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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 Theme.1 의병항쟁의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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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은 민본주의 정신문화의 역사적 표현 


국민정신의 국수(國粹)요

한민족의 민족적·역사적 자기신원에 대한 실현   


글 | 최창규(전 서울대학교 교수) 


의병은 민군(民軍)이다. 민(民)은 관(官)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우리의 정신문화 속에서 민은 분명히 역사의 본체(本體)로서[民本], 언제나 그 가치가 주체(主體)인 군왕보다도 선행하고 있었다. 역사의 주체인 군왕이나 조정의 명(命)도 기다리지 않고 역사의 본체인 민이 직접 분기(奮起)하는 의병은 우리 겨레 민본주의 정신문화의 활발한 역사적 표현이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민유방본(民維邦本)]’이라는 동양의 고전 『서경』에서 천명된 단어가 위정자의 측면이 아니라 백성의 측면에서 오롯이 표출된 모습이 바로 의병인 것이다. 그렇다면 의병의 상징으로 붙여진 민군으로서의 민(民)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고, 그것의 가치정향으로서 강조된 의(義)의 가치는 무엇이었으며, 또 그것의 동기정향으로 회복하려 한 민족의 자기신원은 그 본질이 무엇이었을까?  


민족사에서 바라본 의병항쟁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조국 대한민국!


반만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정의하기에는 곤란한 주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역사가 청산과 창조가 요구되는 전환국면마다 의로운 정신이 역사의 새 주체를 낳는 활력으로 솟아 올라왔었다는 사실을 상기(想起)할 필요가 있다. 삼국분립을 청산한 화랑, 통일신라·발해의 남북조를 청산한 6두품, 그리고 중세 고려를 극복한 사대부 등이 그 주체들이다. 


불행하게도 근세조선 600년을 초극(超克)해야 했던 구한말, 우리는 그만 이 사명을 담당할 주체가 탄생하기도 전에 외세의 침략에 의하여 역사부터 단절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끊어진 역사 속에서도 그 주체를 스스로 담당하고 탄생시키려는 역사주체자로 의병이 재탄생하였고, 마침내 끊어졌던 역사를 다시 이어가게 되었다. 위대하도다! 민족의 저력 의병정신이여!


민족의 저력 의병에 대해 알아보기 위하여 먼저 박은식 선생을 만나보기로 하자. 박은식 선생은 의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병은 민군(民軍)이다. 국가가 위급할 때 즉각 의(義)로써 분기하여 조정의 징발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여 적개(敵愾)하는 사람이다. 우리 민족은 본래부터 충의(忠義)가 두터워 삼국시대부터 외환에 있어서 의병의 적공(積功)이 가장 탁월하고 현저하였다. 조선에 와서는 선조 때에 왜구에게 짓밟힘이 7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혹은 유림이 혹은 향신(鄕紳. 지방 양반)이 혹은 승려들이 다 초야에서 분기하였으니, (…) 오직 충의의 격려(激勵)로써 (…) 결사감전(決死敢戰)하였다.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계속해서 적이 물러갈 때까지 싸우고야 말았다. 수훈(殊勳)과 고절(高節)은 일월처럼 밝게 빛나며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하고 영토를 회복하는 데 크게 힘입은 바 있다. 그러므로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이다.


정리해보면, 의병은 국가적 측면보다는 민족적 측면을 대표하는 민중의 군이며, 그 같은 민군을 동원시킨 기본적 가치정향(價値定向)은 바로 ‘충의(忠義)’라는 역대 민족사를 통하여 배양시켜온 국민정신의 국수(國粹)였다. 국수(國粹)란 한 국가나 민족이 간직하고 있는 고유한 정신적, 물질적 장점을 말한다.


말하자면 의병은 국가적 측면에서 입은 역사적 제약을 그 민족적 측면에서 해결하는 민족사의 또 하나의 활력이었고, 그 같은 에너지는 민족사를 통하여 배양되어 온 한민족의 역사적 정화(精華)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같이 동원된 민군이 획득하려 한 동기정향(動機定向)은 바로 외환이라는 민족적 모순 앞에서 자기의 강상을 부식하고 자기의 강토를 회복한다는 한민족의 민족적·역사적 자기신원(自己身元, self identity)에 대한 실현이었다.


