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 봉오동 전투와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까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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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독립전쟁 선포 100주년, 봉오동 전투 100주년
한국 독립전쟁의 횃불, 봉오동 전투 (2)
위대한 독립군 대장
112년 만에 귀환하는 민족의 영웅
글 | 반형률(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
홍범도 장군은 일제에 맞서 싸운 무장 독립운동가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1895년 이후 의병부대를 조직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1911년에는 조국 독립을 이념으로 하는 권업회를 창립에 가담했다. 그 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항일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재개했다. 대한독립군을 편성했고, 1920년 6월 봉오동과 같은 해 10월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에 대해 독립군 역사상 가장 큰 승리를 거뒀다. 홍 장군은 이후 연해주에서 생활하다가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한 뒤 생을 마쳤다. 현재 카자흐스탄에 안치돼 있는 그의 유해가 곧 국내로 봉환된다. 봉오동·청산리 전투가 일어난 1920년 이후 꼬박 100년 만이다.
독립전쟁 선포 100주년, 봉오동 전투 100주년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온 국민이 기뻐할 소식을 전하고자 한다”며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 소식을 알렸다. 코로나사태로 인하여 홍장군 유해봉환이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지만 멀지 않은 시기에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1919년 11월 3일 국내외 동포들의 기대 속에 출범한 통합임시정부는 1920년 1월초 시정방침 대강(大綱)으로 ‘우리 국민이 단정코 실행할 6대사’를 발표하면서 ‘군사’를 최우선의 과제로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하였던 것이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승리는 임정의 독립전쟁 노선을 따랐던 북간도 독립군단체들의 통합과 연합작전의 산물이었다.
그리하여 봉오동전투에서의 승리후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며 환호했고, 봉오동전투 승리을 이끈 3단연합의 한 축이었던 북간도 국민회 역시 ‘독립전쟁의 개시’, ‘독립전쟁 제1차 대승리’라며, 아시아 최장 일본군을 상대로 거둔 승전보를 알렸던 것이다.
‘홍 대장’이라 불린 전형적 평민 출신의 독립군 대장
홍범도는 ‘군벌적 계급의식’이나 ‘특권의식’이 없지 않았던 양반이나 지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들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전형적인 평민출신의 의병장이자 독립군 지도자였다. 휘하의 부대원들과 노동을 함께하며 생사고락을 나누었던 매우 드문 지도자로서 부하들은 그를 ‘홍대장’이라 부르며 깊은 존경과 신뢰의 마음을 보여주었다.
가난과 억압, 계급차별에 맞서 싸우며 키운 사회의식
홍범도는 1868년 8월 27일(음력) 평양 서문안 문열사 앞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홍 장군을 나은 지 7일만에 죽고, 아버지 품에서 다른 사람들의 유즙을 얻어먹고 자랐다. 아버지가 홍 장군이 갓 9세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난 이후 남의 집을 전전하는 머슴살이로 유년기의 삶을 이어갔다. 15세에는 평양감영 보병대에 입대하여 나팔수로 4년을 ‘병정살이’를 했으나 억압과 차별을 일삼던 장교를 처단하고 평양을 떠났다.
홍범도는 이후 황해도 수안(遂安) 총령(蔥嶺)의 한 제지소에서 3년간 ‘종이뜨는’ 노동자로 일하였으나 품삯을 빌미로 억압하는 주인 3형제를 죽이게 된다. 홍범도는 어쩔 수 없이 금강산 신계사에 입산하여 변성명(變姓名)하고 지담(止潭) 스님의 상좌로 1년간을 ‘중질’하며 글을 깨우쳤다. 상좌 시절, 여승당(女僧堂)에 머물고 있던 단양 이씨를 만나게 되고 마침내 함께 절을 도망치듯 떠나게 되고, 강원도 회양(淮陽) 먹패장골에 들어가 3년 동안 물지게꾼으로 살아가며 ‘총놀이 공부(총쏘는 법)“을 마쳤다. 부인 단양 이씨와의 사이에 난, 두 아들, 양순과 용환(태준, 이완)이 태어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홍범도의 전일생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며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이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청일전쟁과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의병 봉기

이후 3차례의 전투를 치렀으나 훈련 부족 등으로 대패하고 의병진이 흩어지었을 뿐만 아니라 결의동지인 김수협 마저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홍범도는 3년 동안을 강원도, 함남 덕원, 황해도 지경산, 평안도 양덕, 성천, 영원 등 산간지대를 넘나들며 단독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반포를 계기로 시작된 의병운동이 쇠퇴하게 되고 의병들이 남만주나 백두산 산울로 은둔하게 되고, 홍범도 역시 총탄, 의복, 신발 등이 다 소진된 상태에서 의병활동을 청산하였다. 의병봉기에 나서면서 헤어졌던 단양이씨 부인과 재회하게 되었다. 1900년경 홍범도는 부인의 고향인 함경도 북청군 안산에 정착하여 농사와 포수생활을 생계수단으로 삼았다. 이 때 금강산에 입산하며 숨겼던 자기 이름 홍범도 되찾아 쓰기 시작했다.
