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 창군 80년을 맞는 한국광복군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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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광복군 창군 80주년 (1940▶2020)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한국광복군 (1)
대한민국임시정부 국군으로 독립전쟁의 중추 역할
힘 갖추지 못하면 나라가 설 수 없다
글 | 신복룡(전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인류의 3천 년에 걸친 역사에는 수많은 망국(亡國)과 흔치 않은 독립(解放)이 있었다. 적국의 침략에 맞서 조국을 지킬 수만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고 망국의 아픔을 겪을 때는 대처의 선택이 복잡하고 어려워진다. 노선과 방법과 각자 이바지할 수 있는 능력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항전할 것인가, 예종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합방 초기의 분위기는 한때 격앙했다가 얼마가 지나면 분노를 십으며 참는다. 그러나 그러한 굴욕을 끝까지 참는 경우는 없다. 길게는 유대인처럼 2천 년을 인고(忍苦)하는 경우도 있지만, 합방 10년이 지나면서부터 민족 저항이 머리를 들게 된다. 한국의 경우에는 3·1운동이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민족이 멸망할 때 국민 모두가 원통히 여기며 광복을 위해 싸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임진왜란의 경우, 어차피 관군의 저항은 기대하기 어려웠지만, 주력 부대인 의병을 포함하여 조국을 지키겠다고 나선 백성은 전체인구의 3.5% 정도였다. 3·1운동의 시위참가율은 국민의 3.8% 정도였고, 막상 1910년에 조국이 멸망했을 때 그 이듬해까지 1년 동안 무장 투쟁을 전개한 애국지사의 숫자는 인구의 1.1%를 넘지 않았다. 현재 대한민국의 병력이 전체 인구의 1% 전후이니까, 역사의 교훈에 비춰보면, 망국의 순간에 나라를 지켜주기에는 현역병만으로는 어렵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이유…장부의 기개로서 민족정기 살리는 길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평가는 무장 투쟁을 한 분들이 필봉이나 외교 투쟁을 한 분들보다 더 용기가 있었다거나, 아니면, 뒤의 분들이 더 심약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안중근(安重根)·윤봉길(尹奉吉)·이봉창(李奉昌)과 신채호와 이승만의 차이는 각자의 기질과 전략의 차이이지, 용맹이나 충성심의 차이는 아니다. 만약 망국의 위기가 다시 온다면 나는 어떨까? 나는 신채호처럼 싸울 수는 있어도 윤봉길처럼 싸우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은 용기나 비굴함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노선이 달랐는가? 투쟁 방법의 승산에 대한 서로 다른 판단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김구는 무장 투쟁이 옳다고 확신했고, 이승만은 무장 투쟁으로써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고 열강의 외교우선주의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신채호가 총을 들고 싸우지 않은 것은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조국을 위해 투쟁할 수 있는 방법이나 능력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말한다면 광복군 창군의 주역인 김구나, 이청천(李靑天)이나 이범석(李範錫)이나 김원봉(金元鳳)의 경우를 보면, 무장 투쟁이 최선의 방법이지 그것이 반드시 독립을 가져온다고 확신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독립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닌데 왜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고 싸웠을까? 그 길이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는 것이고, 그 길이 장부의 기개이며, 그 길이 독립의 의지를 밖으로 호소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세이뇨보스(C. Seignobos)의 주장처럼, 합병된 약소국가가 자신의 무장 투쟁에서 의해서 독립을 쟁취한 역사적 사례는 없다. (그가 그런 말을 한 1913년 이후에 나타난 유일한 예외로 베트남은 스스로의 무장 투쟁에 의해서 독립을 쟁취했다.) 