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 청산리 전투의 승전과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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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규모가 크고, 치열하게 전개
결사항쟁의 자주적 정신 깊이 성찰해야
글 | 장세윤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올해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기억하고 기념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 많다. 특히 1920년 6월과 10월에 있었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독립전쟁(靑山里戰役, 일명 청산리전투, 청산리대첩) 100주년이 되는 의미있는 해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청산리 독립전쟁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새벽까지 거의 6일 동안 전개되었다. 우리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합쳐, 독립군의 뿌리를 뽑겠다고 호언장담하며 불법으로 중국 동북지방에 침입한 일본 정규군 대병력을 격파한 청산리 독립전쟁은 모두가 기억해야 할 일대 장거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보통 ‘청산리 전투’로 잘 알려져 있지만, 군사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청산리 전역(戰役)’ 개념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필자는 ‘청산리 독립전쟁’이란 용어가 일반 국민들에게 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청산리 독립전쟁’이란 용어를 쓰고자 한다. 이에 청산리 독립전쟁 승전 100주년의 역사적 의의를 검토하고, 오늘에 주는 시사점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새롭게 부각되는 청산리 독립전쟁의 평가와 의미 국내학계의 연구 성과에 대해 일본의 관변학자 사사키는 한 저서에서 만주 독립군의 전과가 별로 없었다는 주장을 펼쳤으나(佐佐木春隆, 『朝鮮戰爭前史としての韓國獨立運動の硏究』 2, 東京 : 韓國史料硏究所, 1985), 국내학계의 반응은 별로 없었다고 할 수 있다. 2011년에 박사학위 논문이 나왔는데(조필균, 『항일무장독립전쟁의 군사사학적 연구 : 청산리전역을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군사학적 시각으로 분석하여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일부 아쉬운 점도 있다고 본다. 또 최근 일본에서 일본인 학자가 ‘청산리 전투’ 당시 대종교 세력의 무기입수 과정을 분석, 검토한 논문을 발표하였다(佐佐充昭, 「靑山里戰鬪において大倧敎が果たした役割-ロシア革命派からの武器入手を中心に」, 『朝鮮學報』 242집, 奈良 : 天理大學, 2017). 이제 일본에서도 1920년 만주 독립군의 독립전쟁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초 만주 독립군의 독립운동과 독립전쟁에 대해서는 최근 일련의 저작을 새로운 시각에서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는 신주백과 신효승의 연구 성과가 단연 주목된다. 신주백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2019년 6월 계간지 『역사비평』(127호) 기고문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다시 보기’에서 독립군 부대 사이의 통합과 갈등 문제 등을 새롭게 제기하여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에서의 검토와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신효승(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역시 2018년 9월 발표 논문 ‘보고에서 석고화한 기억으로 - 청산리 전역 보고의 정치학’ 논문에서 청산리 전투의 실체는 불투명한 부분이 많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주장과 관련하여 최근 그의 일련의 논문과 박사학위 논문 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산리 독립전쟁의 실상, 더욱 많은 연구와 토론 필요 청산리 전투 직후 일본군은 전사 11명, 부상 24명으로 장교 사상자는 없다고 공식 보고했지만, 나중에 간행한 『간도출병사』에서는 전상사(戰傷死) 11명, 부상 28명[부상자에 장교(소위) 1명 포함], 모두 39명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정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김연옥 옮김, 『조선군사령부 間島出兵史』, 경인문화사, 2019, 377~380쪽). 그러나 일본 학자(原暉之) 논문에서 청산리 전역 시 ‘봉밀구(蜂蜜溝)’에서만 74명의 사상자를 냈다는 연구성과(「日本の極東ロシア軍事干涉の諸問題」, 『歷史學硏究』 478호, 6면)도 있는 바와 같이 일본군의 피해 보고가 매우 축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나중에 ‘일본군 600여명 사살’로 정리하였다(『朝鮮民族運動年監』). 