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 한국광복군 80년 역사와 함께 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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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광복군 창군 80주년 (1940▶2020)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한국광복군 (4)
조국 독립을 위한 조건없는 헌신과 희생정신
광복군은 결코 죽지 않는다
글 | 정재진 (한국광복군동지회 사무총장)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출범한 직후에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하자 일본은 경신참변을 도발하여 독립군 기지를 초토화시켰으며 자유시 참변으로 우리 군대가 무장해제되어 큰 어려움에 빠졌었다. 1920년 3월 임시의정원은 ‘군사에 관한 건의안’을 통과시켜 군무부를 만주로 이전하면서 임시정부가 실질적인 독립전쟁을 전개할 무장력을 통합하고자 노력하였으나 현실적 어려움으로 인해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후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군대편성에 착수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가 광복군 창군을 본격적으로 서두른 것은 1939년 치장으로 옮겨간 후부터이며 그해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향후 3년간의 독립운동 방략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은 ‘광복운동자’ 전체 인원을 대한민국의 기본 국민으로 삼고, 기본 무장군 10만명을 편성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한다는 전략으로 장교 1,200명, 기본 무장군대 10만명과 유격대원 35만명으로 구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실행키 위해 해외에 거주하는 교포들을 대상으로 백만달러 모금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이었으며, 이 모금운동은 실행여부를 떠나 임시정부가 전 민족을 동원하여 일제와 독립전쟁을 수행하여 조국광복을 달성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수립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광복군 총사령에 이청천, 참모장은 이범석, 산하 4지대 구성 아울러, 총사령부 산하에는 1, 2, 3, 5의 4개 지대를 두었다. 제1지대는 1941년 초 섬서성 서안에서 군사특파단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지대장은 이준식이었고, 간부는 노태준, 안춘생, 노복선, 조인제, 이석화, 김자동, 이건우, 이영여 등이었다. 이들은 운남강무당과 남경의 중앙군관학교 등을 졸업한 장교들이었다. 제1지대는 징모처 제1분처라는 이름으로 산서성(山西省)의 태원(太原)과 석가장(石家莊) 등지에서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 제2지대는 중경에서 서안으로 이동한 총사령부의 인원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는데 공진원, 나태섭, 고시복, 지달수, 유해준, 이욕해 등이 간부로 활동하였다. 제2지대는 제2징모분처라는 이름으로 수원성(綏遠省) 포두(包頭) 등지에서 초모활동을 벌였다. 제3지대는 징모처 제6분처라는 이름으로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지대장은 김학규였으며 오광심, 진경성, 신규섭, 김광산, 지복영, 오희영 등이 간부로 활동하였다. 제5지대는 서안에서 활동하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로 구성되었으며 전지공작대 시절부터 초모활동을 벌인 바 있어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1942년 7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면서, 광복군 지대는 1, 2, 3 지대로 재편되었으며, 1942년 말 중경에서 활동하던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제1지대로 재편되었다. 제1지대는 지대본부와 3개의 구대를 두었는데 지대본부는 중경(重慶)에, 제1구대는 호북성(湖北省) 광하현(光化縣) 노하구(老河口)에, 제2구대는 절강성(浙江省) 금화에, 제3구대는 하남성(河南城) 장사(長沙)에 본부를 두고 병력을 증강하기 위한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5월 경 제2지대의 대원은 250명에 이르렀다. 이전 광복군의 제1, 2, 5지대는 제2지대로 재편되었다. 서안에 본부를 두고 선전과 초모의 활동을 전개한 제2지대는 1945년 3월 대원이 185명에 이르렀다. 제3지대는 안휘성 부양에서 초모활동을 하던 징모 제6분처의 대원과 초모인원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1945년 말 제3지대의 대원수는 119명에 이르렀다. 