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테마

[2020/10] 청산리 전투의 전개과정과 군사적 전략

페이지 정보

본문

한국 독립전쟁의 금자탑, 청산리 전투 


독립군 희생과 헌신에 더해

우리 동포 모두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큰 승리


글 | 이상훈(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청산리 전투는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교전을 말한다. 청산리 전투에서의 승리 요인은 독립군의 지휘력과 정신력이 우월했고, 착용 복장이 산악전에 유리했으며, 현지 지리에 정통해 능동적 위치에 있었고, 마을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청산리 전역에서 독립군 연합부대들이 전투를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 행보를 보인 점은 재평가 받아야 마땅하다. 당시 청산리 전역에서 독립군은 ‘피전책’이 아니라,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이고자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군은 어떻게 편성되었나

제19사단장 지휘, 보병 6개 대대 주력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은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그 충격으로 8월에 ‘간도지방(間島地方)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계획(剿討計畫)’을 수립하고, 간도 일대의 독립군을 말살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간도로 ‘출병(出兵)’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10월 7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간도 출병’이 공식적으로 결정되었다.


10월 7일 밤 11시, 일본 육군 참모본부로부터 공식 명령이 하달되었다. 제19사단장 지휘 하에 보병 6개 대대를 주력으로 기병, 산포, 공병, 비행기 등을 동원하며, 여기에 호응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파견군이 삼차구(三岔口) 방면으로 진출하고, 제14사단의 제28여단 병력이 포시예트만(Posyet Bay)에 상륙해 혼춘(琿春)을 거쳐 회령(會寧)까지 이동하며 위세를 보이기로 했다. 


지휘를 맡게 된 제19사단장은 병력을 크게 세 지대(支隊)로 구분했다. 첫째, 이소바야시(磯林) 지대는 보병 제38여단 사령부, 보병 제75연대·제78연대 제3대대, 기병 제27연대 제3중대, 야포병 제25연대 제2대대, 공병 제19대대 제2중대, 헌병 약간으로 편성되었다. 둘째, 기무라(木村) 지대는 보병 제76연대, 기병 제27연대 제2중대, 산포병 제1중대, 공병 제19대대 제1중대, 헌병 약간으로 구성되었다. 셋째, 히가시(東) 지대는 보병 제37여단 사령부, 보병 제73연대·제74연대 제2대대, 기병 제27연대, 야포병 제25연대 제1대대, 공병 제19대대 제3중대, 헌병 약간으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사단직할부대는 보병 제74연대 제1대대 본부 및 제3중대, 비행기반, 무선통신반, 비둘기통신반으로 구성되었다. 일본군 기록에는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강안수비대(江岸守備隊)’와 헌병 및 경찰 조직도 상당수 참가했다. 세부적으로 볼 때 일부 중대나 소대의 가감이 있긴 하지만, 대체적인 편성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일본군은 간도의 작전지역을 크게 갑(甲)·을(乙)·병(丙) 세 구역으로 구분하였다. 대체로 혼춘현(琿春縣)에 해당하는 갑(甲)구역은 이소바야시 지대가 담당하고, 왕청현(王靑縣)에 해당하는 을(乙)구역은 기무라 지대가 담당하며, 화룡현(和龍縣)에 해당하는 병(丙)구역은 히가시 지대가 담당하도록 했다.  


제19사단 예하의 ‘동지대(東支隊)’를 ‘아즈마 지대’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히가시 지대’로 불러야 한다. 1920년 일본군 장교명부에 따르면, 히가시 마사히코(東正彦) 육군 소장은 1874년 시마네현(島根縣) 출신으로 1895년 소위로 임관했고, 1918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1920년 당시 보병 제37여단장으로 복무 중이었다. 이 히가시(東) 지대에는 봉오동 전투에 참가했던 야스카와 사부로(安川三郞) 소좌와 나카무라 마사오(中村正夫) 소좌가 배속되어 있었다. 화룡현 방면으로 진출한 히가시 지대가 독립군과의 전투에서 선봉이자 주력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0월 15일, 보병 제37여단장 히가시 소장은 용정(龍井)에 도착해, 히가시 지대를 임무에 맞게 편성하기 시작했다. 용정을 기준으로 볼 때 동북쪽으로 국자가(局子街), 서북쪽으로 천보산(千寶山), 서쪽으로 두도구(頭道溝)가 위치하고 있다. 국자가 방면에 보병 제74연대 제2대대를 배치했고, 천보산 방면에 보병 제73연대 제2대대를 배치했으며, 두도구 방면에 보병 제73연대 제3대대를 배치했다. 10월 16일에는 세 부대가 모두 해당지역으로 전개했다.  

