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 Theme.1 외국인 독립유공자 현황과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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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독립유공자를 늘려야 하는 이유
세계 평화운동 외연 넓혀
독립운동 세계에 알리고 교류·연대감 높이는 계기
글 |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수)
2022년 3월 현재 외국인 독립유공자는 전체 독립유공자의 0.43% 정도에 불과하다. 한국인 위주의 독립유공자 발굴과 포상에 전념하고 외국인에게 너무 엄격한 선정 기준을 정하여 실제 그들의 희생에 비해 숫자가 적은 것이 아닌가 한다. 외국인 독립유공자 수를 늘리는 것은 단순한 수치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독립운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와 연결된다. 한국 독립운동 시각의 외연을 확장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이라는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나 ‘제국주의를 퇴치하는 평화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외국인들에게는 한국의 자유 독립으로 상징된 세계 평화운동이자 인도주의 운동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외국인 독립운동가를 더욱더 적극적으로 발굴, 포상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외국인 독립유공자 75명…시대별로 서훈 기준 달라
이런 가운데서도 한국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정하며 세계평화라는 거시적인 안목에서 직간접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외국인을 발굴하여 2022년 3월 현재까지 독립유공자로 포상한 수가 모두 75명에 이른다. 이는 연해주나 만주에서 활동한 한국인 중에 외국 국적으로 분류된 20명을 제외한 숫자이다. 이를 국적별로 살펴보면 [표1] 과 같다.

한국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중국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미국이다. 이들 가운데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지만, 국내에서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어 옥고를 치른 이들도 있다. 서훈 등급으로 보면 대한민국장 5명, 대통령장 11명, 독립장 35명, 애국장 4명, 애족장 14명, 건국포장 6명 등이다. 1950년부터 1970년대에 포상을 받은 이들은 대부분 독립장 이상을 받았는데, 주로 한중[대만]·한미 관계 속에서 이뤄졌다. 최근으로 올수록 등급은 이전보다 낮다. 독립운동의 지원 정도에 따라 등급을 엄격히 적용한 결과로 생각한다. 이를 시기별로 변화 흐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외국인을 독립유공자로 처음 포상한 것은 1950년 삼일절을 맞으면서였다. 주미한국대사관에서 우리나라 독립과 자유를 위해 희생적 봉사를 한 미국인 10명, 영국인 2명 등 12명에게 대한민국 최고훈장인 ‘태극훈장’을 수여한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 1949년 4월 공포된 ‘건국공로훈장령’이 시행되고 있었지만, 외국인의 경우에는 이를 적용하지 않았다. 대상자는 헐버트·베델·스태거즈·밀러·알렌·모우리·해리스·윌리엄·더글라스·돌프·윌리엄스·러셀 등이었다.
이 가운데 일제의 한국 침략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미국 의회에 일제 식민 통치의 잔학성을 폭로한 헐버트, 영국 신문기자로 한국에 건너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일제 규탄 기사를 게재하였던 베델, 주한미국공사로서 독립운동을 지원한 알렌,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모우리 등이다. 이들을 제외한 인사들은 대개 이승만이 미국에서 활동할 당시 도움을 주었거나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애쓴 분들이다. 밀러·해리스·윌리엄·더글러스·윌리엄스 등은 1942년 한미협회 관계자들이고, 스태거즈는 1941~1943년 주미외교위원부 법률고문, 돌프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 법률고문, 러셀은 1934년 이승만이 창간한 『원동잡지(遠東雜志)』 편집인을 지냈다.
