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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 <홍범도 일지> - 봉오동 전투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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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독립전쟁 선포 100주년, 봉오동 전투 100주년

한국 독립전쟁의 횃불, 봉오동 전투 (4)


홍 장군의 어투 고스란히 배어있는 

한민족의 소중한 유산


해설  |  반형률(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 


<홍범도 일지>는 그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한 뒤 1938년 후반기에서 40년 사이의 어느 때에 고려극장의 희곡작가 태장춘의 권유에 따라 작성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태장춘은 이 <일지>를 바탕으로 희곡 <홍범도>를 완성했고 1941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고려극장에서 채영 연출로 <홍범도>를 공연하기도 한다. 그러나 원본은 1965년을 전후한 시기에 애석하게도 소실되고 만다. 현재 4개의 필사본이 전해지고 있고, 독립기념관에 필사본 4개 모두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독립기념관에서 제공한 ‘이함덕본’ 중, 봉오동 전투의 전후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홍범도 장군 스스로 작성 또는 구술한 것을 적었다고 하는‘홍범도 일지’의 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네 개의 필사본 ‘일지’만이 전해지고 있다. ‘홍범도 일지’의 원본은 카자흐스탄의 고려극장에 소장되어 있었다. 홍범도 장군과 직접 면담하며 연극 <의병들>의 희곡을 작성한 고려극장의 작가 태장춘과 그의 부인이자 배우인 이함덕이 ‘일지’의 원본을 보고 필사한 이른바 ‘이함덕본’이 전해지고 있다. 이후 ‘이함덕본’을 이인섭이 두 차례에 걸쳐 작성하였고(‘이인섭본’ 1, 2), 그리고 소설가 김세일의 부인이 ‘이함덕본’을 필사하였다.(‘김세일본’). 


현재 4개의 필사본이 전해지고 있고, 독립기념관에 필사본 4개 모두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이함덕본’은 독립기념관에서 제공한 것이다.

홍범도 장군의 ‘일지’에 관한 제 문제에 대해서는 반병률의 <홍범도 장군 : 홍범도 일지와 항일무장투쟁>(한울아카데미, 2002014, 2019)를 참조하기 바란다. 여기에서는 ‘홍범도 일지’ 원본을 직접 필사한 ‘이함덕본’이 원본에 가깝다고 판단하였고, 필사본 가운데 봉오동 전투 전후에 관한 기록(3쪽)을 소개하였다. 홍범도가 1918년초 북만주 봉밀산에서 나온 이후 연해주 추풍지역의 최병준 집에서 3․1운동의 소식을 듣고 의병을 조직하고 북간도로 넘어가 봉오동 전투를 치루는 과정, 그리고 그 이후 청산리로 들어가기까지 일본군과의 전투를 비롯하여 홍범도 장군의 행적이 적혀 있다.


▪ 20쪽

17개를 싸메고 봉밀산 김성무 집팡에 가서 고려로 나가지 못하고 1915년 7월 26일 부텀 산저장녹을 잡아먹기 시작하여 햇수로 이태 반을 사영하다가 그 총을 밤으로 운반하여 취풍 당어재 골치기 최이관 병준 집에다 묻어놓고 농사를 시작하여 한해 농사짓고 18년전 고려 독립만세가 불일듯 함으로 농사고 무에고 나가자 하고 묻어 두었던 총을 끄집어 내여 일변 닦으며 일변 의병모집과 탄환모집과 일변 원조하여 의병들 입힐 것과 천리경 그러한 것을 갖추다나니 1919년 8월 8일에 밤에 떠나 앵덕이 106인이 무장을 메고 앵덕에 당진하니 저녁때가 됨으로 게서 자고 가려 하려고 하고 있는 때 부련간 노시야 빨찌산 6명이 우리 유하는 곳에 당진한즉 통변을 청하여 물은즉 수청등지에서 쌈하다가 패하여 9명이 요행 목숨을 보전하여 오다나니 소왕영 여승당거리 와서 페깐에서 굶어 자다나니 세 놈이 간 곳없이 도주하여 없어짐으로 그 동무를 찾는 중에 백파들께 투항하고 우리 6인을 잡아주려고 다짐까장 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목숨을 도주하여 오다나니 고려빨찌산이 이곳에 있다고 하는 소문을 듣고 왔으니 나도 고려빨찌산과 같이 다니면 어떻겠습니까 한즉 우리는 고려로 나가는 의병이니까 같이 갈 것 같지 못합니다.

(답) 나도 어느 국이나 빨찌산에 참예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네말두 모르겠는데 어찌 같이 다니겠습니까? 우리를 믿어 주시면 말 모르는것이 관계없습니다. 하나 그러나 우리과[와] 같이 못가겠습니다. 