 

청산리 전투는 어떻게 전개되었나

10월 21일~26일, 10여 차례 교전 벌여


청산리(靑山里) 일대에서 벌어진 교전 가운데 대표적 전투는 6개다. 10월 21일 아침에 발생한 백운평(白雲坪) 전투, 21일 오후부터 22일 새벽까지 벌어진 완루구(完樓溝) 전투, 22일 새벽에 발생한 천수평(泉水坪) 전투, 22일 오전부터 일몰까지 벌어진 어랑촌(漁郞村) 전투, 24일 저녁과 25일 새벽에 발생한 천보산(千寶山) 전투, 25일 밤에서 26일 새벽까지 벌어진 고동하(古洞河) 전투다. 독립군 한 부대가 일정한 장소에서 전투를 벌인 것이 아니라, 여러 부대들이 이합집산하면서 여러 곳에서 전투를 수행했다. 따라서 독립군의 움직임을 파악할 때 주의가 필요하다.


10월 17일 밤, 히가시 지대장은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 약 500~600명이 두도구 서남쪽 약 100리(40km) 떨어진 청산리 부근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히가시 지대장은 보병 제73연대장 야마다(山田) 대좌가 지휘하는 보병 5개 중대를 근간으로 토벌대를 편성했다. 일부 부대를 신속히 이동시켜 독립군이 서남쪽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퇴로를 차단하고, 주력 부대로는 독립군을 수색·토벌하도록 지침을 내렸다. 또 기병연대 가노(加納) 대좌에게는 차창구(車廠溝)과 승평령(昇平嶺) 방면으로 우회하여, 노령(老嶺) 방면으로 이어지는 퇴로를 차단하도록 지시했다. 


출동 명령을 받은 야마다 대좌는 토벌대를 좌종대(左縱隊)와 우종대(右縱隊)로 구분했다. 좌종대는 두도구(頭道溝)에서 서남쪽 봉밀구(蜂蜜溝)를 거쳐 남쪽 청산리 방면으로 전진시켰고, 우종대는 두도구에서 남쪽 팔가자(八家子)를 거쳐 서남쪽 청산리 방면으로 전진시켰다. 일본군은 기병연대를 빠르게 우회시켜 노령을 차단하고, 독립군이 청산리에서 서쪽 안도현(安圖縣)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고자 했다. 또한 좌종대로 하여금 청산리 북쪽에서 남하케 하여 독립군이 북쪽으로 이탈하는 것을 막으면서, 주력인 우종대로 하여금 청산리 계곡으로 밀고 들어가 토벌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본군의 계획대로 되었다면 독립군은 삼면에서 포위당해 전멸할 수도 있었다.   


 10월 20일, 청산리에 우종대가 먼저 도착했고, 21일 좌종대가 우종대에 합류했다. 봉오동 전투에 참가했던 야스카와 소좌가 선발대 보병 1개 중대를 거느리고 서쪽 노령 방향으로 전진했다. 이 때 독립군은 이미 매복한 상태에서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청산리 전투의 서막을 알리는 백운평 전투다. 매복 공격에 당황한 일본군은 축차적으로 병력을 투입했지만, 독립군을 토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야마다 토벌대는 후방으로 물러나 청산리 동쪽 삼도구(三道溝)에 주둔할 수밖에 없었다. 


