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 Theme 3. 재일 조선인의 사회 형성과 귀국2
조국을 떠나 산다는 것은 힘겹고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원한 것도 아닌데 강제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면 그 아픔은 굳이 말이 필요치 않은 일이다. 그렇게 이 땅을 떠나 일본으로 간 사람들이 바로 재일조선인이다. 그들은 낯선 일본 땅에서 ‘조센진’으로 극심한 고통과 차별의 삶을 살았다.
|
[2020/12] Theme 2. 광복 이후, 중국 지역 내 한인의 귀환
해외 한인의 귀환은 일본인·중국인·대만인 등을 포함한 1천 500만명의 인구이동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그 중 중국 지역 한인의 귀환은 그 규모나 범위에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더욱 방대한 문제였다. 게다가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 충돌하는 내전구도와 중국-미국-소련이 얽혀있는 외교관계가 이를 더욱 복잡다 . . .
|
[2020/12] Theme 1. 해외동포의 형성과정과 우리의 과제
해외동포들은 이주 시기와 방향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구한말과 일제 초기의 한인들은 주로 러시아의 연해주와 중국 만주로 이주하였고, 현재는 이들의 3세, 4세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일제강점기는 일본에 노동자로 이주하였고 일제 말기에는 강제로 동원되어 갔다.
|
[2020/11] Theme 4. 순국선열, 어떻게 예우할 것인가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주요 행사 때마다 국민의례로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시행토록 법률로 정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유공자 중 최상위 개념인 순국선열에 대한 국가적 예우는 참담한 실정이다.
|
|
[2020/11] Theme 2. 순국선열의 현주소와 국가보훈의 방향
순국선열은 우리민족의 ‘얼과 혼’이며, 우리가 자손만대에 유지, 계승해야할 최고의 가치이며 덕목이기도 하다. 이에 국가 보훈기본법 제24조(국민의례 및 의전상의 예우)와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10조(의식상의 예우)에 의해 주요 행사시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하도록 하고 있다 . . .
|
[2020/11] Theme 1. 순국선열의 헌신과 정신적 가치 계승
우리가 순국선열을 기리는 이유는 하나다. 앞으로 닥칠 어떠한 고난도 이겨내면서 나아갈 정신적 지표와 지혜를 구하는 정수(精髓)가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실낱같은 희망마저 보이지 않던 날, 자신을 불살라 나라를 구하려던 그 뜻과 희생이야말로 후손에게는 빛이요 길이기 때문이다.
|
[2020/10] 한국 독립전쟁의 금자탑, 청산리 전투
일제강점기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희망이 거의 보이지 않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가산을 팔고 국외로 망명했던 독립운동가들은 어느 나라로부터도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가운데,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독립항쟁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2020/10] 청산리 전투의 전개과정과 군사적 전략
청산리 전투는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교전을 말한다. 청산리 전투에서의 승리 요인은 독립군의 지휘력과 정신력이 우월했고, 착용 복장이 산악전에 유리했으며, 현지 지리에 정통해 능동적 위치에 있었고, 마을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협조 . . .
|
[2020/10] 청산리 전투의 승전과 역사적 의의
올해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기억하고 기념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 많다. 특히 1920년 6월과 10월에 있었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독립전쟁(靑山里戰役, 일명 청산리전투, 청산리대첩) 100주년이 되는 의미있는 해이다.
|
[2020/09] 한국광복군 80년 역사와 함께 한 사람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한국광복군의 정통성 위에 건설된 대한민국과 국군은 항일독립전쟁의 총결산이라 할 수 있다. 1919년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후 민족의 암흑시기라 할 수 있는 폭압통치로부터 벗어나 홀로서기를 위하여 광복의 빛을 향해 대일항전을 주도한 임시정부의 구심체였기 때문이다.
|
[2020/09] 대한민국 국군과 그 뿌리에 대한 인식
우리 민족은 해방을 통해 그토록 염원하던 독립을 이루어냈고, 일제에 빼앗긴 주권도 다시 찾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가 성립되었고, 대한민국의 국군도 창설되었다. 다만, 새로운 시스템을 갖추면서도 그 체제가 성립될 수 있었던 근거, 즉 뿌리에 대해 인식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다.
|
[2020/09] 한국광복군의 창설과 주요 활동
한국광복군은 대한제국군과 독립군을 계승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으로서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대표적 무력이었다. 비록 인적·물적인 제약으로 중국 군사위원회의 지휘와 감독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렇지만 어려운 여건에서 선전활동과 초모활동을 통하여 1,000명에 가까운 군인을 양성하였다.
|
[2020/09] 창군 80년을 맞는 한국광복군의 빛과 그림자
2020년은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광복군은 1919년 4월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에서 지난한 독립투쟁의 과정 끝에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창군되었다. 그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힘(군사력)을 갖추지 못한 나라의 운명은 끝내 어찌 되는가에 대한 회한의 상념에 . . .
|
[2020/08] 한반도의 영토문제 재인식과 통일한국
우리가 안고 있는 영토문제가 빠른 시일 내에 해결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우리가 간도와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다 해도 당장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주장하지 않으면 찾을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된다. 자료를 축적하고, 올바른 영토의식과 역사관을 확립하면 반드시 기회가 찾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