▪ 21쪽

하고 우리 군인들 다리고 한 삼리 거리 되는 곳에 집사가 있는데 따로 자다나니 샐 녁이 되니까 그 동무들 유하는 곳에서 총소리가 콩닥듯 소리가 남으로 우리군대를 사방으로 산조시켰고 저 물방에거리(에)서 동네(에)다 총질하는 놈들을 사격하라고 명령하고 나는 개안에서 쏘다나니 물방에거리에 있든 놈이 13명이 죽고 말 세 필 죽고 그놈들이 퇴진하여 양재거우 등으로 도망하는 것 보고 그 동네 수색하여 들어간즉 먼저 왔던 그 동무 말과 같이 투항한 놈들이 같이 다니던 동무를 잡으려고 백파를 다리고 온 놈이 분명하다. 그 동무들이 6인중에 세 사람(이) 죽고 세 사람이 살아있는 동무들과 성명을 물은즉 (답) 이와노위츠, 완실네꼬사, 까리면니츠. 헐벗고 신발 없이 된 것을 채려 입히고 같이 중국땅 차무정재 서짝골 깊은 고려(마을에) 주둔하고 밤잘지간에 홍우재 70명 달려든 것을 잡아치우고 먼고개 방축영 깊은 개웅덩에서 홍우재 90명 잡고, 총 50병, 철 1300개, 약담배 여섯 봉우재, 천 190자, 대양 300원, 일화 700원 앗아 군인들 노나 가지고 노시야 3인을 대양 일화 합하여 500원으로 체급 주니까 아니 가지겠노라고 하는 것을 억지로 주고 그 이튿날 행진하여 나재거우로 중국 하마탕 예수촌에 야밤에 들어가 무장을 벗고 (19)19년 10월 14일 붙엄 (19)20년 3월 초3일에 무단봉에 나가 사흘 유숙하고 있다가 행군하여 봉오꼴 최진동진과 연합하여 1920년 4월 초3일 일병과 접전하여 


▪ 22쪽

일병 370명 죽고 저녁편에 소낙비가 막 쏟아지는데 운무가 자욱하게 끼여 사람이 보이지 않게 자욱하게 낀데 일본 후원병 100여명이 외성으로 그 높은 산 뒤에로 영상에 올라서자 봉오꼴서 쌈하던 남은 군사 퇴진하여 오든 길로 못가고 그 산으로 오르다가 신민단 군사 80명이 동짝산에 올랐다가 일병이 저희 있는 곳으로 당진하니까 내려다 총질하니 일병은 갈 곳이 없어 마주 총질한즉 올라가는 철에 후병이 몇이 죽으니까 속사포로 내려다가 부리니  신민단 군사 한개도 없이 죽고 일병이 수백 명 죽고 서로 코코소리 듣고 총소리 끊어지었다. 그때 왔던 일병이 오륙백 명 죽었다. 초6일 그곳에서 떠나 일낭거(우) 지나 늣투거우 석탄고로 당진하니 시거우  들어갔다 나오는 일병 100명이 마주쳐 접전하여 일병이 술을 잔뜩 먹고 오든 놈들과 접전하여 몰신 다잡고 무장을 앗아 가지고 뫼일거우로 들어가 허영장 군대와 연합하여 한 달 유숙하고 있다나니 소왕령에서 글발이 나오되 붉은 주권이 소왕령 점령하였다고 글발이 나오니 로시야 동무 삼인이 들어가길 요구한즉 군사 30여명으로 그 동무들 보호하여 보낼 때에 중국 군대가 접어든 것을 보고 우리 군대서 총질하여 중국인 5명이 죽다나니 그놈들이 너희 우리와 상관없는 일로 우리에(게) 불질 할 이치가 무엇이냐고 시비가 일어나 그놈들이 배상금 한 놈에게 800천식 물지 않으면 너희를 무장으로 쏘겠다고 고성대독하니 물마 하고 대답은 하였으나 


홍범도가 육성으로 들려준 일대기

홍범도 일지

 

‘홍범도 일지’는 나날의 일기라기보다는 자전적 약전이다. 말년에 이르러 지난날을 기록한 회고록이다. “적어도 1938년 7월 말 이후에 홍범도가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에서 작성한 것”으로 반병률 교수는 본다. 여러 필사본(김세일본, 이인섭본, 이함덕본) 가운데 반 교수가 저본 혹은 정본으로 판단한 것은 이함덕 본이다. 연극 <홍범도>를 무대에 올렸던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의 당책임비서 김진의 지시에 따라 이 극장 배우 이함덕이 1958년 4월16일 ‘홍범도 일지’의 원본을 필사한 것이다. 한국에 처음 ‘홍범도 일지’의 존재를 알린 김세일 본과 이인섭 본은 이를 다시 옮겨 쓴 것이다.


‘홍범도 일지’는 출생부터 무장독립투쟁, 중앙아시아에서 보낸 말년까지 자신이 겪었던 일을 ‘가식 없이 덤덤하게 기술’하고 있다. 항일운동뿐 아니라 일본군의 동향과 만주, 연해주, 중앙아시아 한인들의 언어나 풍습 같은 일상생활의 단면도 기록해 놓았다. 전투에서 승리한 사실만 아니라 처절하게 당한 것도 그대로 썼다. 1920년 말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한 뒤의 일을 쓴 대목에서 홍범도는 이렇게 적는다. “청산리전투를 치르고 도피하다 오도양창에서 추운 밤을 지새는 도중 일본군과 홍호적의 공격을 받아 우등불 앞에서 불쪼이던 군사는 씨도 없이 다 죽고 그 나머지는 사방으로 일패도주하였다.”


‘홍범도 일지’는 20세기 초 조선말로 씌어 있는데다 평안·함경도 사투리에 조선식 러시아어로 된 사회주의체제 용어들이 왕왕 들어 있어 일반 독자들이 읽기 어려운 대목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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