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테마

[2022/05] Theme. 3 순국선열 위상 강화와 유족회의 당면과제

페이지 정보

본문

청와대 부지에 순국선열추념관 조성 제언  


총독관사였던 아픈 역사 위에

‘민족의 정신적 고향’ 세워 거룩한 순국정신 승화해야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민족은 아무리 어려워도 결코 남이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민족국가의 지상(至上)과제는 끝까지 민족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순국선열(殉國先烈)들의 자기희생 위에서 대한민국과 대한민국헌법은 탄생했다.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조국을 지켜내는 거룩한 행위를 ‘호국’이라 이름하고, 그 거룩한 삶에 대하여 국가가 행하는 보답을 ‘보훈’이라고 부른다. 호국은 이미 가지고 있는 조국을 지키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그 조국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호국에 앞서 순국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사실 애국이라는 단어보다는 애국한 사람, 즉 애국의 행위, 애국의 순간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애국의 행위 가운데 하나가 호국이고, 그 애국의 행위 최정점엔 순국이 있었다.


첫 번째 장면
1592년 4월에 시작된 임진왜란! 

전쟁 초반에 평안도 중화(中和)고을 백성들의 활약이 눈부셨다. 당시 평안도의 책임자는 이원익이었다. 이원익은 배를 바닷가에 정박시키고서 백성들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국가를 위하여 싸우다가 죽는 것은 당연할지라도 너희 처자들은 사세가 급해지면 도망할 곳이 없으니 먼저 배 위에 오르게 하고서 적세를 관망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더니, 백성들은 대답하기를, “차라리 적에게 죽을지언정 강을 건너 어디로 가겠는가” 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기를 계속했다. 

당시에 평안도지역은 전사한 자가 수천이나 되었는데도, 한 사람도 적에게 붙은 자가 없었다. 이원익의 평안도에서의 활동은 조선을 살리는 불씨가 되었다. 임진왜란을 이겨낸 요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전쟁 초기에 전열을 정비하는 데는 평안도 백성들의 활약이 대단히 중요했다. 그렇다면 이원익은 어떻게 평안도를 전세 역전의 기반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이원익은 전쟁의 희생자를 기리고 그들의 희생을 보상하는 일에 철저를 기할 것을 주문했다. 국가가 지켜주지도 못한 백성들, 그 백성들이 국가를 위해 죽어갔는데 이들을 국가가 기리지 않는다면 국가는 두 번이나 실패를 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원익은 “전쟁터에서 죽거나 절의에 죽은 사람들”을 찾아내 “자녀가 있는 사람은 그들이 거처하는 곳에서 별도로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전쟁에서 희생자들에 대한 예우를 극진히 한 것이다. 이는 국가의 중요한 의무이다.

두 번째 장면, 1910년 8월 29일!

우리는 이날을 국치일(國恥日)이라고 부른다. 조선 왕조가 517년 만에 망한 것이다. 우리 역사상 왕조가 망한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고구려, 백제, 그리고 통일신라가 망했으며, 고려조 또한 망한 경험을 우리 역사는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910년의 망국은 이전의 망국과는 성격이 달랐다. 1910년의 멸망은 외세에 의해 병탄을 당한 결과라는 점에서 예전의 그것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이전의 망국은 왕조만 망한 것이었지만, 이번 망국은 민족 자체가 사라지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역사상 초유의 사태를 대하는 당시 사람들의 행태는 과연 어떠했을까? 이 땅의 모든 백의민족의 후손들은 당연히 비분강개하였을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다르게도, 1910년 여름의 대한제국 정부는 포상과 축제의 나날이었다. 수많은 벼슬아치들이 승진을 하였고, 훈장을 받았으며, 이미 죽은 자들에게는 벼슬이 추증되거나 시호가 내려졌다. 

8월 1일 26명에게 시호를 주기 시작하여 순종비의 큰아버지 윤덕영 등에게 품계를 승격시켜 보국대부로 하는 등 승진 잔치가 이어졌다. 고종의 형인 이재면을 봉하여 흥친왕으로 삼고 그 저택을 흥친부(興親府)라 칭하였다. 이 흥친왕은 책봉의 예를 행한 뒤 창기들을 불러 종일 잔치를 열고 즐겼다.

순국선열 황현 선생이 남긴 『매천야록』을 의하면 “당시에 합방론이 이미 정해졌는데도 증직을 의론하여 미친개처럼 쫓아다니니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절망하였다. 망국의 현장에서 매천이 목도한 것은 바로 국가의 잘못된 훈장 놀음, 요즘 용어로 말하면 보훈 정책의 실패와 관련이 있었다. 

세 번째 장면, 1919년 4월!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 후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우리 스스로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제국(帝國)으로 망한 나라가 공화국(共和國)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새롭게 태어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을 제대로 이끌어 가기 위하여 헌법을 제정했다. 1919년 4월 11일에 채택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최초의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하여, 국호는 대한민국, 정치체제는 민주공화제임을 선언했다. 

