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 대한민국 국군과 그 뿌리에 대한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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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광복군 창군 80주년 (1940▶2020)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한국광복군 (3)
의병과 독립군 계승, 임시정부의 국군인 광복군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이며, 본질 그 자체
글 | 한시준 (단국대학교 초빙교수)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문제가 없지 않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민족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된 것처럼 이해하는 경향이 대표적인 예다. 여기에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민족의 역사를 단절된 것으로 보는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 민족의 역사는 단절된 일이 없다. 일제식민지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살아 있었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민족사를 변화 발전시킨 것들도 수없이 많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해방 후 역사의 토대가 된 것이다.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도 그렇고, 그 뿌리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국군의 창군과 뿌리, 정통성과 사기문제와 직결 국군의 창군과 뿌리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국군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도 있고, 국군의 사기와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국군이 미군정에 의해 창군되었다거나 일본군 출신들이 국군의 주체가 되었다고 인식한다면, 이는 국군의 정통성은 물론이고 사기에 있어서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국군이 창설되기까지에는 역사적 과정이 있었다.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의병· 독립군· 광복군을 조직하여 활동한 역사적 경험이 있다. 국군의 창군과 뿌리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서 찾아야 한다. 뿌리를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좋은 사례가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할 때의 이야기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국군으로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시간적으로 보면,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지 30년이 지난 때였다. 그렇지만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하면서, 자신들이 광복군을 창설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한국광복군은 일찌감치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시에 곧 이어 성립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적인(敵人)이 우리 국군을 해산하던 날이 곧 우리 광복군 창설의 때인 것이다. 이는 광복군 창설식장에서 외무부장 조소앙이 광복군의 성립경과를 보고한 데 들어있는 내용이다. 광복군은 임시정부에서 창설한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하던 날 창설된 것이라고 했다. 대한제국 군대는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 군인들은 해산을 거부하고 남대문 일대에서 일본군과 격렬한 항전 벌였다. 이후 김혁· 황학수 등을 비롯한 대한제국 군인들 상당수는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군사간부를 양성하고 독립군을 조직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만주지역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광복군은 이러한 대한제국 국군을 계승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국군은 광복군 계승, 국군의 정통성은 광복군에 있다 국군은 해방을 맞아 독립된 국가의 군대를 창설하는 것이었고, 여기에는 민족적 정서가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건군의 주체와 정신적 연원을 일본군이나 만주군에 둘 수 없다는 것이 민족의 정서였다. 일본군 대좌 출신으로 미군정의 건군사업에 고문 역할을 하였던 이응준의 “어제까지도 나는 일본군 고급장교 신분이었다. 그러한 사람으로 조국이 해방되었다고 해서 세상 표면에 나서서 날뛴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는 말이 그것을 대변해준다. 이것이 민족적 양심이고 정서였다. 미군정에서도 건군을 추진하면서 건군의 주체로 광복군을 내세웠다. 미군정은 이응준의 자문을 받았지만, 일본군 출신들을 내세우지 않았다. 초대 통위부장을 교섭하기 위해 버나드(Lyle W. Bernard) 대령을 상해로 보내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과 상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군의 주체를 광복군에 두려는 의도였다. 미군정은 실제로 광복군 출신을 내세웠다. 통위부장에 임시정부 참모총장인 유동열, 조선경비대 사령관에 광복군 제2지대장 출신인 송호성을 각각 임명한 것이다. 미군정에서 통위부는 국방부, 조선경비대는 군대와 같은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도 국군의 주체와 정신적 연원을 광복군에 두고자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직접 각료들을 선임하여 행정부를 구성했다. 그 중 국방부 장관과 차관에 이범석과 최용덕을 임명한 것이다. 이범석은 국무총리도 겸직했다. 이범석과 최용덕은 모두 광복군 출신이다. 광복군 출신을 국방부의 장관과 차관으로 임명한 데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국군은 광복군을 이은 것, 그리고 국군의 정통성은 광복군에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의도는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임명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면서 조선경비사관학교의 명칭을 육군사관학교로 바꾸었다. 그리고 교장에 광복군 출신들을 연이어 임명한 것이다. 1948년 7월 최덕신이 제6대 교장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제7대 교장은 김홍일, 제8대 교장은 이준식, 제9대 교장은 안춘생이 임명되었다. 광복군 출신을 육군사관학교 교장에 연이어 임명한 것은 광복군의 후예라는 긍지를 심어주기 위한 의도였다고 생각된다. 광복군 출신 창군에 적극 참여…9월 17일, 이제 국군의 날로 광복군 출신의 국군 참여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범석의 국방부 장관 임명이 계기였다. 1948년 8월 17일 선발한 제7기 특별반에 김관오· 김국주· 장흥 등이, 제8기 특별반에는 이준식· 오광선· 안춘생· 박영준· 권준· 장호강· 김영일 등이 입교한 것이다. 이외에 참모장을 역임한 김홍일과 제1지대장을 지낸 채원개는 특임으로 임관하였고, 최용덕과 김신은 공군에, 그리고 중국군 출신인 김응조· 이종국· 오동기· 조개옥 등도 국군에 참여하였다. 광복군 출신들이 초창기 국군에서 주요 지휘관으로 역할하기도 했다. 초창기에 편성된 6개 여단 중 제1여단장에 송호성, 제2여단장에 채원개, 제3여단장에 최덕신, 제7여단장에 이준식이 임명된 것이다. 6개 여단 중에서 4개 여단의 지휘관을 광복군 출신들이 맡았다. 1949년 5월 8개 사단이 편성되었을 때도 그랬다. 수도경비사령부는 권준, 제3사단장은 최덕신, 제5사단장은 송호성, 제7사단장은 이준식이 임명되었다. 광복군 출신들이 초창기 국군에서 주요 지휘관으로 역할한 것이다. 국군의 창설과정을 보면, 국군의 정통성과 뿌리는 광복군에 두고자 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생성된 의병· 독립군· 광복군의 역사적 경험이 국군으로 이어진 것이다. 국군의 정통성 및 뿌리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국군의 날을 새로 제정할 필요가 있다. 국군의 날인 10월 1일은 1956년에 제정한 것으로, 6·25전쟁 때 육군 제3사단 제23연대가 강원도 양양에서 38선을 돌파한 날을 기념한 것이다. 이를 기념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국군의 창군이나 뿌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국군의 정통성과 뿌리를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광복군을 창설한 9월 17일을 국군의 날로 제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