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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 봉오동 전투의 전개과정과 역사적 의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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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독립전쟁 선포 100주년, 봉오동 전투 100주년

한국 독립전쟁의 횃불, 봉오동 전투 (1) 

독립전쟁의 자랑스러운 첫 승리

항일투쟁에 불씨를 지피다


봉오동 전투는 누구의 승리인가


독립군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의 불령선인단(不逞鮮人團) 섬멸이라는 전투 목적을 좌절시키고 승리했다. 하지만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는 전과에 대한 인식 차이가 있다.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軍務部) 발표에는 일본군 전사 157, 부상 300명이며, 독립군 전사 4, 부상 2이라고 되어 있다. 일본측 기록에는 일본군 전사 1, 부상 2명이며, 독립군 전사 24, 부상 다수라고 되어 있다.

일본측 기록의 준거가 되는 자료는 봉오동부근전투상보(鳳梧洞附近戰鬪詳報). 봉오동 전투에 직접 참가했던 야스카와 소좌가 작성한 전투 후 보고서다. 봉오동 전투 이후 이에 대한 일제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의 공식 발표가 있었다. 보고서의 작성 시점은 조선군사령부의 공식 발표가 있던 619일 이전으로 추정된다.

 

보고서는 전체 총 62쪽에 달한다. 당시 적군과 아군의 상태, 기후와 지형 정보, 전투의 진행 과정, 병참과 통신 수단, 전투에 대한 소견 등이 구체적으로 작성되어 있다. 전사상자의 소속, 계급, 성명, 부상 부위까지 기록되어 있어, 신빙성 높은 자료로 평가되어 왔다.

하지만 주제별로 편성된 목차에 오류가 있고, 시간별로 일본군 병력수 기록에 차이가 있으며, 사상자 현황에도 오류가 있다. 또 부상자 후송에 의문점이 남아 있으며, 일부 장교의 활동 부재도 확인되고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봉오동부근전투상보는 여러 차례 가필이 있었으며, 시간에 쫓겨 급히 정리된 문서로 파악된다. 조선군사령부는 봉오동 전투로 인한 파급력을 우려했다. 그에 따라 전사상자 숫자를 통제한 후, 보고서의 일부만 공개했던 것이다.


192089, 조선총독부 경무국장(警務局長)은 일본 외무차관에게 전보를 보냈다. “상해에 있는 소위 가정부(假政府)는 온성(穩城) 대안(對岸)의 불령선인단(不逞鮮人團)이 봉오동에서 아군 추격대를 만나 참패(慘敗)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대승(大勝)으로 바꾸어 여러 차례 불온문서(不穩文書)를 인쇄 발표하였다.”

일본은 상해의 임시정부가 봉오동 전투에 관해 전과를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이 참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승으로 승패를 바꾸었다는 것이다. 또 여러 차례 불온문서를 만들어 배포했다는 것이다. 뒤집어 보면, 일본측은 봉오동에서 일본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독립군은 참패했다고 인식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본군의 목표는 불령선인단에게 섬멸(殲滅)적 타격을 줄 필요가 있으며, 특히 전멸(全滅)시키기 위해 병력을 대안(對岸)으로 출동시킨다였다. 일본군은 전투 목표를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를 발생시켰으며, 중국과 외교 마찰도 일으켰다. 봉오동 전투는 19193.1운동 이후 독립운동 열기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이러한 봉오동 전투의 결과가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 것은 일본이었다. 봉오동 전투는 명백한 독립군의 승리였다.

 

일본군은 월강추격대가 전부인가

봉오동부근전투상보에 따르면, 야스카와 소좌의 월강추격대는 200여 명이다. 그런데 시간별로 기록된 일본군 병력수에 차이가 있다. 6616시에 230, 6621시에 250, 6703시에 209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마지막 부분 전투사상표에는 총 262명으로 정리되어 있다.

여기에 먼저 월강(越江)했던 니이미 중위의 남양수비대 병력을 추가해야 한다. 당시 남양수비대는 니이미 중위가 지휘하는 보병 19명과 야마모토(山本) 오장(伍長) 이하 헌병 8명으로 구성되었다. 니이미 중위를 포함해 총 29명이다. 전투사상표에 기록된 262명과 29명을 합하면, 291명이다. 월강한 병력이 거의 300명에 육박한다.

 

지금까지 언급한 것은 야스카와 소좌가 지휘하는 월강추격대의 병력이다. 그런데 야스카와 소좌가 출발하기 이전에, 또 다른 부대가 편성되었다. 나카무라(中村) 소좌가 지휘하는 토벌대(討伐隊)’. 63일 오후 3, 나카무라 소좌의 토벌대가 먼저 편성되어 온성지방으로 향했다. 65일 오후 140, 나카무라 소좌의 토벌대를 지원하기 위해 야스카와 소좌의 추격대가 추가로 편성되었다.

1920년 당시 일본 육군의 장교 명단에 따르면, 19사단 보병 73연대 소속의 소좌는 나카무라 마사오(中村正夫)’였다. 나카무라 소좌는 와카야마(和歌山) 출신으로 1916년 소좌로 진급했다. 야스카와 소좌보다 임관 2년 선배였다. 봉오동 전투 발발 직전에 두만강 하류의 온성 일대에는 2명의 일본군 소좌가 이끄는 부대들이 집결해 있었던 것이다.

봉오동 전투 이후에도 두 부대가 동시에 편성되어 있던 사실이 확인된다. 623일에 발송된 일본의 비밀 전보(朝特49)에는 “6월 상순에 온성 방면으로 출동했던 나카무라 토벌대 및 야스카와 추격대에 속하는 모든 부대는 622일 그들을 거두어 들여 각 소속으로 복귀함이라고 되어 있다.

 

야스카와의 추격대가 활동하던 기간에도 나카무라의 토벌대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봉오동 전투가 벌어지던 당시 나카무라 부대도 인근에 주둔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야스카와 부대를 지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편성된 나카무라 부대, 독립군을 추격하기 위해 편성된 야스카와 부대, 지역의 종성수비대 등을 합하면, 492명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남양수비대, 종성수비대 일부, 73연대 1개 소개 등을 합하면, 500명을 초과한다.

또 추격대의 전투상보에는 일본인만 기록되어 있다. 친일 부역했던 조선인에 대한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전투와 수색을 보조하던 헌병보조원이나 길안내, 통역, 운반 등을 수행하던 밀정들이 제외되어 있다. 현재로서는 다수의 경찰과 민간인이 소속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토벌대의 상황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두만강 하류 일대에 500명을 초과하는 일본군이 집결해 있었고, ‘추격대외에 토벌대의 병력도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홍범도 일지에는 일본군 전사 370, 후원병(後援兵) 100여 명, 전체 사망자 500~6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독립군이 당시 동원된 일본군 500~600명을 물리쳤다는 맥락에서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서술이다. 홍범도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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