이후부터 ‘태극훈장’ 대신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1952년 4월 한국전쟁 중에 캐나다 의료선교사로 한국에서 활동하고 귀국 후 임시정부의 승인에 힘썼던 애비슨이 외국인으로서는 처음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이어 1953년 11월, 대만의 장제스 총통이 살아생전에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당시에 이 훈장을 받은 국내 인사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 단 둘뿐일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

잠시 주춤하던 외국인 서훈은 10년이 지난 1963년부터 재개하였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뒤 독립유공자 포상을 본격화하던 시점이었다. 이때 중국 안동[安東, 현재의 단동(丹東)] ‘이륭양행’에 임시정부 교통국 사무소를 설치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한 쇼와 개신교 선교사로 학생들의 3·1운동 참여를 독려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맥큔이 공훈을 인정받았다. 그 뒤로 잠시 뜸하다가 1964년 1월 대만과 우호조약을 체결한 뒤 대만 중국인들이 대개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었다. 1966년 쑹메이링(宋美齡)·천궈푸(陳果夫)·천청(陳誠) 등이, 1968년 쑨원(孫文)·천치메이(陳其美)·천리푸(陳立夫)·뤼텐민(呂天民)·황쥐에(黃覺)·후한민(胡漢民)·장지(張繼)·린썬(林森)·류융야요(劉詠堯)·모덕후이(莫德惠)·황싱(黃興)·주칭란(朱慶瀾)·쑹자오런(宋敎仁)·장췬(張群)·궈타이치(郭泰棋)·마수리(馬樹禮)·탕지야오(唐繼堯)·다이리(戴笠) 등 21명이 그들이다. 이들은 1910년대 초 신규식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하고 활동하였거나 국민당 출신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광복군 창설·운영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 인물들이다.
그 뒤로 숫자는 줄었으나 대만 중국인의 포상이 이어졌다. 1969년에는 천주교 난징(南京)교구 총주교로서 한국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던 위빈(于斌)이, 1970년에는 중국 국민정부 입법원장으로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하고 한중문화협회를 창립한 쑨커(孫科)가, 1977년에는 광복군 창설과 물자를 원조한 쉐웨(薛岳)·주자화(朱家驊)가, 1980년에는 한중문화협회 간부였던 쓰투더(司徒德)·왕주이(汪竹一) 등이 대상자였다.
한편 서양인 5명이 1968년에 포상되었다. 의료선교사 그리어슨은 국내 3·1운동 당시 부상자를 치료하였고, 스코필드는 3·1운동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렸으며, 마틴과 바커는 1919년 북간도 용정에서 일어난 3·13만세운동 당시 부상자를 치료하고 경신참변의 실상을 캐나다 본국에 알렸다. 피치는 1919년부터 상하이 임시정부를 도왔고 1932년에는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 등에 은신처를 제공하였으며, 1940년대에는 중국 국민당에 임시정부 승인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이후부터는 외국인 독립유공자 서훈은 부정기적으로 이뤄졌고 숫자도 크게 줄었다. 아마도 심사 기준을 강화한 것이 이유인 듯하다. 그렇다고 해도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독립유공자 발굴과 포상을 ‘정부 주도’로 개선해 1,438명이나 포상받은 것에 비해 외국인은 한 명도 포함 안 됐다. 1996년에 난징에서 항일 지하 공작을 펼치고 광복군을 지원하여 지청천으로부터 표창을 받은 쑤징허(蘇景和)와 1932년 윤봉길 의거 후 김구의 피난을 도왔던 추푸청(褚補成)이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1999년에는 1942년 제주도에서 도민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힘쓰다 옥고를 치른 도슨·스위니·라이언 등 천주교 신부들과 광복군을 지원하였던 후쭝난(胡宗南) 등이 선정되었다. 2004년에는 일본인으로서 처음으로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변호하였던 후세 다쓰지(布施辰治)가, 2010년에는 군산 3·1운동을 주도하였던 린튼, 2014년에는 영국 신문기자로 취재한 내용을 책으로 발간하여 일제의 침략상을 세계에 알린 맥켄지 등이 공훈을 인정받았다.