10월 18일 저녁, 하가시 지대장은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500여 명이 두도구 서쪽 약 60리(24km) 떨어진 완루구 부근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앞서 청산리 방면으로 야마다 토벌대를 투입시켰기 때문에, 완루구 방면으로는 지대의 예비대를 주력으로 해서 서진시켰다. 추가로 천보산에 있던 이노(飯野) 대대를 남쪽으로 투입해, 두도구 서쪽인 이도구와 봉밀구 일대를 수색케 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완루구 전투다. 전투는 10월 21일 오후부터 22일 새벽까지 벌어졌고,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을 물리치고 이동을 시작했다. 


10월 21일, 백운평에서 일본군 토벌대를 물리친 김좌진 부대는 북쪽 갑산촌(甲山村)으로 이동했다. 갑산촌에서 부대를 정비하면서, 일본군 기병대가 천수동(泉水洞)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앞서 승평령 방면으로 전진했던 기병연대가 지대 예비대의 움직임에 호응하기 위해, 오도양차(五道陽岔)를 거쳐 어랑촌(漁郞村) 방향으로 이동해 온 것이었다. 그 중 1개 기병중대가 어랑촌 남쪽의 천수동에 주둔하고 있었다. 22일 새벽, 김좌진 부대는 갑산촌에서 북상해 이들을 선제 공격했다. 이것이 천수평 전투다. 


천수동 바로 위쪽에는 어랑촌이 자리잡고 있다. 김좌진 부대는 천수평 전투 이후 어랑촌 방향으로 북진해, 어랑촌 서쪽의 874고지를 선점했다. 22일 오전부터 김좌진 부대와 히가시 지대의 교전이 지속되었고, 오후에는 이노 대대가 일본군에 합류했다. 또한 이 무렵 완루구 전투 이후 동진하던 홍범도 부대도 어량촌으로 도착해 독립군에 합류했다. 결국 어량촌 일대에서 독립군 연합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이것이 바로 청산리 일대 최대 전투인 어랑촌 전투다. 전투는 22일 일몰까지 지속되었고, 해가 지자 독립군은 874고지 서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23일 밤까지 독립군의 자취를 찾았지만,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 24일, 어랑촌의 히가시 지대는 보병 150명을 동원해 본격적으로 독립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어랑촌에서 서쪽으로 전진하다가 소하천의 상류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다. 25일 밤, 독립군의 야영지를 확인하고, 밤 12시에 독립군을 습격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결국 상호 교전하다가 일본군은 인근에서 가장 높은 1743고지로 이동했다. 1743고지에서 다시 북쪽 어랑촌 방향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것이 청산리 전역의 마지막 전투인 고동하 전투다.


한편 어랑촌 북쪽에 위치한 천보산에서도 교전이 있었다. 10월 24일 저녁과 25일 새벽에 독립군이 천보산에 주둔하던 일본군 1개 중대를 산발적으로 공격했다. 천보산을 공격한 부대를 홍범도 부대로 보기도 하지만, 홍범도와 주력부대는 24일과 25일에 고동하 방면에 있었기 때문에 천보산 전투에는 참가할 수 없었다. 천보산을 공격한 이들은 김좌진과 홍범도 예하의 일부 병력들이었다. 이것이 천보산 전투다.   


청산리 전투는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교전을 말한다. 이러한 청산리 전투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청산리 전투(戰鬪), 청산리 전역(戰役), 청산리 전쟁(戰爭)이 그것이다. 1920년 10월 청산리 일대에서 발생한 일련의 전투들은 ‘독립전쟁’의 일부분으로서, 청산리 전쟁으로 부르기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교전지역이 청산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므로, 청산리 전투라고 부르는 것도 어색하다. 전역(Campaign)은 “특정한 공간과 시간 내에서 동시적이고 연속된 전투로서 적 부대를 격퇴시키기 위한 지속적인 작전”을 의미한다. 따라서 10월의 교전상황은 군사적으로 볼 때 ‘청산리 전역’이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독립군의 군사 전략은 무엇이었나

기본전략은 ‘피전책’이나 ‘전면전’까지 불사


10월 초순, 일본군 대부대가 간도로 출병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독립관련 여러 단체들은 10월 7일에서 13일 사이 독립군의 전략 방침에 대한 토의를 거듭했다. 크게 네 가지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첫째, 적이 강하고 우리가 약한 상황에서 은인자중하며 분산·은폐의 방법으로 전투를 피하면서 반일 역량 보존에 힘쓴다. 둘째, 만약 적을 공격할 경우 깊은 산 속으로 유인하여 유격전으로 돌연 습격하고 신속히 은폐한다. 셋째, 반일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적들의 토벌권에서 탈출한다. 넷째, 근거지의 백성과 물자 등을 잘 피난시키거나 감추어 반일 기지의 손실을 최소화한다.    


