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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 봉오동 전투 유적지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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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독립전쟁 선포 100주년, 봉오동 전투 100주년

한국 독립전쟁의 횃불, 봉오동 전투 (3)

 

독립전쟁 50년의 피어린 역사 간직 

유적지, 제대로 보존하고 기려야


글  |  최범산(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역사교육원장) 


2020년은 대일독립전쟁(對日獨立戰爭)의 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는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이다.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 장병들이 이룩한 위대한 독립전쟁, 봉오동 전투의 역사적인 의미와 업적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도록 '봉오동 전투 100주년 기념 특집'을 기획하고 지면을 마련해 준 월간 『순국』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필자는 광활한 만주대륙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독립전쟁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지난 15년 동안 유적지들을 답사하였다. 또한 만주지역 유적의 실태를 면밀히 조사하여 기록하였고, 국내외에서 항일유적의 발굴과 보존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보고 느꼈던 사실들을 책으로 묶어 북간도 지역 항일유적답사기 『두만강아리랑』을 출간하였다.


역사는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록유산이다 


우리가 스스로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망각 속으로 묻혀가게 되고, 유적지와 유물들은 훼손과 멸실이 급속하게 진행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1910년 국권상실 후 독립군 장병들이 피와 땀과 눈물로 이룩했던 독립전쟁의 유적들이 오늘 이 시간에도 만주지역 곳곳에서 훼손되고 파괴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가 보존하려 노력하지 않았고, 역사의 유산으로 귀중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벌어진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러한 국면에 이르러 국가와 국민이 기억하지 않는 역사가 대대로 이어지고 보존된 사실이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일제식민사관의 프레임에 갇혀 70여 년을 무관심하게 보내는 동안 위대한 독립전쟁의 역사, 귀중한 유적들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2천 년대부터 우리민족의 역사 지우기에 나선 중국인들의 동북공정에 의해서, 그리고 독립전쟁의 역사에 무지하고 무관심한 우리나라 당국자들의 태만과 방관에 의해 오늘도 독립전쟁 유적들은 훼손되고, 파괴되고, 멸실되


이제 더 이상 미룰 시간이 없다

봉오동 전투 100주년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오랜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만주지역 독립전쟁유적지의 발굴과 보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될 것인가. 이대로 시간이 흘러간다면 독립군 장병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이룩한 독립전쟁의 역사와 유적지들이 거의 다 사라져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도 빛바랜 신화처럼 잊혀가게 될 것이다. 

그토록 위대했던 역사의 현장은 봉오동 유적지처럼 저수지로 변하거나 고속도로, 아파트 단지, 공장부지 등으로 개발이 되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지난 15년 동안 눈비를 맞아가며 만주지역 항일독립전쟁의 역사유적들을 답사한 사람으로서 유적지의 훼손과 멸실이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 

필자는 독립전쟁의 유적들이 어떻게 발굴ㆍ보존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의미에서 봉오동 전투 유적지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리고 봉오동 전투에 참전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했던 독립군 장병들의 업적과 정신을 우리가 얼마나 기리고 추모하여 왔는가를 돌아보고자 한다.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유적지를 소개하고, 올바로 평가 받지 못했던 사실들을 조금이라도 바로 잡고 싶은 필자의 간절한 소망에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격려가 있기를 기대한다.

대한독립군,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다

봉오동 전투는 북간도의 독립군단들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의 일본군 수비대, 조선총독부 경찰주재소 등을 공격하고, 독립정신의 전파, 독립자금 모금,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와 일본군사령부는 북간도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한국민회,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 신민단 등 무장독립투쟁 단체에 엄청난 위협을 느끼고 있었으며, 독립군들이 두만강을 건너 대규모로 공격해 올 경우에 국내외에 미칠 파장을 심히 우려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은 1920년 봄부터 두만강 지방의 회령, 종성, 온성 등으로 국내진공작전을 연속적으로 전개하여 조선총독부 경찰대와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2월에는 대규모의 독립군 병력이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회령시에 주둔한 일본군 병영을 습격하여 수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고, 3월에는 약 80여명의 독립군이 온성군 남양으로 진격하여 일본 헌병대를 습격, 궤멸시키고 총기와 탄약 등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3월 15일에는 대한국민회 의용군이 미포면의 헌병대를 공격하여 일본헌병을 사살한 뒤에 건물을 전소시키고 친일밀정들을 처단하고 돌아왔다.