2015년에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외국인 10명이 대거 독립유공자에 선정되었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린 영국인 기자 스토리, 1919년 이후 외교 무대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거나 한국친우회를 조직하고 활동한 톰킨스·벡·화이팅·토마스·구타펠·스펜서·마랭 등과 임시정부 승인 지원 활동과 한미협회 회장을 역임한 크롬웰 등이다. 2016년에는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독립운동가 김성숙의 부인이자 충칭에서 임시정부 외무부 부원으로 활동하였던 두쥔후이(杜君慧),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고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에 참여하였던 리수전(李淑珍)이 포상을 받았다. 이어 2018년에는 일본에서 박열과 함께 무정부주의 활동을 펼쳤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가 포상을 받았다, 2020년에는 1943년 10월부터 1944년 9월까지 주인도영국군 장교로 S.O.E 부대에 소속된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의 연락장교로 활동을 지원한 베이컨, 1939년 류저우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로 충칭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원으로 활동한 중국인 여성 하상기(何尙祺)가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2022년에는 1919년 3월 부산의 일신여학교 3·1운동을 주도한 호주 출신의 호킹·데이비스·멘지스 등 여성 선교사들이 포상받았다.
외국인은 전체 독립유공자의 0.43%에 불과
2022년 3월 현재 외국인 독립유공자는 전체 독립유공자의 0.43% 정도에 불과하다. 한국인 위주의 독립유공자 발굴과 포상에 전념하고 외국인에게 너무 엄격한 선정 기준을 정하여 실제 그들의 희생에 비해 숫자가 적은 것이 아닌가 한다. 독립유공자 포상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로서는 안 그래도 한국인 독립유공자 포상 숫자가 터무니없이 적고 너무 엄격한 잣대로 심사를 한다는 비판을 받는 상황에서 외국인의 수까지 늘리는 것은 부담을 가중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이는 의지 문제이지 않을까 한다. 부처가 이를 전담하기 어렵다면 외국인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한 기초 자료 연구 용역을 발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외국인 독립유공자 수를 늘리는 것은 단순한 수치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독립운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와 연결된다. 한국 독립운동 시각의 외연을 확장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동안 우리가 견지해온 독립운동에 대한 관점은 지나치게 ‘일제 침략에 맞서 나라를 되찾는 것’이었다. 한국인으로서는 당연하지만, 외국인에게 그대로 적용하기란 적당하지 않다. 한국의 독립운동이라는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나 ‘제국주의를 퇴치하는 평화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단순히 이기고 지는 문제를 넘어 인류의 자유를 파괴한 일제를 퇴치하고, 더 나아가 세계 인류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이해해야 한다. 외국인들에게는 한국의 자유 독립으로 상징된 세계 평화운동이자 인도주의 운동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외국인 독립운동가를 더욱더 적극적으로 발굴, 포상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는 단순한 포상을 넘어 한국의 독립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고, 해당 국가와의 교류나 연대감을 드높일 수는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외국인에게 적용할 독립유공자 포상 기준을 정하고, 명예스러운 일인 만큼 나치 혹은 친일 활동 등을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외국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국내에 알리는 일에도 적극적이어야 한다. 한국 독립운동의 가치를 더욱 높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 놓쳐서 안 되는 일은 식민지시기 수많은 나라의 뜻있는 외국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만큼 세계평화를 위해 대한민국 정부가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대한민국은 일제 패망 후 해방을 맞아 독립 국가를 세워야 했지만, 새롭게 등장한 미소 냉전에 희생물이 되어 한 민족이 남북 분단으로 갈렸고 급기야 동족상잔의 비극까지 경험했다. 그 뒤로도 순탄치 않았다.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 뿌리를 내려야 했고 경제발전도 이뤄야 했다. 오늘날 국민의 희생 속에서 성장, 발전해 온 대한민국은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고, 한국 문화는 세계 속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은 역사적 경험 속에서 이뤄낸 것을 빈민국, 독재국가, 전쟁에 고통을 받는 나라에 희망으로 도움으로 돌려줘야 한다.

국민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문학박사)를 받았다. 국민대학교, 중앙대학교, 가천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친일진상규명위원회·대한민국역사박물관건립 추진단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