이러한 당시 독립군의 전략을 일반적으로 ‘피전책(避戰策)’이라고 한다. ‘피전책’은 전투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직접 교전을 회피하면서 안전지대로 이동하는 것이다. 히가시 지대는 독립군을 포위·섬멸하기 위해 이들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했다. 조선군사령부가 작성한 「간도출병사(間島出兵史)」에는 “기병연대는 승평령 방면으로 전진, 길이 험악한데다가 습지가 많아 행동이 불가능하였으므로, 지대 예비대의 행동에 책응하기 위해 오도양차로 전진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일본군 기병연대의 퇴로 차단 작전이 실패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좌진과 홍범도가 이끄는 주력부대는 화룡현에서 안도현으로 넘어가는 서쪽 외곽지대인 청산리와 완루구에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군에게 퇴로가 차단되기 이전에 이미 퇴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독립군의 발빠른 움직임으로 인해 일본군 기병연대의 퇴로 차단 작전도 실패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좌진과 홍범도는 보다 안전한 ‘피전책’과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인다. 


사실 김좌진 부대가 ‘피전책’의 일환으로 보다 안전한 안도현으로 이동하고자 했다면, 시간이 충분했다. 백수평 전투에서 승리한 후, 곧장 청산리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 노령을 넘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김좌진은 그러지 않았다. 김좌진 부대는 백수평 전투 이후 북상해 천수평 전투를 치뤘다. 또한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선제 공격한 점에서 ‘피전책’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 이후 다시 북상해 어랑촌으로 이동했다. 


이 무렵 홍범도 부대도 보다 안전한 안도현으로 가지 않고, 김좌진 부대와 합류하고자 했다. 『홍범도 일지』에는 “군정서가 청산리에 있다 하니까 연합하여 고려(조선)로 나갈까 하고 찾아가는 길에 어구 큰 길에 나가 서자마자” 일본군과 마주쳐 전투를 벌인 것으로 되어 있다. 홍범도 부대는 완루구 전투 이후, 서쪽으로 가지 않고 동진해 어랑촌에 도착했다. 또한 이 어랑촌 일대에는 또 다른 독립군 부대인 최진동 부대도 도착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독립신문』에는 독립군 제1연대를 홍범도 부대, 제2연대를 김좌진 부대, 제3연대를 최진동 부대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렇다면 독립군의 대표적 부대들이 모두 연합해 어랑촌으로 집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랑촌은 히가시 지대의 예비대 주력이 주둔한 곳이었다. 독립군 연합부대들은 일본군으로부터 멀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히가시 지대의 본부가 위치한 용정에 훨씬 더 가까워졌다. 독립군 연합부대들이 어랑촌 일대에 집결해, 히가시 지대와 일전을 벌인 것이다. 독립군은 어랑촌 일대의 주요 고지인 874 고지를 선점한 후, 방어진을 편성해 일본군과 하루종일 격전을 벌였다. 이것이 청산리 전역의 최대 전투인 어랑촌 전투의 실상이다. 


청산리 전역의 피아 전사상자수에 대해서는 독립군과 일본군의 기록이 엇갈린다. 이러한 전과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독립군이 ‘피전책’과는 거리가 먼 움직임을 보인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련 기록이 많지 않아 상세한 정황은 조금 더 진전된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청산리 전역에서 독립군 연합부대들이 전투를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 행보를 보인 점은 재평가받아야 마땅하다. 당시 청산리 전역에서 독립군은 ‘피전책’이 아니라,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이고자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 요인은 무엇이었나

유리한 산악지형과 지역 주민 적극적 활용


청산리 전투에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참가했던 이범석은 독립군의 승리 요인을 『우둥불』에 밝혀두었다. “오직 만주의 끝없는 산림과 끝없는 산악의 특수한 지형 속에서만 이룩할 수 있는 전과”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독립군의 지휘력과 정신력이 우월했고, 착용 복장이 산악전에 유리했으며, 현지 지리에 정통해 능동적 위치에 있었고, 마을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했기 때문이라 보았다. 정리하면 독립군은 산악 지형과 지역 주민들을 잘 활용해 승리했다고 볼 수 있다.


