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 봉오동 전투와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까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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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독립전쟁 선포 100주년, 봉오동 전투 100주년
한국 독립전쟁의 횃불, 봉오동 전투 (3)
위대한 독립군 대장
112년 만에 귀환하는 민족의 영웅
글 | 반형률(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
해외로의 제1차 망명과 의병 재기의 모색
홍범도가 러시아로 망명하게 된 것은 1908년 말이다. 1904년 이후 1908년까지 계속된 전투와 일본군의 가중된 공격과 집요한 추격으로 홍범도 부대는 탄환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졌다. 홍범도는 특유의 탄약 확보방책에 따라 1908년 10월 9일(음력)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150명)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러나 전투 결과 불과 수십 명의 의병만 남게 되고 일본군의 집요한 추격까지 받게 되어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통화(通化)로 망명하였다. 이때 만주로 망명한 홍범도 부대원은 40여 명이었다. 길림에서 홍범도를 비롯한 김창옥, 권감찰, 아들 홍용환 네 명은 러시아 연해주로 넘어가고, 의병 40여 명은 탕해로 돌아갔다.
홍범도는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연추에서 이범윤을 만나 자신이 파견했던 김충렬과 조화여를 감금하고 자금을 탈취한 문제를 따진 후 다시 추풍으로 가서 국내 진공을 위한 의병자금 모집에 착수했다. 자금을 횡령한 도총무 박기만의 처단, 그로 인한 문창범 등 지방토호들에 의한 감금, 러시아군대(카자크군)에 의한 석방 등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홍범도는 동지 30여 명과 함께 무장하고 함북 무산에 진출하여 33명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으나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동행한 의병 모두가 체포되었다. 홀로 살아남은 홍범도는 백두산 산울의 내도산(안도현)과 길림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하였다.
제2차 망명이후의 항일 민족운동
러시아로 귀환한 홍범도는 1910년 6월 21일 일본의 강제적 한국병합을 저지하기 위해 연해주 의병들이 최후의 대일무력항쟁을 목표로 결집한 13도의군의 참모부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 홍범도는 1911년 6월에 발기된 권업회의 부회장으로, 그리고 이후 12월 17일에 정식으로 창립된 권업회의 사찰부장으로 선임되었다.
이러한 공적 활동 외에도 홍범도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노동판에서 짐꾼으로 3~4개월, 금광 광부로 2년을 일하였고, 그때 벌은 임금으로 추풍 당어재골에서 아편재배를 하며 후일을 대비했다. 이어 아무르강 하구의 어장과 광산 등에서 막일로 벌은 3,050원을 가지고 이만으로 나와 오연발총(17개)과 탄환(1,700개) 등 무기를 구입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북만주 봉밀산의 김성무 농장으로 갔다. 1915년 7월 26일(음력)이었다. 이후 2년 반 동안 홍범도는 봉밀산에서 사냥하며 동포들의 농사를 돕고 한인아이들과 청년들의 민족교육에 헌신했다.
3․1운동 이후 북간도에서의 항일무장투쟁
1918년초 홍범도는 이만에서 구입한 총과 탄약을 추풍 당어재골(다아재골)의 최병준 집으로 이송시켜 땅에 묻고, 1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기회를 기다렸다. 홍범도가 항일무장투쟁에 나선 것은 1919년 3․1운동이 발발한 이후이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이동휘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독립군정부(또는 독립군부)가 조직되어 장정모집과 군사훈련 등 독립군 조직작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독립군정부는 홍범도에게 ‘독립군총사령관’으로서 북간도로 가서 독립군을 지휘하라는 통지서를 보냈다.
홍범도가 묻어 두었던 총과 탄약을 꺼내고 의병 106명을 이끌고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북간도로 발진한 것은 1919년 10월 1일(음력 8월 8일)이었다. 홍범도부대는 이후 수청(水靑)에서 백위파와 싸우다가 도피하여온 러시아빨찌산 3명과 함께 중국 훈춘의 차모정자(草帽頂子)를 거쳐 나자구(羅子溝) 하마탕의 ‘예수촌’에 들어가 무장을 벗고 주둔하였다.