따라서 임시정부 측의 정리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알기에 봉오동·청산리 전투 직후 만주 독립군의 자랑스러운 전과나 승전소식이 국제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처음으로 보고되고, 토론된 자리는 1922년 1월 24일 러시아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일명 극동 근로자대회, 혹은 제1회 극동 공산주의 및 혁명단체 대회)’였다. “빨치산이 서부 간도지방에서 소대로 나뉘어 무장을 기도하고 있는 사이에, 북부 간도지구 민중은 장래의 대규모 전쟁을 위한 준비에 집중적으로 종사하고 있었다. (중략) 각종 한인 빨치산부대의 압도적이며 적당한 역량에도 불구하고 - 훈련이나 지휘는 물론, 무기, 전투 기기, 보급품 부분에 있어서 - 전부 2개 사단의 완전히 무장된 강력한 일본군에 직면하여 - 전자(前者)는 상당한 기간 후자(後者)를 격퇴하고 대항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교전하지 않을 수 없던 때에는 적어도 10회 내지 9회까지 완전히 적을 패주시킬 수 있었던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강조 및 밑줄은 필자). 이것은 조선 인민들이 커다란 핸디캡 아래서조차도, 전투 소질의 재간은 물론, 그들 (근거지) 지방의 상세한 지리상의 이점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두양창(Wutso Yang Chang - 청산리전투 지역 지명 중의 한 곳), 청산리, 봉오동 등등에서의 굉장한 한인들의 승리는 가장 현저한 2~3가지의 사례이다. 그곳에서 일본군의 전위(前衛)는 엄청난(압도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물론 한인들은 (그러한 승세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었다.”(高屋定國·辻野功 譯(コミンテルン編), 『極東勤勞者大會(議事錄 全文) - 日本共産黨成立の原點』, 東京 : 合同出版, 1970, 136~137쪽) 위의 내용이 당시의 실상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판단된다. 가장 자랑스러운 독립전쟁, 오늘의 의미와 교훈으로 깊이 성찰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와 10월의 청산리 대첩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독립전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20세기 초에 세계 국가의 2/3 이상이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하여 식민지 통치를 받거나 반(半)식민지 상태에 있었는데, 우리민족처럼 끈질기게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치열하게 항거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청산리 대첩은 우리 민족 독립전쟁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치열했던 전투였다. 우리는 현재의 엄중한 국내외 상황에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의 영웅들, 무명용사들로부터 온갖 어려움을 무릅쓴 ‘결사항전(決死抗戰)’의 주체적 투쟁정신과 ‘공화주의’를 지향하는 조국·민족·공동체에 대한 헌신, 희생정신, 애국적 열정과 자유·정의 지향의 이상을 오늘의 의미와 교훈으로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 민족이 만주(중국동북) 지역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은 1910년까지 지속되었던 전제군주제 체제를 청산하고 해방 이후 건설할 근대 국민국가의 정체로 민주공화제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특정 군주나 지배자, 지배계층이 아닌 우리 자신, 우리 모두가 평화롭게 잘 어울려 사는 공화(共和) 사회를 지향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의가 있다. 또 대부분 빈농·소작농으로 어렵게 살던 한인 교민들을 기반으로 한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 항일무장투쟁, 나아가 ‘독립전쟁’을 추진·지원하고 이를 실천함으로써 근대 국민국가 건설의 기초를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향후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민족 통일(운동)을 전망할 경우 유의할 사항이 아닌가 한다. 20세기 전반기 일제의 강요로 왜곡된 타율적 삶을 거부하고, 주체적 투쟁의 역사로 전환시킨 유명, 무명의 만주 독립군 영웅들! 우리는 21세기 민족의 대통합과 통일된 자주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사명을 실천하는 참된 독립운동 정신과 헌신·희생, 살신성인(殺身成仁) 등의 민주시민사회 정신에 부합하는 적극적 봉사 덕목과 자세를 더욱 발양하고 널리 전파, 실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