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 Theme.3 지역별 의병항쟁과 주요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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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계속된 목숨 건 대일 항전
연해주에서 제주도까지
한반도 전역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글 | 홍영기(순천대학교 명예교수)
한말 의병들은 연해주로부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벌떼처럼 일어났다. 유명한 유학자나 전직 관료, 한미한 지방 유생, 향리, 해산군인, 빈농, 머슴 등 매우 다양한 계층이 우국충정과 사생취의 정신으로 구국항쟁을 전개하였다. 의병들은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일제에 체포되어 옥중 순국한 이들도 많았다. 머나먼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가장 강력한 투쟁을 전개한 전남지역을 대상으로 초토화작전을 펼침으로써 수많은 의병들이 죽거나 체포되었다. 일제 군경의 포위망을 벗어난 의병들은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하거나, 국내에 잔류한 경우에는 광복회와 독립의군부에 가담하여 1910년대 국내비밀결사운동을 주도하였다.
19세기 말 최초로 일어난 의병
이에 명분을 중시하는 지방의 유학자들이 위정척사운동의 일환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1894년 8월 공주 유생 서상철은 경상도 예안향교에서 의병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활동을 벌였으나 관군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아마도 19세기 말 최초의 거의를 시도한 것이다. 1년여 후인 1895년 말 문석봉은 충청도 유성에서 국수토적(復讐討賊) 즉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논리로 의병을 일으켰다.

강원도 춘천에서는 이소응 등이 개화파 관리 조인승 등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벌이다 강릉에서 항일전을 수행하던 민용호 의진에 합류하거나 제천의진에 합류하였다. 당시 민용호는 원주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강릉으로 이진하여 강원도 북부지역을 장악해서 원산에 거주하는 일본인 공격에 앞장섰다. 그는 강릉의진을 이끌던 권인규와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충청도에서는 제천의 유생 유인석·안승우 등이 의병봉기에 앞장섰다. 이들은 지평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백선·이춘영 등과 연합하여 개화파 관료들을 처단하고 충주성을 점령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원주의 이인영, 문경의 이강년, 횡성의 이명로, 영춘의 권호선 등이 제천의진에 합류함으로써 의진의 규모는 2천여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강력한 공격으로 의진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유인석은 이른바 서행(西行) 길에 올라 요동에 들어가 중국의 군사적 협조를 구했으나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었다. 결국 귀국하라는 고종의 명령에 따라 고향인 춘천으로 귀향하였다.
1895년 12월 충청도의 유학자 안창식·박창로·채광묵·김복한·안병찬·이설·홍건 등은 힘을 모아 홍주성을 근거지로 삼아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의 기세에 주눅이 든 관찰사 이승우는 일시 의병에 가담했다가 등을 돌렸다. 그는 김복한·이상린·안병찬·송병직·이설 등 20여 명을 구금함으로써 홍주의병은 해산하고 말았다.
경상도 안동에서 단발령 직후에 의병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안동의 대표적 서원인 호계서원에 도소를 설치하고서 창의를 천명하였다. 의병장에 추대된 권세연은 유완·권용현·이운호 등으로 안동의진의 지휘부를 편성하였다. 이들은 안동부를 점령하고서 의병활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각 문중뿐만 아니라 향교와 서원, 서당에 총 2만 냥 이상 할당하였다. 안동의진은 김도화를 대장으로 하는 등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아울러 인근 지역인 풍기·순흥 ·영천·봉화·선성 등지에서 봉기한 여러 의진과 연합하여 안동의 태봉에 위치한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무기와 훈련 면에서 일본군과 비할 바가 못 된 이들은 패산하고 말았다. 이때 일본군은 의병의 근거지였던 안동부를 방화함으로써 1천여 호가 소실되었다.
경상도 김산에서도 이기찬을 비롯한 여영소·허위·양제안·조동석 등이 향교에서 의진을 결성했으며, 예안에서는 퇴계 이황의 후손 이만도를 중심으로 선성의진을 조직했고, 청송에서는 심성지를 대장으로 하는 의진이 일어나 활동했다. 봉화와 영양에서도 각각 금석주 조승기가 의병을 일으켰고 의성의 김상종, 영덕의 신운석 김노현, 영해의 이수악, 풍기의 김교명, 영천의 김우창, 순흥의 홍종선, 예천의 박주상 장석규, 진보의 허겸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한편, 함양에서는 노응규가 서재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을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전라도에서는 장성과 나주를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노사 기정진의 손자로서 노사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기우만은 1896년 3월 장성향교에서 기삼연 고광순 기재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전라도의 모든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함께 거의에 나서자고 호소했는데, 나주의 유생과 향리들이 적극 호응하였다. 나주의 유생들은 이학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지휘부를 구성해서 활동에 돌입하였다. 기우만은 나주의병과 연합하여 북상하기 위해 나주로 이진해서 호남대의소와 나주의소를 결성하였다. 호남대의소는 기우만이 이끌고 북상을 준비했으며, 나주의소는 이학상·정석진·이승수·김창균·박근욱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나주부 참서관 안종수를 처단하는 등 반개화활동을 전개하다가 선유사 신기선의 명령에 따라 해산하고 말았다.