관(官)이 아닌 민(民)이 낳은 국혼(國魂)


주지하듯이 의병은 민군(民軍)이다. 민(民)은 관(官)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우리의 정신문화 속에서 민은 분명히 역사의 본체(本體)로서[民本], 언제나 그 가치가 주체(主體)인 군왕보다도 선행하고 있었다.


역사의 주체인 군왕이나 조정의 명(命)도 기다리지 않고 역사의 본체인 민이 직접 분기(奮起)하는 의병은 우리 겨레 민본주의 정신문화의 활발한 역사적 표현이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민유방본(民維邦本)]’이라는 동양의 고전 『서경』에서 천명된 단어가 위정자의 측면이 아니라 백성의 측면에서 오롯이 표출된 모습이 바로 의병인 것이다.


그렇다면 의병의 상징으로 붙여진 민군으로서의 민(民)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고, 그것의 가치정향으로서 강조된 의(義)의 가치는 무엇이었으며, 또 그것의 동기정향으로 회복하려 한 민족의 자기신원은 그 본질이 무엇이었을까? 의병의 상징인 민과 그 가치정향인 의, 그리고 그것의 동기정향인 강상과 강토라는 자기신원은 모두 민족이란 가치 앞에 다음과 같이 보이고 있다.


우리 땅은 한국(韓國), 우리 겨레는 한족(韓族)이다. 이제 우리 뒤에는 내 나라도 없고 내 겨레도 없다. (…) 어찌하겠는가? 한마디로 우리 대한[아한(我韓)]이 회복된 연후에 우리는 나라 가진 백성, 겨레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살아있어도 아한(我韓)을 회복하는 일이요, 죽어서도 아한을 회복하는 일뿐이다. 생사를 무릅쓰고 아한을 회복해 놓는 일만이 우리들의 사명이다. 그것을 위하여 단체를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이제 대의(大義)를 펴서 대공(大功)을 세우기로 하자. (유인석, 경시제임원 -警示諸任員-)


여기서 우리의 의병 앞에 붙여진 상징으로서의 민군, 민병의 민은 바로 아한을 가리키는 민족적 주체로서의 민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의병이 회복하려는 자기신원은 우리 땅인 한국(韓國)과 우리 겨레인 한족(韓族)이 만나면서, 마침내 ‘우리 대한[아한(我韓)]’이라는 역사적 정체성으로 정립되었다.


아한이란 한민족의 자기신원[정체성]을 회복시키는 민족의 대공을 이루기 위해서 먼저 대의(大義)를 현양(顯揚)하였다. 민족이라는 큰 공을 이룩하기 위하여 강조된 대의였기에 의병이 내세운 의는 바로 포괄적인 민족적 실험윤리(實驗倫理)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의병에서 확인되는 아한이란 민족주의의 상징은 침략 앞에서 저항하는 나(我)라는 주체도 중요하지만 그 주체를 성립시켜온 한(韓)이라는 자기본질 역시 중요했다. 한(韓)이라는 자기본질은 바로 우리 정신의 역사적 전개요 축적이었기에, 무엇보다도 먼저 침략자 일제 앞에서 자기를 보존시키는 자주의 원리로 작동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제까지 묻혀온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자기를 분립시키는 독립의 활력으로 승화될 필요가 있었기에 다음과 같은 포고(布告)가 함께 하였다. 


토지와 인민과 정사는 모두 우리가 자립(自立)하고 자주(自主)하여 털끝만큼도 저들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 수양제와 당태종의 위세로도 패하여 돌아감을 면치 못하였으며 (…) 임진왜란에 비록 명나라의 구원이 있었지만 회복하여 전승(全勝)한 공은 모두 우리 군사가 왜선 70여 척을 노량에서 침몰시킨 데 있었다(포고팔도사민 -布告八道士民-).