북간도에 홍범도가 전개한 항일무장투쟁을 그가 단독으로, 또는 연합으로 활동했던 군대의 명칭과 그의 직함을 중심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 대한독립군 대장 : 러시아 추풍 당어재골에서 발진하여 북간도로 들어갈 때(1919. 10. 1.)
▶ 북로정일제1군사령부 사령장관 :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대한국민회화의 제1차 삼단연합(1920. 5. 19.). 봉오동 전투(6. 7)
▶ 대한독립군대장 ; 제1차 삼단연합 붕괴 후 단독으로. 청산리전투 (1920년 10월 하순)
▶ 대한의용군사령관 : 안도현 삼인방에서 이청천, 김승빈의 서로군정서 교성대와 조동식의 광복단과 연합 (1920년 11월 중순)
▶ 대한통의부 부장 : 대한의용군과 서일·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연합, 제2차 삼단연합(1921년 1월)
러시아 자유시로의 이동과 자유시참변
자유시에는 홍범도 군대처럼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들 외에도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한인빨치산부대들이 집결해 있었다. 이들 무장세력을 둘러싼 고려공산당의 양 파벌이 각축전을 벌였고,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장 보리스 슈미야츠키의 일방적 지원을 받은 이르쿠츠크파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1921년 6월 28일에 발생한 자유시참변은 이르쿠츠크파가 상해파계열의 독립군과 한인빨치산군대를 탄압한 동족상잔의 비극적 사건이었다. 홍범도는 중립을 지키고자 노력했으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측은 항일의병장으로서 명성이 높은 홍범도를 상해파를 공격하는 파쟁에 이용했다. 그리하여 홍범도는 자유시참변 이후 체포된 상해파 계열 한인장교와 병사들을 처벌하기 위한 재판부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홍범도는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1일까지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그에서 개최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가했다. 이르쿠츠크파는 홍범도를 상해파의 지도자인 이동휘에 맞서는 인물로 부각시키려 했다. 레닌을 직접 면담한 홍범도는 ‘레닌으로부터 홍범도에게’라는 글자를 새겨진 싸총(마우저 권총), 100루블의 상금, 적군모자, 그리고 레닌이 친필 서명한 조선군대장이라는 증명서를 선물로 받았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건설 참여 홍범도는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석한 후 1922년 2월 21일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21일을 걸려 이르쿠츠크에 도착해 그곳에 머물렀다. 이후 9월 11일 블라고베시첸스크를 거쳐 하바롭스크로 나왔다. 9월 24일 자유시참변 당시 홍범도가 가해자인 이르쿠츠크파의 진압에 맞서 “싸우지 않았다”며 사할린군대 출신의 김창수와 김오남이 습격하여 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홍범도는 레닌으로부터 받은 싸창으로 두 사람을 사살했고, 감옥에 구금되었으나 레닌, 칼리닌, 슈먀츠키의 보증서에 힘입어 석방되었다. 시베리아내전이 끝난 후 1923년부터 홍범도는 이만, 스파스크, 슈코토보 등지에서 의병동지들과 함께 집단농장을 조직하고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홍범도는 은퇴 후 슈코토보 구역의 ‘레닌의 길’ 집단농장에서 수직원으로 일하고 있던 중 1937년 9월, 강제이주를 맞았다.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의 말년 크즐오르다 시로 이주한 직후 홍범도의 생활은 여유롭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개월간 90루블을 받고 병원의 경비로 일하기도 했다. 홍범도의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고려극장 관계자들이 홍범도에게 월 50루블을 받을 수 있는 고려극장 수직원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홍범도는 낮에는 ‘극장 없는(전용 건물이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