그럼에도 총을 들고 싸워야 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최익현이 72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선에 나갈 때 제자들이 승산을 묻자 “나도 내가 이길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길이 의(義)이기 때문에 나가야 한다”고 대답하고 항전하다가 순절했다. 1940년 9월 17일, 광복군 창군…사령관 지청천, 예하 3지대 구성 세 번째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는, 어차피 피압박 민족이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면 동맹을 맺어야 하는데, 자기의 영토가 아닌 중국에서 항전해야 하는 김구로서는 결국 장개석(蔣介石)에게 이 문제를 상의하고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37년 7월부터 유동열(柳東說)·이청천·김학규(金學圭)·안공근(安恭根) 등이 무장독립군을 조직하여 일본에 항전하다가, 중국과의 작전 및 지원 문제를 해결하고자 임시 정부의 산하 조직으로 중경(重慶)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광복군을 창설한 것이 1940년 9월 17일이었다. 광복군의 조직을 보면 지청천을 사령관으로 하여 이범석을 참모장으로 하고, 예하여 3개 지대를 두었다가 1942년에 조선의용대 김원봉이 합류하자 제1지대(지대장 : 김원봉), 제2지대(지대장 : 이범석), 제3지대(지대장 : 김학규)로 재편하였다. 이밖에 3전구공작대(지대장 金文鎬)를 중국군에 파견하고, 제9전구공작대를 중국군 제9전구에 파견하고, 중경에 모여드는 청년 지원병을 관리하는 토교대(土橋隊)를 두었다. 이밖에도 한지성(韓志成)을 중심으로 하는 인면공작대(印緬工作隊 : 인도-버마지구공작대)를 조직하여 영국군에 파견하고, 제2지대를 미국의 해외첩보국(OSS : Office of Strategic Service)에 파견하여 독수리 작전(The Eagles Project)을 수행했다. 광복군의 출범 당시부터 많은 고초를 겪었다. 모병(募兵), 군자금의 조달, 중국 정부와의 협조 등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모병의 문제는 조성환(曺成煥)이 노력하여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출신으로 장교를 충원하고, 중국 내에 있는 항일 청년을 모집하고, 중국/만주 관내 일본군에 배속된 한국인 출신 청년들을 빼내는 방법으로 충원했다. 김준엽(金俊燁)과 장준하(張俊河)가 곧 그들이다. 국제 관계에서 보면 친밀할수록 그 유지가 더 어렵고 까다롭다. 이 문제는 중국과 광복군과의 관계 설정 때문이었다. 중국이 도와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애초 중국의 입장은 광복군이 중국군의 예하 부대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중국이 보는 한국의 입장은 이홍장(李鴻章)이나 원세개(袁世凱)가 가지고 있던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문제는 결국 굴욕적인 광복군9개준승(光復軍九個準繩)으로 결말을 보았다. 준승이라 함은 광복군이 중국군사위원회의 참모총장이 ‘장악’한다는 9개 의무 조항을 의미한다. 심지어는 광복군이 한국에 진주하는 문제도 중국군의 결정 사항(8조)이었다. 해방의 날 참전기회 얻지 못한 광복군의 한계와 애상(pathos) 위의 동맹 문제의 연장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는 광복군이 참전국 또는 승전국의 군대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본디 광복군은 1945년 8월 7일에 한국을 향하여 진공하기로 미국 OSS 대장 도노반(W. B. Donovan) 소장과 합의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출발 명령을 기다리던 중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광복군은 참전군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설령 광복군이 일본의 항복 이전에 참전했다고 하더라도 중국군의 지휘를 받는 상태에서 참전군 또는 승전국의 군대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겠는가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만약 그렇게만 되었더라면 일본 항복 이후 한국의 국제적 지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광복군은 일본이 항복한 뒤 3일이 지난 8월 18일에 여의도비행장에 도착했지만, 조국의 입국이 허락되지 않아 중국으로 되돌아가는 분노와 치욕을 겪었다. 그들은 기뻐해야 할 해방의 날에 참전의 기회를 얻지 못해 울었고, 조국 땅에서 다시 쫓겨나면서 다시 울었다. 이제 광복군 창군 80년을 돌아보면서, 힘(군사력)을 갖추지 못한 나라의 운명은 끝내 어찌 되는가에 대한 회한의 상념에 빠지게 된다. 구한국 군대의 해산과 함께 참령 박성환(朴星煥) 대대장이 자살(1907)한 지 50년 만에 되살아난 한국군으로서의 광복군의 최후는 우리에게 감격보다는 애상(pathos)을 느끼게 한다. 역사의 동서고금을 통하여 군인을 홀대하거나 군비(軍備)를 소홀히 한 나라에는 늘 재앙과 슬픔이 따랐다. 그때와 지금은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를 암연(黯然)히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