또한 광복군에는 여성도 참여하였다. 주로 총사령부이 병력모집 활동인 초모 및 선전 사업 분야에서 활동하였으며 지청천 사령관의 딸 지복영을 비롯하여 수많은 여성광복군이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헌신하였다. 한편, 한국광복군에는 편제상의 조직은 아니지만 일종의 보충대 역할을 하는 토교대가 있었다. 중경 남쪽 20㎞ 지점인 토교(土橋)에 위치한 토교대는 일본군을 탈출한 한인사병, 중국군에 포로가 된 한인사병, 한광반 출신 등으로 구성되었다. 1944년 초에 편성된 제1차의 토교대는 대원수가 33명에 이르렀다. 토교대의 구성원은 약간의 교육과 훈련을 받고 총사령부와 지대에 배치되었다. 대한민국 발전과 건군에 공헌…여성 포함, 기족 단위 대거 참여 총사령관 지청천(2등급 대통령장·초대 무임소장관), 참모장 이범석(대통령장·초대 국무총리와 국방장관), 총무처장 최용덕(3등급 독립장·공군참모총장), 참모처장에 채원개(독립장·사단장), 부관장 황학수(독립장), 정훈처장 조소앙(대한민국장), 편련처장 송호성(육군최초 장성과 육군총사령관·인민군해방전사여단 단장), 경리처장 조경한(독립장), 군의처장 유진동(김구 주치의), 제1지대장 이준식(독립장·육군 중장), 제2지대장 공진원(독립장), 제3지대장 김학규(독립장) 제5지대장 나월환(독립장) 등이다. 여성 광복군 신순호(애국장)는 독립운동가 신건식(독립장)과 오건해(애국장)의 딸이다. 부군은 임정중국외교통 박찬익(독립장)의 아들 박영준(독립장,육군 사단장)이다. 그녀는 신정식(건국포장)·신규식(대통령장)의 조카이며, 신형호(애국장)·신창희(건국포장)는 4촌이다. 여성 광복군 민영주(애국장)의 부모는 임정 요인 민필호(독립장)와 신창희(건국포장)이다. 백부는 민제호(애국장), 외조부가 신규식(대통령장)이다. 오빠는 광복군 민영수(애국장)이며 남편이 광복군이자 고려대 총장을 역임한 김준엽(애국장)이다. 여동생 민영애와 제부 이윤철(5등급 애족장), 사촌 동생 민영구(독립장·해군사관학교장)등도 광복군에서 활약하였다. 임정의 최고 이론가인 조소앙 가문에서는 11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됐다. 이는 15명의 안중근 가문 14명의 왕산 허위가문과 함께 최대 기록이다. 조소앙(대한민국장)과 자녀인 조시제(애국장), 조인제(독립장), 조계림(애족장)과 형제들인 조용하(독립장), 조용주(애국장), 조용한(애국장), 조용제(일명 조경순·애족장), 조시원(독립장)이다. 또한 조시원과 이순승(애족장)부부의 딸이 여성 광복군 조순옥(애국장)과 사위인 안춘생(독립장)등이다. 안춘생은 안중근 의사의 5촌 조카로 대한민국 군수사령관을 역임했다. 여성 광복군 오희영의 부친은 오광선(독립장)장군이다. 오희영의 조부는 의병장 오인수로 모친은 정현숙(애족장),부군이 광복군 신송식(독립장)이다. 여동생은 오희옥(애족장)이다. 3대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한국광복군 창군일인 9월 17일, 국군의 날로 재지정해야 다만, 광복군의 독립전쟁사를 연구하거나 전공한 학자나 교수들은 한결같이 대한민국 국군 창군일을 국가체제를 갖춘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창군일(1940년 9월 17일)이 되어야 제언하고 있으나, 광복 75년과 창군 80년이 되도록 역대 어느 정부도 이러한 광복군의 독립전쟁역사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국군의 정체성을 외면하는 엄청난 역사왜곡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상잔의 상징인 6.25당시 남북분단선을 돌파한 그날을 국군의 날로 기념하고 있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민족 영웅인 광복군 선열들의 영전에 무한한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을 갖는다. 한국광복군은 기간 동안 수천명 이상이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창군 80주년을 맞이한 올해 기준으로 국가로부터 훈포장을 서훈받은 광복군은 불과 595명이며 그중 14분만이 생존하고 있다. 여기에 지청천 총사령관과 무후광복군 17위에 대한 추모행사는 그나마 상징적으로만 진행되어 왔지만, 나머지 선열광복군 563위를 위한 합동추모제가 올해에야 처음으로 봉헌되었음을 상기할 때 만시지탄을 금할 수가 없다. 아직도 광복활동과 독립전쟁관련 서류를 제출하지 못해 서훈을 받지 못한 무수한 독립유공자와 무명광복군들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후손들은 잊지 말아야 하겠다. 한편, (사단법인)한국광복군동지회는 광복군의 독립정신과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고 국민들의 애국심을 함양하여 국가와 사회발전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1965년 9월 15일 설립되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를 지켜 나아가기 위하여 매진해오고 있으나 운영난 등 여러 어려움에 봉착하여 정부와 국민들의 적극적인 관심을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