운동 단체들이 속속 출현했다. 하지만 보다 조직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관련 단체들의 통합이 절실했다. 이에 국민부(國民府)가 1929년에 결성되었다. 국민부는 요녕성 신빈현에 본부를 설치하고,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주축으로 한·중 항일연합투쟁을 전개했다. 지금 요녕성 무순시 신빈만족자치현 왕청문진 조선족향에 국민부 본부 터가 남아 있다. 그곳은 광복 후에 개교했다가 2008년에 폐교된 왕청문 조선족 소학교의 옛 교정이기도 하다.
한편 1931년에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국공산당이 동북인민혁명군을 결성했다. 중국공산당의 첫 정규군으로 병력은 300명 정도였다. 사장은 한족 양정우(楊靖宇)였지만, 참모장 이홍광(李紅光)을 비롯하여 한인들이 3분의 1가량을 차지했다. 일제는 한·중 항일연합군 소탕에 전력했다. 이에 산발적으로 활동하던 항일부대를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통합, 개편했다. 한인들이 주력인 제4사와 제6사는 백두산 일대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지금 동북항일연군기념관이 길림성 통화시에서 관람객을 맞고 있다. 2005년부터 한·중 연합군의 기백을 ‘철혈영혼(鐵血英魂)’이라는 주제로 전시하고 있는데, 중국 국가급 애국주의 교육기지로서 위상이 대단하다.
만주지역에서 독립전쟁을 벌이지 않았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항일투사들이 억압과 시련의 역사를 극복하고, 지난 100년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만들었다. 항일이라는 목표 앞에서는 국가와 민족을 따지지 않았다. 좌우도 없었고 노소도 없었다. 남녀도 없었다. 살이 찢기고 손발톱이 뽑혀나가면서도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조국을 버리지 않았다. 단언컨대 그분들은 우리 조국의 위대한 아버지이다. 위대한 아버지들의 숭고한 정신을 만주지역 독립운동 사적지에서 새길 수 있다.
사적지 현황과 관리 실태

결과보고서에 의하면, 중국 전역에 독립운동 사적지가 400여 곳에 이르며, 만주지역에 그 절반이 분포하고 있다. 독립기념관 “국외” 배너의 중국 편에서 현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를 표로 정리하면 과 같다.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사적지는 177개소이다. 이 중 62%에 해당하는 110개소가 길림성에 분포하고 있다. 이른바 북간도로 불린 곳으로,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이기도 하여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장소성의 가치를 비견할 데가 없다. 그런데 일종의 터에 해당하는 사적지가 무려 72%에 이르는 128개소나 된다. 어떤 가시적인 형태가 아니라, 조선혁명군 영릉가성 전투지,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터와 같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무형의 빈터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그 터의 의미가 없지 않다. 다만 선열들의 땀과 피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데 일정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기념비를 세울 수도 없다. 수교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국경 너머의 나라이기 때문에 중국 정부의 협조가 없으면 작은 푯말조차 세울 수가 없다. 예컨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김일성과 함께 북한의 군사를 주도한 것이 사실이기에 중국 정부에서는 남한과 북한의 입장을 고려하여 어떤 기념물도 세우려고 하지 않는다. 굳이 화를 자초하려 들지 않는 중국 특유의 실용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중국공산당이 주도한 항일투쟁의 경우, 홍색교육(紅色敎育) 또는 홍색관광(紅色觀光)을 겨냥하여 대표적인 인물이나 전적지를 중심으로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홍색은 단심(丹心)으로 애국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홍색교육, 홍색관광은 교육 및 관광을 통해 애국정신을 함양하는 현장학습을 말한다. 우리나라에 빗대자면 청소년 역사탐방이나 통일캠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지난 1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일제로부터 받은 치욕을 잊지 않고, 교육 및 관광을 통해 애국정신을 함양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의 결속을 다지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우리는 항일투사를 ‘선구자’로 우러르고 있지만, 이념이나 사상의 차이는 늘 걸림돌이 되어왔다. 그런데 조선혁명군의 저명한 양세봉 사령관을 한국과 북한, 그리고 중국이 동시에 기리고 있다. 이례적이고 특별하다. 그가 실천한 포용이 이념이나 사상마저도 아울러 놀라운 역사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그 포용은 일종의 초월이었다. 이처럼 한국과 북한, 나아가 중국까지도 만주지역에서 함께 벌인 투쟁을 기억하여 서로를 포용한다면 새로운 역사적 지평은 반드시 열릴 것이다. 그때 만주지역 독립운동 사적지가 더한 의미를 발하리라 믿는다.
