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 한국 독립전쟁의 금자탑, 청산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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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독립전쟁 선포 100주년, 청산리 대첩 100주년
한국 독립전쟁의 금자탑, 청산리 전투
Theme 3. 청산리 전투의 영웅과 숨은 주역들
독립에 모든 것 바쳤던 젊은 거인들
그들이 있어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
글 | 김주용(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일제강점기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희망이 거의 보이지 않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가산을 팔고 국외로 망명했던 독립운동가들은 어느 나라로부터도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가운데,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독립항쟁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들은 일본제국주의와 지독한 추위, 마적과의 사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만주에서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게 된다. 그 서막이 봉오동전투이며, 결정판이 청산리대첩이었다. 자신을 희생하고 조국을 찾고자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대의(大義)가 오늘날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제 청산리 대첩에 참여했던 위대한 영웅의 이야기를 대한민국이 차분히 복원할 때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한 배경에는 만주독립군의 존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10월 중순 이후 만주를 가본 한국인들은 그 가혹한 추위에 놀랄 것이다. 그렇다. 만주는 춥다.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제국주의와 지독한 추위, 마적과의 사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만주에서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게 된다. 그 서막이 봉오동전투이며, 결정판이 청산리대첩이었다.
독립전쟁 100년, 청산리 대첩을 준비하다.
청산리 대첩의 준비는 이미 1911년 신흥무관학교의 설립과 함께 준비되었다. 그들은 서간도지역에서 독립군의 주역으로 자라고 있었으며, 북간도에서도 명동학교를 중심으로 수많은 민족학교에서 독립군들을 배출하였다. 그들 가운데 중국의 유명한 군관학교였던 운남강무당을 졸업하고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자,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국방부장관이었던 철기 이범석은 당시 불과 20살의 앳된 청년이었다.
1920년 10월 21일, 첫 총성이 백두산 자락의 백운평을 갈라놓았다. 독립군 부대 약 2,800명과 일본군 부대 5,000여 명의 드라마틱한 전투장면은 이범석의 자서전 우둥불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산세가 험해 일본군이 가졌던 야산포가 유명무실했던 전투에서 1905년 개발된 38식 총과 7.62mm의 중기관총은 아주 위력적이었다. 전술의 고급가치를 발현했던 전투이자 승전이었다.
이 위대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는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현 청산리에 있다. 지금도 청산리는 조선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촌장 역시 조선족이다. 그들의 주업은 연변에서 가장 유명한 자연산 송이를 채취하는 일이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화룡시내에서 비포장길 30분을 내달려야 도착할 수 있다.
100년전 10월 독립군들은 일본제국주의 군대와 싸우고 있었다. 청산리 대첩에 직접 참여했던 또 다른 젊은 투사 이우석은 그의 수기에 “식량으로 배급된 감자를 1일 1식 3개 이상 못 먹는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우리 중대는 적군과 싸웠다.” 라고 했다. 처절했다.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면서 싸웠던 젊은 거인들, 그들이 있어 현재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다.
지도자와 무명용사의 합작으로 일군 위대한 승리
청산리 대첩에 참가했던 한국독립군은 근 3천명을 헤아린다. 그 가운데 이름이 확인된 독립군은 10% 정도이다. 무명용사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지도자들의 합작품이었던 청산리 대첩에 대해 한국인들은 장군들만 기억하고 있다. 그래도 기억의 유동 속에서 몇 분은 한국인들에게 잊지 못할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한국사 교과서에는 ‘봉오동 홍범도’, ‘청산리 김좌진’으로 기억이 화석화되었다. 하지만 봉오동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홍범도 장군과 함께 전투를 치뤘으며, 청산리 대접에서는 김좌진 장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독립군 연합부대가 합심해서 일본군을 물리쳤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청산리 대첩은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대한국민군, 신민단, 의민단 등의 연합부대가 참가한 전투였다. 청산리 대첩의 주역으로는 먼저 북로군정서 총재였던 서일과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 봉오동 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도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철기 이범석 장군도 청산리 대첩 이후 한국광복군 참모장을 지냈으며, 광복 후에는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지냈기 때문에 그래도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인물이다. 북로군정서 젊은 중대장이었던 김훈(중국명 양림)은 오히려 한국인들보다 중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신흥무관학교와 운남강무당을 졸업하고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정치위원이었던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신임을 두텁게 받은 인물로 베이징에 있는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에도 전시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후 북로군정서 참모장으로 파견된 백우 이장녕과 노은 김규식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 백우 이장녕 : 그의 고향은 독립기념관이 소재하고 있는 충남 천안군 목천읍이다. 목천읍은 이장녕 이외에도 이동녕이라는 걸출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그가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군대해산 이후 대가족을 이끌고 중국으로 망명한 사실도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다. 이장녕은 독립운동의 1.5세대라고 할 수 있다. 1880년대 초반에 출생해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거쳐 육군장교로 복무하다가 나라가 망해 가는 과정을 호국의 최첨병인 군대에서 목도하였다.
이장녕 가문은 1907년 11월 중국으로의 망명을 단행하였으며, 다음해 2월에 유하현에 정착했다. 이것은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따른 조처 일 수도 있지만 우당이나 석주 가문보다 약 3년 먼저 이주하였으며, 후일 김대락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