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 Theme.4 미국 애리조나기념관을 통해서 본 추모의 방향성
페이지 정보
본문
진주만 공습,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전사자 시신 수장한 채 침몰한 선체 위에 건립
존재만으로 가슴 울려
글 | 김대중(전 전쟁기념관 학예부장)
애리조나기념관은 일본이 자행한 ‘진주만 공습(The Attack of Pearl Harbor)’을 잊지 않기 위하여 1962년에 건립되었다. 한마디로 진주만 공습에 희생당한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한 기념관이다. 이곳은 진주만의 푸른 바다에서 침몰한 애리조나호의 절단된 선체 위에 건립되었다. 이날의 참혹했던 전쟁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놀라운 것은 침몰된 애리조나호를 인양하지 않고 전사 장병들의 시신도 900여 구나 수습하지 못하고 그대로 수장한 채 그 위에 추모관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후 애리조나호 생존자 중 다수가 자신의 유골을 애리조나호로 가져간다는 의향서에 서명했다고 한다. 1982년 수장행사가 시작된 이후 생존자 29명이 사망 후 배로 다시 돌아갔다. 그들은 땅에 묻히지 않고 배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다. 이러한 사실이 기념관을 왜 건립했는지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이 기념관은 필자가 6·25전쟁을 주제로 한 전시실 전체 리모델링을 앞두고 찾아간 곳의 하나다. 전시의 주제가 말해주듯이, 전쟁의 발발 원인과 전쟁의 실상은 물론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때의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또 그 기억을 위해 전장을 어떻게 보존·관리하고 있을까? 라는 물음에 응답하고 있었다.
애리조나기념관, 진주만 공습 전사자를 추모하다
애리조나기념관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The Attack of Pearl Harbor)’을 잊지 않기 위하여 1962년에 건립되었다. 한마디로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 희생당한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한 기념관이다. 진주만 공습이 발발하기 이전인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미국은 장개석 정부에 지원을 계속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의 관계는 이미 전쟁 직전의 상황으로까지 나빠진 상태였다. 미국은 일본제국의 과격한 군사적 행동을 제재하기 위해 석유 금수와 철강 수출 제한조치를 단행했다. 이것이 일본이 진주만공격을 감행한 원인의 하나로 이해된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대성공이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분노하여 연합국 측에 참전하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이 기념관은 ‘진주만국립기념관(Pearl Harbor Nation Memorial)’과 함께 있다. 기념관의 현판에는 USS 애리조나, USS 오클라호마, USS 유타 메모리얼이라고도 적혀 있다. 이 모두는 전함의 이름인데, 모두 진주만 공습으로 좌초된 것들이다. 또 인근에 미주리호 전함도 1992년 퇴역 후 이곳으로 옮겨져 ‘미주리호기념관’으로 만들어졌다. 모두 태평양전쟁과 관련된 기념관들이다.
진주만국립기념관은 전쟁의 발발 배경부터 전투의 전개 과정, 전후 처리에 이르기까지 단계별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었다.

애리조나기념관을 들어가는 입구 진주만 유적지 표지판. 애리조나기념관에 들어가면 먼저 진주만국립기념관에서 영상을 보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배경과 진행 과정, 그리고 일본의 진주만 공습의 참혹했던 내용이다. 영상은 약 23분 동안 소리 없이 자막과 함께 상황을 설명해준다. 관람객들은 숙연한 분위기에 젖어 든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애리조나호의 침몰 과정을 담은 영상은 마치 그 현장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가미가제(神風) 자살특공대를 앞세운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군 2,341명이 전사하고, 1,143명이 부상을 입었다. 전함 애리조나호의 침몰로 1,177명의 미 해군 장병이 전사하였다. 이는 전체 전사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다. 영상을 관람한 후 해군이 운영하는 무료 페리를 타고 추모관으로 향했다.