북간도에서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했던 대한국민회 의용군, 대한독립군 등의 부대는  독립전쟁을 수행한다는 신념으로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 수비대를 지속적으로 공격하였다. 특히 일본군 주요 거점이었던 함경도 회령지역 운무령에서 일본군 기마대가 호송하는 우편대를 과감하게 습격하여 기마대를 전멸시켜 일본군 사령부와 조선총독부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봉오동 전투의 횃불을 들다


신민단의 국내진공작전과 삼둔자 전투

1920년 6월 4일 새벽 5시, 신민단 박승길이 지휘하는 독립군 30명은 일본군이 강양동에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삼둔자(간평)를 출발하여 비밀리에 두만강을 건너가 강양동의 일본군 부대 경비초소를 습격하여 후꾸에 등 경비병 6명을 사살하고 철수하였다. 강양동 습격전은 북간도 일대 항일무장독립단체들이 수행하고 있는 소규모전투 방식의 국내진공작전이었다.

독립군의 기습공격에 대한 보복대응으로 아라요시가 지휘하는 일본군 남양수비대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가 두만강을 건너 삼둔자를 공격해왔다. 남양수비대는 삼둔자에 이르러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무고한 양민을 고문하고 살해했다. 독립군은 삼둔자 서남방 일광산 범진령 계곡에 잠복했다가 추격하는 남양수비대를 공격하여 60여명을 사살하고 수십명에게 부상을 입혀 패주시켰다. 이에 함경도 나남에서 두만강 지역을 수비하던 일본군 제19사단은 독립군 토벌을 위해 야스카와 소좌의 지휘로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여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지방으로 무단침입하였다.


후안산 전투

봉오동 북로독군부 본부를 공격하기 위하여 두만강을 건너 침입한 일본군 추격대는 안내자를 찾으려고 후안산촌에 정찰병을 파견하였다. 그 무렵 함경도 지방에 가서 독립자금을 모금하고 돌아온 최명국 등 13명의 모금대가 후안산 최진국의 집에서 작전방략을 상의하고 있었다. 일본군 정찰병들이 후안산촌을 살펴보다가 불이 켜져 있는 집으로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섰다. 갑자기 침입한 일본군 정찰병을 향해 최명국 등은 일제히 사격하여 사살하고 북쪽 고려령 기슭으로 후퇴하면서 추격하는 일본군에게 응전하였고  전투는 2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  봉오동 전투의 전개  


봉오동은 1910년대 만주로 이주한 한인들에 의해 건설된 신흥부락으로써 다른 마을에 비하여 독립에 대한 열망과 투쟁의지가 월등하게 높은 지역이었다. 봉오동은 길고 좁은 골짜기가 이어진 계곡에 동서로 고려령(高麗嶺)과 초모정자산 줄기가 뻗어 있고, 상촌은 거의 삼면이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어 군사요새로써 천연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홍범도, 안무, 최진동이 지휘하는 북로독군부사령부는 일본군의 공격을 탐지하고, 봉오동 하촌, 중촌, 상촌 부락민을 전원 대피시키고,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철통같은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두만강 삼둔자와 고려령에서 연속적으로 패전을 당한 일본군은 독립군의 근거지 봉오동을 공격하고자 6월 7일 아침 대병력을 이끌고 봉오동 입구로 침입하였다.

홍범도는 독립군 장병을 연병장에 집합시키고 각 부대의 전투구역을 배치하였는데 제1중대장 이천오는 봉오동 상촌의 서북단에 잠복하고, 제2중대장 강상모는 동남쪽 고지에, 제3중대장 강시범은 동북쪽 고지에, 제4중대장 조권식은 서남쪽에 잠복하였으며, 홍범도는 2개 중대를 인솔하여 서남산에서 작전을 총지휘하였다.