사적지 보존 및 활용 방안

그나마 다행한 것은, 요녕성의 경우 여느 성(省)에 비해 비교적 유연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기에 필자가 관여하여 2018년부터 의암선생기념원(義菴先生記念園)의 개보수를 시작으로 연간 2~3개소의 사적지를 개보수하고 있다. 그러나 외형의 개보수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곳의 사적지를 왜 개보수해야 하는가?’라는 화두이다. 이에 선양시의 선양한국국제학교, 조선족제1중학교, 요녕대학교 한국문화동아리 학생들을 대상으로 ‘중국 동북삼성 항일유적지 탐방’을 무료로 진행했다. 우리가 왜 선열들의 항일을 잊지 말아야 하는지, 우리가 왜 사적지를 가꿔야 하는지를 한·중 청소년에게 알리려 한 것이다.
그리고 탐방에 앞서, 일종의 교육목표로서 아젠다를 설정했다. 항일유적지 탐방의 목표를 단지 과거의 사실을 이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과 연결시켜 우리가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를 이해하고, 그 의지를 다지는 데까지 확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선열들이 어떻게 만주로 이주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항일투쟁을 벌였는지, 그러다가 어떻게 분단이 되었는지, 그래서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고,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연속선 상에서 이해시킴으로써 항일투쟁의 역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남북통일의 당위성까지 인식케 하는 것을 교육목표로 삼은 것이다.
“처음 예상했던 것과 달리 느낀 점들이 많았다.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다시 한 번 우리 역사를 기억하게 해주었던 기회였던 것 같다. 가장 안타까웠던 점은 이런 우리 역사가 생생하게 남아있는 중요한 유적지임에도 불구하고 관리가 소홀히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점들을 알고 발 빠르게 대처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 ‘아픈 역사를 기억하게 한 여행’ 중에서/
장세훈(선양한국국제학교 11학년)
“나는 역사교과서에 표현되어 있는 역사 사건들을 외우기에만 급급했지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탐방을 통해 현장에서 생생한 역사를 직접 보고 들으니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북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인지 알았는데 우리와 함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내 마음에 새긴 항일투사들’ 중에서/ 임희진(선양한국국제학교 11학년)
“이번 답사는 굉장히 좋았지만 한편 충격적이었다. 분노도 했고, 슬퍼도 했다. 이런 참혹한 역사를 통해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것을 느꼈고, 지금 우리가 분단이라는 아픔을 겪고 살아간다는 것도 느꼈다. 중국에 살면서 이런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 ‘충격과 분노, 그리고 슬픔’ 중에서/ 이지학(선양한국국제학교 10학년)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학생들은 탐방하면서 느꼈던 자긍심과 감동 그리고 새롭게 알게 된 역사적 사실과 의의를 감상문으로 작성하거나 UCC 영상으로 제작하여 공유했다. 무엇보다 기존의 통일캠프를 통해 경험했던 단동시나 집안시의 압록강변 너머 북한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통해 자연스레 친연성을 확보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즉 마음에 와닿지도 않으면서 불렀던 노랫말이 비로소 한·중 청소년들의 마음에 안착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시련의 역사, 그러나 발전의 역사, 그리고 이제는 통합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만주지역 독립운동 사적지를 활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충북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했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콘텐츠학 박사를 취득했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문화자원센터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했고,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충북대학교 교양학부 초빙교수로 활동했다. 현재 중국 선양시의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한·중 문화교류 연구 및 관련한 문화산업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