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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 봉오동 전투의 전개 과정과 역사적 의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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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독립전쟁 선포 100주년, 봉오동 전투 100주년

한국 독립전쟁의 횃불, 봉오동 전투 (1) 

독립전쟁의 자랑스러운 첫 승리

항일투쟁에 불씨를 지피다

 

글  이상훈(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봉오동 전투는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가 강제 병탄된 이래,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여 최초로 승리한 사건이었다. 이른바 독립전쟁 제1회전으로 평가된다. 봉오동 전투는 단기적으로 청산리 전투의 승리를 견인했고, 장기적으로 항일 무장투쟁의 원동력을 제공했다. 구한말 의병들은 번번이 일본군에게 패해 참살 당했었다. 이제 독립군이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그것도 국내가 아니라 국외에서 말이다. 패배한 일본군은 충격을 받았고, 승리한 독립군은 자긍심이 생겼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뿐만 아니라 우리 동포 전체의 사기를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봉오동 전투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19193.1운동 이후 만주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소규모로 활동하던 여러 독립군 조직들이 통합하거나 연합하기 시작했다. 1920년이 되면 이러한 경향은 보다 가속화된다. 독립군의 전력이 강화되고 독립전쟁의 분위기도 고조되었다. 독립군은 두만강 연안의 함경북도 회령(會寧), 종성(鍾城), 온성(穩城) 등지로 진입해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접전을 지속했다. 1920년의 경우 연인원 4,643명이 1,651회에 걸쳐 국내 진격작전을 펼쳤다.

192053, 여러 독립운동 단체의 간부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국민회(國民會),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신민단(新民團), 광복단(光復團), 의군단(義軍團) 등이었다. 528일에는 홍범도 부대, 최진동 부대, 안무 부대가 연합해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두만강에서 북쪽으로 40리 떨어진 봉오동(鳳梧洞)에 집결했다. 마을은 긴 계곡부를 따라 하촌(下村), 중촌(中村), 상촌(上村)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봉오동은 막대한 재산을 보유했던 최진동이 재정과 보급을 지원할 수 있는 독립군의 거점이었다. 이곳은 계곡이라 방어에 유리하고, 산길을 따라 각지로 연결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대한북로독군부의 부장(府長)은 최진동, 부관(副官)은 안무로 정해졌다. 북로제1군사령부의 부장(部長)은 홍범도, 참모(參謀)는 이병채, 향관(餉官)은 안위동 등으로 편성되었다. 5월말 당시 봉오동에는 무장한 수백 명의 독립군 병사들이 집결해 있었다. 이러한 정황은 일본군에게도 상세히 보고되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독립군과 일본군의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192064, 독립군 약 30명이 두만강을 건너, 종성군 강양동(江陽洞)의 일본군 국경 순찰대를 공격하고 복귀했다. 독립군의 행동을 예의주시하던 일본군은 곧바로 진압부대를 편성했다. 일본군 제19사단 예하의 니이미 지로(新美二郞) 중위가 지휘하는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였다. 65, 30명에 달하는 니이미 지로의 남양수비대는 두만강을 건넜다. 두만강변의 한인마을이 있던 삼둔자(三屯子)를 습격했다. 독립군은 일본군을 매복 공격한 후 다시 북쪽으로 철수했다.

 

  

봉오동 전투는 어떻게 전개되었나


일본군은 남양수비대만으로는 봉오동의 독립군에 대한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야스카와(安川) 소좌(少佐)가 지휘하는 월강추격대(越江追擊隊)’를 새롭게 투입시켰다. 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는 부대라는 의미다. 월강추격대를 이끌던 인물은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라고 알려져 있다.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 봉오동 전투에도 야스카와 지로라고 표기되었다. 하지만 야스카와 지로라는 인물은 일본측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1920년 당시 일본 육군의 장교 명단에 따르면, 19사단 보병 73연대 소속의 소좌는 야스카와 사부로(安川三郎)’. 후쿠오카(福岡) 출신으로 1903년 소위로 임관했다. 1919년 소좌로 진급해 1920년 당시 보병 73연대에 복무 중이었다. 봉오동 전투에 참가했던 일본군 소좌는 야스카와 지로가 아니라 야스카와 사부로였다.

  

66, 야스카와 사부로가 지휘하는 월강추격대는 온성군 남양(南陽)에 집결했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 병력은 200여 명이었다. 이들은 밤 9시가 되자 본격적으로 두만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도하는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이어졌다. 67일 새벽, 두만강을 건넌 야스카와의 월강추격대와 니이미의 남양수비대는 안산(安山) 일대에서 합류했다. 북쪽으로 이동하던 이들은 안산(安山) 후방 마을에서 다시 독립군과 교전했다.

일본군이 봉오동으로 북상해 오는 상황은 독립군에게 속속 전달되었다. 독립군은 봉오동 마을의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병력은 상촌(上村)의 연병장에 집결시켰다. 봉오동 상촌 일대를 결전의 장소로 선정하고, 주위 고지에 매복하기로 했다. 1중대장 이천오는 상촌 서북단에, 2중대장 강상모는 동산(東山), 3중대장 강시범은 북산(北山), 4중대장 조권식은 서산(西山) 남단에 배치되었다. 홍범도는 2개 중대를 거느리고 서산(西山) 중북단에 자리잡고, 연대부속 장교 이원은 본부와 잔여부대를 거느리고 서북 산간에 대기했다. 신민단 병력들은 상촌 남쪽 산록에서 전투 준비를 했다.


독립군이 매복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일본군은 봉오동 어귀로 들어서고 있었다. 67일 아침 830분 무렵, 일본군은 봉오동 하촌부터 수색을 시작하며 양민을 학살했다. 하촌에서 중촌을 거쳐 상촌 방향으로 올라왔다. 일본군은 3~4시간에 걸친 수색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독립군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67일 정오 무렵. 야스카와 소좌가 이끄는 월강추격대가 봉오동 상촌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20여 분 후, 드디어 월강추격대가 상촌에 다다랐다. 바로 그 때 갑자기 상촌 주위 고지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들었다.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공격이었다. 독립군은 월강추격대와 4시간에 걸쳐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다. 결국 월강추격대는 큰 피해를 입고 봉오동 상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오후 4시 무렵, 폭우가 쏟아지고 시야가 제한되었다. 이를 틈타 일본군은 남쪽 유원진(柔遠鎭) 방향으로 서둘러 철수했다. 철저히 준비한 독립군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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