한편, 1895년 11월 평북 강계에서는 김이언이 김구 등과 의병을 일으켰으며, 1896년에 이르러 함흥에서는 최문환이 의병을 일으켜 개화파 참서관과 주사 등을 처단하였다. 의주에서도 조상학이 압록강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등 단편적인 거의 사실들이 전해진다.
지역적으로는 현재의 남한지역에서 일어난 의병이 많았다. 특히, 경상도의 경우 안동을 비롯한 북부지역 상당수의 군현이 의병에 동참했으며, 경기도 이천, 강원도 춘천과 강릉, 충청도 제천과 홍주, 전라도 장성과 나주, 경상도 진주 등 각 도의 대표적인 고을의 유생들이 의병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각 도별로 연합의진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는데, 대체로 개화파 관료의 처단에 앞장서는 등 반개화활동에 앞장섰다. 또한 일본의 국권침탈을 강력히 반대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했음은 물론이다. 이들은 통문과 상소를 통해 자신들의 의사를 천명했지만, 무장투쟁 면에서는 미흡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의 의병항쟁은 명분과 춘추의리를 강조함으로써 민중의 전폭적 지지를 얻는 데에 실패함으로써 의병활동 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었다.
을사늑약 전후하여 격화된 의병항쟁
1905년 11월 대한제국을 식민화하기에 앞서 일제는 이른바 ‘보호국’으로 삼기 위해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함으로써 반식민지가 된 것이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조약의 체결에 찬성한 이른바 ‘을사5적’을 성토하는 주장이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다. 조약의 파기와 일본의 구축 그리고 매국노를 처단하자는 주장이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었으며, 이 가운데 조병세 민영환 등은 조약에 반대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장렬하게 자결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일어난 것이다.
19세기 말 의병을 일으켰던 인물들은 은인자중하며 정세를 관망하던 중 을사늑약을 계기로 거의를 본격화하였다. 을사늑약 직전에 강원도 원주에서는 원용팔이 의병을 일으켜 단양·영월·홍천·영춘 등지에서 활약함으로써 그 이후의 의병봉기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화서 이항로의 대표적 문인 유중교의 제자로서 이미 제천의진에서 활동한 바 있었다. 이와 같이 대체로 원용팔의진에서 활동한 의병은 유인석과 관련된 화서학파 계열의 유생들이 많았다. 원주진위대의 계략에 속아 의병장 원용팔이 체포되어 옥중 순국하였고, 그 후 단양의 정운경이 잔여 의병을 수습하던 중에 체포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
1906년 봄 충남의 전직 관료와 유생들은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의병의 재기를 모색하고 있었다. 이설과 안병찬 등이 주도했는데, 이들은 충남 정산에 낙향한 전 참판 민종식 등과 연락하여 충남 광시에서 의진의 결성에 전념하였다. 의병장에 추대된 민종식은 이남규·김복한·안병찬·이세영·박창로 등과 힘을 합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나 홍주성 진입에 실패하였다. 같은 해 5월 그는 충남과 전북을 전전하며 의병을 다시 규합하여 홍산·서천·비인·보령·광천·결성 등지를 순회하며 의병을 증강시켜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충남지역 유생들이 계속 합류함으로써 한때 1,200여 명을 상회하는 군세를 자랑하였다.
이들을 홍주의병이라 하는데, 민종식은 채광묵·정재호·이남규·신현두·곽한일·문석환·안병찬·박창로·이식·안항식·유준근 등과 함께 진용을 재편하였다. 하지만 홍주의병은 유생들이 많은 편이어서 ‘유병소(儒兵所)’를 설치하여 따로 관할하였다. 일제는 즉각 군경을 파견하여 홍주의병을 공격하였다. 약 열흘 동안 치열한 공방전 끝에 홍주성은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 홍주성 전투 및 이후 진압과정에서 의병 수백 명이 전사했으며, 약 80명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남규진·이식 등 9명은 일본 대마도에 유폐되었다. 홍주성 함락 후에도 잔여 의병들이 산발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이후의 의병항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미 10년 전 진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노응규는 고종의 호의로 잠시 관직에 나아가 활동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그는 의병에 투신하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태인의병에 참여한 바 있으며, 1907년 1월 충북 황간에서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서은구·엄해윤·노승용 등과 의진을 편성하고 활동에 나섰으나 얼마 안 되어 체포됨으로써 의진은 해산되었다. 노응규는 감옥에 갇혀있다가 병을 얻어 옥중 순국하였다.