애리조나호는 펜실베니아급 전함으로 1916년에 건조되었다. 길이 185m, 폭 29.6m, 배수량 31,400톤의 석유 전함으로 속도는 시속 40km였다. 이후 어뢰와 항공기 공격에 대한 방호책으로 대공포를 추가로 설치했지만, 높은 각도에서 투하되는 폭탄에 대한 장갑 방호력이 여전히 취약했었다. 1981년 수중고고학자 잠수부들과 국립관리청은 애리조나호의 침몰 원인을 뇌격기 폭탄 4개를 맞은 것으로 밝혔다. 3만 드럼에 달하는 연료탱크가 인화되어 연쇄적으로 대폭발을 일으켜 애리조나호는 단 9분 만에 침몰하고 말았다고 한다. 애리조나호는 다시 항해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애리조나호는 인양되지 못했다. 복구하여 사용할 수 있을 만한 무기와 장비로서 356mm 포 9문이 인양되었을 뿐이다. 이후 전사자 시신은 1942년에 105명이 더 수습되어 해변에 묻혔다고 한다. 그리고 추가로 274구를 수습한 후 수습 작업은 중단되었다. DNA 감식이 없었던 당시의 의학적 상황으로는 확인이 불가했다.
애리조나기념관은 진주만의 푸른 바다에서 침몰한 애리조나호의 절단된 선체 위에 건립되었다. 이날의 참혹했던 전쟁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놀라운 것은 침몰된 애리조나호를 인양하지 않고 전사 장병들의 시신도 900여 구나 수습하지 못하고 그대로 수장한 채 그 위에 추모관을 건립했다는 것이다. 이후 애리조나호 생존자 중 다수가 자신의 유골을 애리조나호로 가져간다는 의향서에 서명했다고 한다. 이들은 해군을 대표하는 인사들이 참석하는 공식행사에서 유골이 사장되었다. 사랑하는 이들의 작별 인사 속에서 당사자들의 유골은 국립공원 관리청 잠수부들에 의해 동료 선원과 다시 만나게 된다. 1982년 수장행사가 시작된 이후 애리조나 생존자 29명이 사망 후 배로 다시 돌아갔다. 그들의 유골은 4번 포탑에 안치되었다고 전해진다. 생존자들은 땅에 묻히지 않고 배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다. 이러한 사실이 이 기념관을 왜 건립했는지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게 했다.

조국에 바친 고귀한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태평양전쟁이 끝난 지 어느덧 8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추모관 주위에서 바라본 진주만의 푸른 바다 위에는 그날과 같은 무지갯빛을 띤 기름띠가 둥둥 떠다닌다. 이는 ‘애리조나호의 검은 눈물’이라고 불리고 있다. 녹슨 채로 가라앉아 있는 애리조나호의 찢긴 잔해도 여기저기 어두운 몰골 그대로 비추어졌다. 이 푸른 바다 곳곳에 수장된 유골들이 전함의 잔해 덩어리에 엉켜 있을 것을 생각하니 순간 울컥해진다. 태평양전쟁의 희생자들이 남긴 유훈이 당시의 전장에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고귀한 생명을 조국에 바친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절로 느껴졌다.
다시 돌아와 우리 역사를 생각해보게 된다. 일제의 주권 침탈에 당당하게 맞서 일어났던 우리의 의병과 독립군, 그리고 한국광복군. 6·25전쟁 때 전사하신 국군과 유엔의 이름으로 참전했다가 희생하신 참전 용사들까지. 이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을 현재를 사는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며 후대에 남겨줄 것인가? 전쟁의 실상을 알리고 가슴으로 느끼는 스토리가 있는 국민과 함께하는 기념관을 만들기 위해 찾았던 애리조나기념관을 또다시 가고 싶다.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쟁기념관에서 28년 동안 전쟁사 연구 및 전시 중심의 학예업무를 하면서 해외의 여러 사적지와 박물관을 탐방했다. 전쟁기념관 학예부장, 육사 사학과 교수, 서강대·경기대 대학원 강사, 세종대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재)어재연장군추모 및 신미양요기념사업회 이사로 있으며, ‘충장공어재연기념관’(가칭) 건립을 준비하고 있다. 논문은 「전쟁기념관 전쟁역사실I(남실;선사시대~조선중기)의 전시개선」 등이 있고 『한민족전쟁사총론』,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나』,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어재연과 신미양요 연구』 등의 저서(공저)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