또한 이화일 소대장에게 약간의 병력을 주어 고려령 북쪽 고지에 대기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나타나면 교전하는 척하면서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 포위망 안으로 유인해오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켜 독립군이 전투태세 준비에 만전을 기할 수 있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이화일 부대가 고려령에서 일본군을 향해 맹공을 퍼부어 선발대가 거의 궤멸되었다, 고려령에서 습격을 당한 월강추격대장 야스카와는 연속된 패전에 판단력을 상실하고, 홍범도 사령부의 유인전술에 넘어가 좁고 험준한 봉오동 골짜기로 진입하여 들어오게 되었다. 

야스카와 부대는 보병을 앞세우고 6월 7일 오후 1시경 봉오동 상촌까지 침입하였다. 그때 양편 고지에 잠복하고 있는 독립군은 일본군이 포위망에 완전히 들어오기까지 공격을 않고 은밀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홍범도 장군이 적을 완전히 섬멸할 수 있는 거리에 들어오기 전에는 절대로 사격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던 것이다. 일본군이 상촌학교에 들어가 수색을 마치고 나왔을 때 홍범도는 권총을 발사하여 공격신호를 내렸다. 독립군의 매복전술을 눈치채지 못한 일본군은 동서북방 3면에서 맹공을 가하는 독립군연합부대의 총탄에 갈팡질팡하다가 응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후퇴하고 말았다. 

야스카와는 신곡 중대와 중서 중대의 병력을 다시 수습하여 동쪽 고지의 2중대를 향해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강상모 중대장이 맹렬하게 응전하여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그리고 이천오, 강시범 중대와 함께 도주하는 패잔병을 끝까지 추격하여 백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봉오동 전투가 한참 격렬하게 벌어지던 오후 4시가 넘어갈 무렵이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시커먼 구름이 밀려오더니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울렸다. 굵은 우박이 폭풍우와 함께 마구 쏟아져내려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다. 일본군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이용하여 흩어진 부대를 수습하여 두만강 건너 비파동으로 철수하였다. 3시간이 넘도록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던 독립군도 일본군이 패주한 뒤에 석현, 대감자촌, 왕청 명월구 본부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홍범도 장군과 장병들은 일본군이 남긴 무기와 탄환을 수거한 후 주민들의 환영을 받고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철수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발표에 의하면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명을 냈고, 독립군은 전사 4명, 중상 2명의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반면에 일본군의 봉오동 전투 상보에 의하면 일본군 피해가 전사 1명, 부상 2명이라 기록했고, 독립군측 피해는 전사 33명, 부상 다수라고 하였다. 양측이 발표한 내용을 보면 서로 상대방의 피해는 과장한 반면 아군의 피해는 극소화하고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 봉오동 전투를 보도했던 중국신문 상해신문보, 대한국민회의 호외, 독립신문, 그리고 홍범도의 일지 등을 토대로 종합적으로 판단해보면 대체로 일본군 측 피해는 150명 내외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확인되는 한편, 독립군 측에서도 십여 명의 사상자를 내지 않았나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독립전쟁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기록되어야 할 독립군 전사자 명단이 그 어느 기록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독립전쟁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자료 발굴과 연구 과제로 남겨져 있다고 할 것이다.


봉오동 전투 유적지 가는 길


필자는 아침 일찍 연길(延吉) 시외버스터미널에 가서 도문시(圖們市)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동안 봉오동 전투 유적지를 여러 번 답사하였기에 차창으로 스쳐가는 모든 풍경들이 낯설지가 않다. 연길에서 훈춘시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달려 도문시, 훈춘시, 왕청현 등지를 오가며 북간도 일대 독립전쟁 유적지를 답사했었다. 차창을 스치며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 위로 봉오동 전투 유적지를 답사했던 기억들이 서서히 오버랩 되어 온다. 특히 2020년은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에 만주지역 항일유적을 오랫동안 답사한 사람으로서 특별한 감회가 있으나 아쉬움 또한 적지 않다.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연길시에서 도문시로 이어진 고속도로를 40여 킬로미터 달려서 도문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리고 택시를 잡아타고 봉오동으로 향했다. 도문시에서 봉오동 전투 유적지 입구까지는 약 10킬로미터의 거리로 안산촌 입구에서 좌회전하여 왕청현 가는 길로 10여분 달려가면 수남촌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마을 안으로 우회전하여 1.5킬로미터 들어가 토성촌을 지나면 봉오동 전투 유적지의 입구에 도착하게 된다. 