1907년 5월 이강년은 안성해·백남규·김상태 등과 같이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횡성 ·영춘·제천·단양 등을 무대로 일제 군경과 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중상을 당한 이강년은 한동안 부상을 치료하며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전라도에서도 여러 의진이 잇달아 일어나 항일투쟁을 벌였다. 먼저 1906년 6월 최익현·임병찬을 비롯한 최제학·고석진 등이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최익현은 송병선의 자정 순국에 충격을 받아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호남지역 유생들의 협조를 얻어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는 연로하여 군무를 임병찬에게 맡겼다. 임병찬은 포수 확보에 적극 노력했으며, 노사학파의 기우만 등과도 연합하기 위한 용추사 회담을 주선하였다. 이때 양 세력은 연합의진의 결성에는 합의하지 못했으나, 「동맹록」을 함께 작성하여 112명의 명단이 전해진다. 최익현은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정읍·순창·곡성 등지를 순회하며 약 1천 명의 의병을 모았으며, 다량의 군수물자를 확보함으로써 북상할 준비를 마쳤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진위대를 본 최익현은 ‘동족과는 싸울 수 없다’며 의병의 해산을 지시하였다. 그는 해산에 불응한 이른바 ‘순창12의사’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임병찬과 더불어 대마도에 유폐되었다가 그곳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죽음은 황성신문을 비롯한 언론에 대서특필됨으로써 전 국민들에게 우국충정의 감동과 충격을 주었다. 그의 영향으로 수많은 의진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전북 남원에서는 1906년 음력 섣달그믐날(양력 1907.2.12) 양한규가 의병을 일으켰다. 남원의 유명한 향리 출신이었던 그는 최익현의 거의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창평의 고광순과 긴밀하게 연락하며 연합의진을 결성하여 지리산에 웅거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남원성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그가 유탄에 맞아 절명함으로써 의병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전남 광양의 백운산에 은거하던 백낙구는 맹인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킨 특이한 인물이다. 그는 실직한 향리들을 대거 가담시켜 의진을 구성하였다. 1906년 11월 이들은 광양을 점령한 후 순천 공격에 나섰다가 구례에서 체포되어 전남 완도군 고금도로 유배되었다. 그 역시 1907년 12월에 풀려났으나 전북 태인에서 다시 의병에 가담했다가 장렬히 전사, 순국하였다.
경북에서는 산남의진의 활동이 돋보였다. 1906년 3월 정환직은 고종의 밀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아들 정용기로 하여금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키도록 지시하였다. 정용기는 이한구·손영각·정순기 등과 함께 산남의진을 결성하여 활동하던 중 체포되었으나 부친의 노력으로 겨우 풀려났다. 그는 산남의진을 재건하여 다시 항일투쟁에 나섰다가 전사, 순국하였다. 아들을 이어 아버지 정환직이 의진을 이끌며 분전했는데, 영덕·흥해·청송·포항·경주 일대에서 위세를 떨쳤다.

그리고 북한지역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황해도의 우동선이 의병을 일으켜 신천·장연·송화·재령 등지를 무대로 활동했다. 이들은 1907년 후반 이후에 더욱 강력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이상과 같이 을사늑약 전후에 전개된 항일의병은 대체로 현재의 남한지역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대표적 학통을 계승한 유학자도 있었지만, 그 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와 전직 관료들이 이 시기의 의병항쟁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신돌석과 같은 평민이나 다름없는 의병장이 눈부신 유격전을 전개함으로써 의병을 주도한 계층의 변화가 감지된다. 한편, 이들은 대규모의 의진을 형성해서 일시 세를 과시했으나, 장기항전체제에 적당한 군사적 기반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다만, 이들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의진이 각지에서 봉기함으로써 1907년 후반의 의병항쟁으로 계승되었다.