의병정신과 세계평화 


우리 한민족에게만 있었던 독특한 형태였던 의병항쟁은 우리 민족의 개별적 민족주의에 대한 상징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의병정신 속에는 만국공법과 인류양심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평화사상이 함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적 가치로서의 의(義)가 우리 민족을 중심으로 주장되면서 한국민족주의의 본질을 이루었지만, 그것이 일단 세계 인류 앞에 대동(大同)이라는 대의(大義)로 발전할 때 그것은 피아(彼我)의 구별이 없는 인류공영의 평화윤리로 나타났었다.


민족이라는 특수성이 인류라는 보편성과 함께 조화되는 의병항쟁의 특징을 안중근 의사를 통하여 살펴본다. 안 의사는 의병전쟁에 앞서 먼저 동양이 함께 공존해야 할 동양평화를 강조하였고, 무력적 토벌보다는 저 일본이 자신들의 죄과를 씻고 우리와 함께 의로운 하나가 될 것을 요구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한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하얼빈 의거를 ‘동양평화를 위한 의로운 전쟁[동양평화의전(東洋平和義戰)]’이라 칭하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주장하는 ‘동양평화’는 이웃 나라를 침략해 일본에 종속시키는 것이었기에 안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제거는 동양평화를 지키려는 정의의 응징이었다. 안 의사가 스스로 만든 자신의 직함이 바로 대한국 의군(大韓國 義軍) 참모중장이었다.


안 의사가 북간도로 망명하여 독립군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1908년 6월에 교전 중 포로로 잡힌 일본 군인들과 상인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무슨 까닭에 러일전쟁 때 선전포고문에서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대한의 독립을 굳건히 한다고 한 일왕의 뜻을 받들지 않고 이처럼 경쟁하듯 침략하고 있으니 이것을 평화이고 독립이라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본심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토 히로부미가 임금의 뜻을 받들지 않고 멋대로 권세를 농락하는 형세여서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었다고 해명을 하자, 안 의사는 그들을 모두 석방하면서 돌아가서 이토 히로부미 같은 난신적자(亂臣賊子)를 모두 쓸어버릴 것을 주문하였다. 


포로들이 총기를 안 가지고 가면 돌아가 군율을 면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하자, 총포까지 돌려주며 포로들을 돌려보낸 안 의사의 행위에 대하여 의병 내부에서 불만이 제기되자, 안 의사는 “일본의 4천만 인구를 모두 죽인 뒤에 국권을 되찾을 계획이요? (…) 우리는 약하고 저들은 강하니 힘든 싸움은 옳지 않소. 충성스런 행동과 의로운 거사를 통해 이토의 폭압적인 정략을 성토하고 세계만방에 널리 알려 열강들의 동감하는 뜻을 얻은 뒤에야 국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요. 이것이 이른바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제거하고 인(仁)으로 악을 대적하는 방법”이라 하였다.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제거하고 인(仁)으로 악을 대적하는 방법’이라는 안 의사의 주장에서 우리는 의병항쟁이 단순히 약한 자의 정의라는 소극성이 아니라, 오히려 강한 자의 불의(不義)를 광정(匡正)시키는 적극성의 발로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의병에서의 의(義)는 바로 도(道)요, 병(兵)은 그대로 기(器)로 연결된다. 기(器)로서의 병(兵)은 패할 수 있어도 도로서의 의는 결코 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의병의 승리는 바로 도전(道戰)의 승리이다. 진리와 도덕으로 싸우는 도전은 그것이 귀결될 때 피아(彼我)의 구별 없이 모두 함께 승자가 되어 다 함께 승리할 수 있으니, 한민족의 의병정신은 온 인류가 공승(共勝)하는 참다운 세계평화의 활력으로 작용할 우리 민족의 소중한 정신문화이며, 동시에 온 인류에 필요한 시대정신이기도 한 것이다.  


필자 최창규 

1937년 충남 청양 출생. 서울대 정치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를 거쳐 11대·12대 국회의원, 독립기념관장, 성균관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근대 한국정치사상사』, 『새한민족사』, 『한국의 사상』, 『한국인의 정치의식』, 『한민족근대화정치론』, 『민족과 조국 그리고 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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