봉오동 전투의 정신과 업적의 계승


봉오동 전투는 대한북로독군부로 연합한 독립군 부대가 일본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대첩’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봉오동 전투의 정신과 의의는 독립군 부대가 일심으로 단결하여 북간도로 침입한 대규모의 일본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독립군의 사기가 크게 높아져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를 비롯하여 수많은 무장독립투쟁이 계속 이어졌고, 독립투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독립전쟁의 역사 결코 잊어서는 안돼


1895년 을미의병에서 시작되었던 독립전쟁 50년의 피어린 역사를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삼백 만 독립열사와 15만 순국선열의 피와 땀과 눈물의 대가로 이룩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독립전쟁 50년의 역사에 올곧게 기록된 의병전쟁,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군의 무장투쟁 등에서 순국한 선열들의 업적과 희생을 망각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나라와 민족이 또다시 위기에 처했을 때 반민족행위자와 그 추종자가 되라고 가르치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을 것이다. 또한 국가와 국민이 순국선열의 공훈과 업적을 소홀이 예우하거나 망각한다면, 친일반민족행위자와 그 후예들에게 마음의 안식을 주게 될 것이다. 이는 곧, 반민족적 인간을 양산하는 토양이 되고, 금과옥조의 교본이 되어 국가와 민족을 배반하고 외세에 기생하는 인간들이 또다시 활개치는 세상이 도래하지 않겠는가. 

그동안 친일 독재권력의 위세와 억압에 눌려서, 아니면 개인의 영달을 쫓아 독재에 편승한 일부 역사학자들의 곡학아세, 눈치보기, 역사 왜곡·축소는 이미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이제는 국민이 주인이 되는 자유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주지역 독립전쟁의 역사와 유적지에 대한 편견과 홀대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새로운 백 년을 열자


대한민국의 역사정의를 이대로 멈추게 할 것인가. 아니면 독립전쟁의 역사와 민족정의를 계승·발전시키고,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나라를 만들어서 세계인의 존경과 갈채를 받으며, 인류 평화와 번영을 이끌어 가는 새로운 백 년을 열어갈 것인가.

우리가 봉오동 전투 10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치르고, 승리를 축하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적과 유물이 없는 역사는 외적이나 그 추종자들에 의해 언제든지 왜곡, 축소, 폄하, 멸사(滅史)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일제시대 일본인과 친일사학자들에 의해 편찬된 역사서들이 이미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봉오동 전투 유적지에서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순국선열의 유해발굴이나 유적지의 발굴과 보존활동을 전개한 적이 있었는가. 만약에 남의 나라 땅이라 제약이 있었다면, 우리나라 정부나 국가기관에서 독립전쟁의 유적지 발굴과 보존활동, 전사자 유해 발굴 등을 중국정부에 공개적으로 제안하고 추진해본 적은 있었는가.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새로운 백 년을 열어가는 자세와 올곧은 신념으로 독립전쟁의 역사와 유적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활동을 전개하여 대대로 계승해가야 할 것이다.   

봉오동 전투는 항일독립전쟁의 역사에 길이 빛날 위대한 승리였다. 대한독립군이 항일의 횃불을 높이 들고 대한국인의 자주독립의 기개와 역량을 침략자들의 뇌리에 깊게 각인시켜준  쾌거였으며, 우리민족의 항일독립전쟁사에서 길이 남을 위대한 승리였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이 들어보았던 헌사이며 격찬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오동 전투 유적지, 그 현장에는 대한민국, 국민의 이름으로 기념비커녕 안내 푯말 하나 서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민족 역사의 생명은 유적과 유물이며, 그에 합당한 보존과 기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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