청산리 전투 이후에도 독립군 주력부대는 일본군에게 토벌당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독립군은 어떻게 일본군보다 한발 앞서 움직이고 한발 앞서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 정보력이 관건이다. 조선군사령부가 작성한 「간도출병사」에는 당시 독립군의 정보 수집과 전파 속도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들이 남아 있다. 일본군의 적정(賊情) 첩지(諜知) 및 통신연락은 극히 곤란한 위치에 있는 반면, 독립군은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하였다. 


특히 독립군의 체전식(遞傳式) 통신방식은 상당히 발달해 있다고 보았다. 체전식은 차례차례 여러 곳을 거쳐 빠르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체전식을 통해 미세한 징후도 놀라운 속도로 순식간에 전달하고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일본군이 야식을 주문하거나 도시락을 만드는 것까지 일일이 독립군에게 전파되었다.  


“회령에서 마을동네로 간단한 야식을 주문하거나 혹은 출동경찰관 등의 가정에서 도시락을 만드는 것 등에 의해 우리 행동이 간파되어 모처럼의 기회가 수포로 돌아간 적이 있음.” “가노(加納) 토벌대가 동불사(銅佛寺) 부근을 초토하던 중에 압수한 서류에 의하면, 10월 22일 히가시(東) 지대의 어랑촌 부근 전투통보가 이튿날 23일 십수 리 떨어진 동불사 부근의 국민회(國民會) 전원에게 도달한 적이 있음.” 이렇듯 당시 독립군의 정보 수집 능력과 전파 속도는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김좌진이 활동하던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 산하에는 총재부, 사령부, 서무부, 세무부와 인사국, 경리국, 군법국, 모집국, 징모국, 기계국, 경신국 등 다양한 기관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경신국(警信局)은 경사(警査)와 통신(通信)이 주 임무였다. 경신국은 만주·조선·연해주 등에서 광범위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빠르게 상부로 보고하는 비밀첩보조직이었다. 


경신국 아래에는 경신분국(警信分局)이 설치되었고, 경신분국 아래에는 경신분과(警信分課)가 설치되었다. 이정(李楨)이 작성한 「진중일지(陣中日誌)」에서 경신 제34분국장 박순(朴淳)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 경신분국이 최소 34개 이상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신분국의 인원은 5명 내외였다. 그렇다면 각 분국에 소속된 인원을 계산하면 총 170명에 달한다. 또한 「진중일지」에서 경신 제1분국 제8과장 이경상(李京相)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경신분국 산하에 분과가 8개 내외로 설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각 분과의 정원은 10명이었다. 그렇다면 총 34개 분국에 각 8개 분과씩 설치되었다고 할 수 있다. 1개 분과 정원이 10명이고, 1개 분국은 8개 분과 80명이다. 34개 분국 산하 272개 분과에는 총 2,720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분과 인원 2,720명에 분국 인원 170명을 더하면 총 2,890명이다. 약 3천명에 가까운 인원이 경신국 소속이었던 것이다.


1920년 7월 3일,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 본부에서는 육군형법(陸軍刑法)과 육군징벌령(陸軍懲罰令) 각 40부를 인쇄해 경신국으로 보냈다. 경신국이 군 형법의 적용을 받는 준군사조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경신국의 구성원들은 군인에 준하는 신분으로 활동했던 것이다. 실제 경신국의 하부조직이 30~40개 분국과 8개 내외의 분과를 가졌는지, 그리고 이들의 규모가 3,000명에 달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독립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자원한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바로 독립군의 눈과 귀가 되어,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승리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청산리 전역의 승리는 독립군의 희생과 헌신 뿐만 아니라, 우리 동포 모두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