전국 방방곡곡, 항일의병의 전장 터
1907년 후반 대한제국은 망국의 조짐이 더욱 짙어졌다. 일제는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 삼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으며, 정미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인들이 대거 대한제국의 관직을 꿰찼다. 더욱이 허울이나 다름없는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8월 1일부로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지방의 진위대도 군대해산에 강력히 반발하며 의병으로 전환해갔다. 강원도 원주진위대는 김덕제와 민긍호의 주도로 무기고를 장악하여 무장한 후 원주의 포수와 농민들과 합세하여 강력한 의진으로 탈바꿈해서 이 시기의 강원도 의병항쟁을 선도하였다. 김덕제는 약 600명을 이끌고 평창 강릉 양양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했으며, 민긍호는 약 1천 명을 지휘하며 원주·충주·홍천·횡성·제천·죽산·여주 등 강원도와 경기도를 넘나들며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강원도 선유사 홍우석과 관찰사 황철은 민긍호를 체포 내지 귀순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으나 그는 단호히 거부하며 일제 군경에 맞서 싸웠다. 1907년 말 그는 13도창의대진소의 관동창의대장으로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다. 서울 점령이 실패로 돌아간 후 그는 강원도에서 주로 활동하던 중 탄환이 떨어져 치악산 근처에서 체포되었다. 그를 구출하려던 의병들이 들이닥치자 일본군은 그를 불법 사살함으로써 민긍호의진의 항일투쟁은 막을 내렸다.
서울에서 시작된 해산군인들의 항일투쟁은 원주뿐만 아니라 경기 강화와 황해도 등지로 확산되었다. 연기우·지홍윤 ·유명규는 강화진위대 소속이었는데, 이들은 강화도를 비롯한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를 무대로 의병항쟁을 벌였다. 이들은 대한자강회와 개신교 세력의 호응과 지원을 받아 활동한 점에서 주목된다. 김규식·정용대·김수민 등은 경기도 장단과 임진강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정원집·추기엽·정철화 등은 경기도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전남의 외딴섬으로 유배되었다가 유배지를 탈출하여 다시 의병에 가담하여 눈부신 활동을 펼쳤다.
1907년 후반 이후 북한지역에도 의병이 크게 증가하였다. 황해도에서는 이진룡 박기섭 등이 우동선의 뒤를 이어 장수산을 근거지 삼아 의병활동을 벌였으며, 평안도에서는 김관수와 같은 유인석의 문인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특히 채응언은 평안 강원 황해도 등지를 넘나들며 1915년까지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함경도의 북청 삼수 갑산 등 산악지대에서는 홍범도·차도선 등 직업적 포수와 해산군인들이 의진을 결성하여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함북의 경성(鏡城)의병은 대한협회 경성지회 및 이범윤·안중근 등이 이끄는 연해주의병과 연계하여 의병항쟁을 전개했다.
충청도에서는 이강년·한봉수·김상태·노병대 등이 의진을 이끌었다. 이들은 경상도 북부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던 신돌석·정환직·변학기 등이 지휘하는 의진과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경남지역에서는 서병희 의진이 유격투쟁을 벌였다.
전라도 의병항쟁은 단연 돋보였다. 1908년 전라도의 의병들은 일본 군경과 교전 횟수 및 교전 의병 수에서 전국 대비 25%와 24.7%를, 1909년에는 47.3%와 60%를 차지했다. 그중에서도 전라남도의 의병이 더욱 강력하게 투쟁하였다. 그러한 투쟁을 선도한 의병장으로는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한 기삼연을 비롯하여 김동신·고광순·김준·김율·이석용·문태서·전해산·심남일·안규홍·황준성 등 일일이 거명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기삼연은 1907년 10월에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여 장성·고창·영광 등 전라도의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의병항쟁을 펼쳤다. 그는 전남지역 후기의병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김동신과 고광순 등은 험준한 산악지대인 지리산을 장기항전의 근거지로 삼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김준은 동생 김율과 함께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우며 나주·함평·광주 등지에서 활발한 유격투쟁을 전개하였다.
1908~1909년 사이에 전해산은 영광·함평·나주 등 주로 전라도 서부지역에서, 심남일은 함평과 강진을 축으로 하는 남부지역에서, 안규홍은 보성·순천·광양 등의 동부지역에서 각각 눈부신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한편, 전라북도에서는 이석용의 창의동맹단이 진안과 임실에서, 무주·진안·장수 등의 전북의 덕유산 일대에서는 문태서 의진이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심지어 해남·완도와 같은 연해 도서지역에서도 황준성·황두일·추기엽 등이 항일투쟁을 주도하였다. 전라도 의병들은 일제의 1909년 9월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南韓暴徒大討伐作戰)’이 실시될 때까지 끈질긴 반일투쟁을 전개했다. 이 작전으로 말미암아 다수의 의병장을 비롯한 500여 명이 전사하였고 약 2천 명이 체포되었는데, 이로써 의병항쟁이 일단락되었다.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박물관장, 지리산권문화연구원장, 인문예술대학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여순사건위원회 위원, 순천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함께하는남도학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2004), .한말 후기의병.(2009), .동학농민혁명과 의병항쟁.(2016), .한말 의병에서 독립군으로.(2017)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