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 한국광복군의 창설과 주요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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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광복군 창군 80주년 (1940▶2020)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한국광복군 (2)
일제와의 대규모 정규전 통해 자주독립 쟁취 목표
한국독립운동, 질적으로 심화시키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한국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수립 당초부터 일본에 대한 대규모 정규전의 전개를 지상목표로 설정하였다. 다만 이러한 목표의 실천은 중국 영토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객관적인 이유, 나아가 광범위한 대중적 토대의 결여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윤봉길의거 이후 피난 중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임시정부는 광복군의 창설을 준비하고 추진하였다. 임시정부가 광복군 창설을 추진할 수 있었던 데는 특히 미주교포들의 재정적인 후원이 큰 힘이 되었다. 광복군 편성을 추진하면서 임시정부에서는 미주교포들에게 광복군 조직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이는 미주교포들에게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1940년 중경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전시체제를 정비하고 정상적인 운영을 도모하였다. 같은 해 9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 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한국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하여 광복군 창설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광복군 창설을 공포한 임시정부는 9월 17일 중경의 가릉빈관에서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을 개최하였다. 이로써 광복군은 정신적으로 대한제국의 국군을, 인적 맥락으로는 독립군의 계승을 내외에 천명하였다. 광복군의 최대 급선무는 병력모집…적극적인 선전활동 전개 중국내 한인청년들에 대한 초모활동은 그 성과가 매우 컸다. 1944년 학병으로 중국전선에 끌려온 한인청년 수십명이 광복군 진영으로 탈출하였고 1945년에는 수백명의 한인청년이 임시정부 및 광복군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럼으로써 1940년 9월 창설 당시 수십명에 불과하던 광복군은 8·15전후 1,000명에 가까운 병력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광복군은 선전활동을 중시하였다. 광복군이 국제적인 지위를 얻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선전활동이 대단히 중요하였다. 중국의 전시수도이자 연합국 대사관이 모두 모여 있는 중경의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군 지도부에서는 중경방송국을 통하여 선전활동을 해왔다. 즉 3·1절이나 광복군 창설 기념일, 기타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기념선언문과 성명서를 발표하고 방송을 통해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이처럼 광복군은 적극적인 선전활동을 통해 국제적 여론과 동정을 끌어내고자 하였다. 아울러 선전활동을 통해 광복군의 창설 사실과 활동상을 대내외에 알리고 동시에 국내외 동포들의 참여와 지원을 촉구하였다. 광복군의 선전활동 방향은 적점령 지역 내에 있는 동포들에게 집중되었다.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이 점령한 중국본토지역으로 이주해오는 한인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바로 이들을 대상으로 광복군의 참여와 지원을 호소하는 선전공작을 전개하였다. 그밖에도 일본군에 대한 반일 전단을 살포하기도 하고 기관지 『광복』을 발행하여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독립운동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기도 하였다. 영국군과 협동하여 항일전 수행, 인도·버마 공작인원 파견 그리하여 1943년 5월에는 민족혁명당이 버마전구 영국군 총지휘부와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후 한영 합작은 다시 광복군총사령부로 이관되어 추진되었다. 1943년 9월에는 인도주둔 영국군의 대일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대장 한지성 등 9명의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를 인도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8월초부터 중국군사위원회에서 3주간에 걸쳐 현지에 대한 예비지식을 위주로 한 교육을 받았다. 그후 현지에 파견된 광복군 공작대는 일본군에 대한 선무공작, 후방지역의 교란, 일군포로의 심문, 노획한 문서의 번역 등 전쟁수행을 돕는 임무를 띠고 활동하였다. 이들은 일본군과 접전하고 있는 최전선에 투입되었고, 주로 일본군을 향한 대적방송, 적문서번역, 전단제작, 포로심문 등을 담당하였다. 영국군에 배속된 공작대는 1944년 초부터 영국군과 일본군이 대접전을 벌였던 임팔(Imphal) 전투와 1945년에 전개된 버마 총반격전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일본군에게 심리적으로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 영국군이 대일작전을 수행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대규모 정규전위한 한미합작과 한반도 진입작전 추진 1945년에 접어들면서 미군의 필리핀 점령, 특히 6월 말 오키나와 점령으로 임시정부 요인들은 한반도 상륙작전이 임박했음을 알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태평양지역에서 북상하고 있는 미군에 파견하여 한반도 상륙작전이 전개될 경우 이에 협력하고자 시도하였다. 더욱이 김구 주석은 미국정부에 대해 미군이 제주도를 점령하면 그곳에서 모든 한인들을 지도하여 대일전에 협조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러한 제의는 임시정부 및 광복군이 오랫동안 지향해왔던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서안의 광복군 제2지대의 제1기생 훈련이 끝난 직후인 8월 5일, 김구·이청천·엄항섭 등 임시정부 및 광복군 수뇌부로 구성된 시찰단은 서안에 가서 훈련생들을 사열하고 격려하였다. 8월 7일 김구는 마침 서안에 와 있던 워싱턴의 OSS 총책임자인 도노반과 한미공동작전을 위한 회담을 개최하였다. 광복군이 추진하였던 국내진입작전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미처 구체화되지 못하였다. 8월 9일 서안에서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접한 김구는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라고 탄식하였다. 하지만 광복군이 미국 OSS와 합작하여 한국 내 공동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것은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가 영국군과 합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광복 직전 광복군이 거둔 귀중한 성과였다. 즉 한국독립운동의 활동범위 및 합작대상을 더욱 확대하였으며 또한 한국독립운동을 질적으로 심화시켰다는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