이전의 의병활동 경력 때문에 홍범도는 러일전쟁 발발 후인 1904년 중반 무렵 일본인들에게 잡혀 감옥에 갇혔다가 6개월 만에 탈옥 도주하고 얼마 후인 1904년 말 재차 항일의병 봉기에 나섰다. 러일전쟁시기 홍범도의 의병활동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정미년 군대해산, 총포 화약류 단속법 반포와 제3차 봉기
홍범도가 본격적인 의병봉기에 나서게 된 것은 일제가 한국군대를 해산한 1907년 정미년, 그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다. 1907년 9월, 친일파로 채워진 한국정부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반포하고 사냥꾼들로부터 총기를 강압적으로 압수하기 시작하자, 함경도 일대의 포수들이 들고 있어났고, 홍범도 역시 의병봉기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10월 14일 북청 치양동의 일진회 사무소를 습격하여 ‘동학쟁이’ 30여 명을 살해하고 회소를 방화하고, 다음날에는 후치령 허리원(中腹)에서 일본군 3명을 처단하였다. 홍범도는 갑산포수 27명과 더불어 ‘작의형제’를 하였다. 1907년 9월 중순경 이후 홍범도 의병부대는 삼수․갑산 등지의 포수들을 대대적으로 모집하는데 힘쓴 결과, 부대원 수가 불과 몇 주일 만에 4, 5백명으로 늘어났다.
3차 봉기 후 첫 전투인 후치령 말리 전투(1907. 11. 25)에서 일본군 1,400명과 전투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반수 이상과 조선인 보조원 230명을 사살하는 대승리를 거두었으나, 의병 동지들 가운데서도 일등 포수 6명이 전사하였다. 홍범도는 후일 첫 전투였는지라 의병들이 “총들 뿌려 던지고 싹 도망하고 한 놈 없이 우리 부자만 남았다”고 회상했다.
1908년은 함경도 일대의 항일의병투쟁이 가장 활발하였던 시기였다. 전국을 점령하고 활개치고 있던 일본군의 귀순공작으로 차도선 부대 등 귀순 의병이 속출하고, 홍범도에 대한 회유와 협박 작전이 집요하게 추진되었다. 3월 20일 일진회 간부 임재덕, 김원홍, 최정옥이 홍범도의 부인 단양이씨와 아들 양순을 구금하고 회유책을 구사하였다. 이들은 거짓 편지 공작으로 홍범도 유인하려다 실패하자 부인의 경우 발가락 사이에 심지를 끼우고 불을 붙이는 고문 등 악행을 가하고 자백을 강요하였으나 단양이씨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혀를 끊고 벙어리가 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3월 30일에는 아들 양순이 유인 편지를 갖고 홍범도 진영에 찾아왔으나 부친의 질타를 받고 부대에 합류하였다. 홍범도 부대의 중대장으로 활약하던 아들 홍양순은 전공을 세웠으나 정평 바맥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1908. 6. 16.)
해외로의 제1차 망명과 의병 재기의 모색
홍범도가 러시아로 망명하게 된 것은 1908년 말이다. 1904년 이후 1908년까지 계속된 전투와 일본군의 가중된 공격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