임시정부헌법은 1945년 8월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5차례 개정되어 내려오다가 마침내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헌법의 성립 유래와 기본원리를 천명하고 있는 대한민국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이 현재의 대한민국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헌법전문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어느 날 갑자기 우연하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우리의 현대사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서 193명, 그리고 1960년 4·19혁명 당시에는 185명이 희생되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3·1운동 당시의 민족의 희생은 7,500여 명에 달하고 있다. 나아가 저 악랄한 일제통치 하에서 순국하신 선열들의 수는 약 15만 명에 달한다. 하지만 순국선열 15만여 명 중 3·1운동 이전에 10만여 명은 이미 순국을 하였다. 이 희생이 바로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민족은 아무리 어려워도 결코 남이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국가는 가는 길이 아무리 괴로워도 마지막 자살할 권리마저 가질 수가 없다. 민족국가의 지상(至上)과제는 끝까지 자신의 생명력으로 살아남는 일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순국선열(殉國先烈)들의 자기희생 위에서 대한민국과 대한민국헌법은 탄생했다. 

우리 민족은 조국이 어려울 때 분연히 일어나 위기의 조국을 구한 수많은 민초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을 기리는 행위는 국가보다는 또다시 민초들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조국을 지켜내는 거룩한 행위를 ‘호국’이라 이름하고, 그 거룩한 삶에 대하여 국가가 행하는 보답을 ‘보훈’이라고 부른다. 

호국은 이미 있는 조국을 ‘지키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조국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순국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애국이라는 단어보다는 애국한 사람, 즉 애국의 행위, 애국의 순간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애국의 행위 가운데 하나가 호국이고, 그 애국의 행위 최정점엔 순국이 있었다.

순국이란 자신의 삶을 국가의 운명과 함께하는 것을 말한다. 15만 순국선열 한 분 한 분의 희생이 씨앗이 되어 마침내 조국을 되찾았기에 그 후에 호국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보훈사는 그 출발이 바로 순국선열이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 보훈의 출발인 순국선열은 지금 어떻게 계신가? 

네 번째 장면

대부분은 후손도 없는 순국선열들은 광복 이후 52년이 흐른 뒤인, 지난 1997년이 되어서야 서울시의 협조로 서대문구 독립공원 내 독립관을 세를 내어 겨우 2,835위의 위패가 아주 초라하게 봉안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순국선열은 3,500여 분으로 15만 순국선열 가운데 2%에 불과하다. 이 2%의 선열조차 모두 모시지 못하고 있으니, 나머지 700여 위는 더 이상의 공간이 없어 아직까지도 모시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순국선열 후손들에 대한 예우는 어떠한가? 국가로부터 연금혜택을 받는 순국선열의 후손은 0.5%에 불과하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과 유족들께 대한민국은 국가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치의 출발은 공정한 상벌의 적용이다. 잘한 자에게 상이 없고, 잘못을 한 자에게 벌을 주지 않으면서 그 사회가 유지되기를 바란다면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다. 순국하신 선열들의 공훈을 기리는 보훈에 미진하였으니, 잘못된 친일행위에 어떻게 벌을 줄 수가 있었겠는가! 

2022년 5월 10일 취임하는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과 소통하는 일하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제왕적 대통령의 잔재를 철저히 청산해야 한다”면서 “권위만 내세우는 초법적인 대통령은 이제 없어질 것이다. 대통령은 ‘법의 지배’ 틀 안으로 내려와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 위해 새로운 대통령실을 구축하고 기존의 청와대 부지는 “국민들께 돌려 드릴 것”을 천명했다. 

기존의 청와대를 국민들에게 돌려준다면 어떤 방식이 있을 수 있을까? 윤 대통령은 기존 청와대 부지 활용 방안에 대해서 “역사관이나 시민공원 등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선 일단 돌려 드려놓고 국민께서 판단하셔야 한다. 전문가 의견도 듣겠다”고 했다.

청와대란 어떤 곳인가!

일본제국주의가 우리 민족을 억압하고 수탈했던 총독의 관사가 있었던 바로 그곳이 아닌가! 일본인들은 조선 왕권의 상징인 경복궁을 가로막아 그 앞에 청사를 짓고 그 뒤편에는 총독관사를 지음으로써 민족정기의 맥을 끊어  이 나라를 영원히 지배하고자 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이곳은 미군정 사령부 하지 중장의 거처로 사용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경무대,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어 가며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었다.

순(殉)이라는 글자는 ‘따라 죽는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삶을 국가의 운명과 함께하는 것을 말한다. 가장 소중한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조국 을 되찾기 위해 버려버리는 지고무상(至高無上)의 가치이다. 이 소중한 가치가 대한민국을 탄생시켰으니, 순국정신은 바로 ‘대한민국의 정신적 고향’이다. 

선열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을 이제 다시는 순국의 희생이 필요 없는 나라로 지켜내는 일은 우리 후손들의 책무이다. 하지만 또다시 조국이 심각한 국난에 직면한다면 무엇으로 대처하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선열들의 희생을 기리지 않을 수 없는 준엄하고도 분명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순국정신을 기리는 우리 대한국민의 나라는 지구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기에, 아픈 민족사를 간직하고 있는 청와대 부지에 순국선열추념관을 조성하여 민족의 거룩한 순국정신을 승화시키는 소중한 장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필자 최진홍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율곡 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감사와 월간 순국 편집위원으로 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5대 직계손으로, 이 시대가 당면한 수많은 문제를 풀어낼 지혜를 지나간 역사로부터 찾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