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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 Theme 1. 순국선열의 헌신과 정신적 가치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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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의 숭고한 사생취의(捨生取義) 정신 

대한민국 존속시키는 정체성이며, 미래 열어가는 정신적 지표


글 | 김희곤 (안동대학교 명예교수)


  우리가 순국선열을 기리는 이유는 하나다. 앞으로 닥칠 어떠한 고난도 이겨내면서 나아갈 정신적 지표와 지혜를 구하는 정수(精髓)가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실낱같은 희망마저 보이지 않던 날, 자신을 불살라 나라를 구하려던 그 뜻과 희생이야말로 후손에게는 빛이요 길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도와 달라 기대기보다는, 선열의 역사에서 지혜를 배우고 내일을 열어가고자 다짐하는 것이 곧 기념하는 일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가장 절박할 때 제정한 순국선열의 날, 그 법통을 계승한다고 천명한 대한민국 정부가 이를 제대로 잇고 기리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멀고도 험한 이곳까지 옮겨 오면서 온갖 고난에도 꺾이지 않고 버텨낸 것은 오로지 순국선열들의 희생 덕분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뜻을 새기고 기리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위 글은 대한민국 국회의 뿌리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이청천·차리석 의원이 순국선열을 기념하자고 제안하던 말이다. 이는 대한민국 21년(1939년) 11월 중국국민당 정부의 전시수도인 충칭(重慶)의 바로 아래 치장(綦江)에서 열린 회의에서 나온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 27년에 그 절반인 13년을 상하이에서 보내고, 윤봉길 의거 직후 상하이를 떠난 뒤 7년 만인 1939년 치장에 도착하였다. 이듬해 충칭에 들어가기까지 1년 정도 그곳에 머물렀는데, 이곳에서 임시의정원은 순국선열을 기리는 방법을 논의하였다.


순국선열의 헌신과 희생, 기여는 국가가 기려야할 최고의 덕목


   이청천 의원의 첫 마디는 “순국선열을 기념할 필요에 대하여는 더 말할 것도 없고”라고 시작하였다. 그렇다. 세계 어느 나라이든지 순국선열을 기념하는 데 무슨 이유를 내세우지는 않는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 바친 선열의 정신이야말로 나라를 존립시키는 정체성이요, 미래를 열어가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아일랜드나 베트남 등을 예로 들 필요도 없이, 모든 나라에는 순국선열의 헌신과 희생, 기여를 최고의 덕목으로 기리고 있다. 그들을 기리는 기념관이나 기념공원을 만들고, 또한 기념일 정하며, 국가행사에서 순국선열을 기리는 의례절차를 앞세우는 것도 같은 이유다. 


 우리나라 법규에는 순국선열을 몇 가지로 나누고 있다. 독립전쟁에서 전사하신 분, 적에게 사형을 당하신 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저항하신 분, 일본군인과 경찰에 의해 피살되신 분, 옥중에서 병으로 순국하신 분, 죽음 직전에 풀려나서 곧 서거하신 분 등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분들을 “조국을 위하여 자기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희생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의 감옥에서, 단두대에서 혹은 전장에서 고귀한 생명까지도 희생하였다.”라고 표현하였다.


임시의정원, 을사늑약일인 11월 17일을 순국선열의 날로 제정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1회 회의는 순국선열을 기리는 하루를 정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순국선열이 몇 분이나 되며, 그분들의 순국날짜를 일일이 기억하기 힘들고, 또 한분씩 기념하다보면 빠트리기도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느 날이 알맞을까. 비록 1910년에 나라를 잃었지만, 실제로는 1905년 외교권을 상실했을 때 이미 나라가 망했다고 보았다. 실제로 바로 그때부터 순국자가 쏟아지기도 했다. 그래서 조약에 강제로 맺어졌다는 그날, 11월 17일을 ‘순국선열의 날’로 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하필이면 결의한 날이 11월 21일, 그러니까 이미 나흘이 지난 때였다. 그래서 이듬해 대한민국 22년(1940년) 11월 17일이 ‘제1회’ 기념일이 되었다. 이 사실을 공포하고 이듬해부터 충칭에서 기념식을 가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성원들은 “이날을 당하여 순국열사의 희생정신을 학습하고, 자신을 철저히 한번 반성하여 보는 데서 무상(無上)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 소식이 신한민보에 게재되면서 미주동포들에게도 알려졌고, 이에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몬태나를 비롯하여 여러 지역별로, 또 멕시코와 쿠바 동포들도 기념식을 진행할 정도였다.


순국선열을 기리는 의식, 좌파 우파의 차이도 없었다 


   기념일을 정하기 이전에는 순국선열을 기리는 의식을 가지지 않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상하이 시절에 이미 3·1운동 기념식이나 국치기념식, 개천절 등 의식이 열릴 때면 순국선열을 기리는 묵념 차례를 반드시 넣었다. 거기에는 좌파 우파의 차이도 없었다. 상하이의 거류민단에서도 그랬고, 조선의용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묵념 시간이 1분이 아니라 3분 동안이었다. 예를 들자면 대한민국 22년(1940) 9월 17일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창립기념식이 열렸을 때, 애국가 합창에 이어 “3분간 일본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바친 한국과 중국의 순국선열을 기리는 묵념”으로 진행되었다. 한국과 중국의 주요 인사들이 참가한 자리였다. 


 순국선열을 기리는 행사와 의식은 대한민국 정부로 계승되었다. 대한민국 27년(1945) 12월 19일 국민들은 서울운동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 환영대회’를 열고, 시가행진까지 벌였다. 비록 미군정은 개인자격이라 규정했지만, 국민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개선’, 곧 ‘독립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것을 환영하고 나섰다. 그 자리에서도 순국선열을 기렸다. 그리고서 나흘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내무부 주관으로 순국선열추념대회를 서울운동장에서 열었다. 국기 게양과 국기에 대한 경례에 이어 묵념이 진행되고, 정인보가 “대한민국 27년(1945) 12월 23일,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순국선열 영령 앞에 아뢰나이다.”로 시작되는 ‘순국선열추념문’을 읽었다. 추념문을 지은 이가 바로 정인보였지만, 긴 문장이라 대신 읽은 것이고, 김구는 그 추념문을 제단에 바치고 배례를 올렸다. 


 추념문은 시조 단군 이래로 숱한 흥망을 겪었지만 일제에 강제병합 당한 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면서, 을사년 이후 경술년 국치에 이르기까지 참담한 시절이었지만 끊임없이 분발시킨 분이 순국선열이라고 전제하였다. 이어서 광복을 맞을 때까지 41년 동안 “몸은 쓰러져도 혼은 나라를 놓지 않고, 숨은 끊어져도 뜻은 겨레와 얽매어, 그 장하고 매서움을 말할진대 어느 분의 최후인들 하늘이 울고 땅이 슬퍼할 거대한 족적이 아니시리오.”라고 표현하였다. 


“칼에 베여 돌아가셨거나 약에 의해 독살당하셨거나 다 같은 독립운동을 발발시킨 기둥이요, 단신으로 의거하거나 무리 지어 싸우거나 모두 광복 달성의 열렬한 매진이요, 시중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다 굳센 뜻을 감옥에 묻었거나 해외를 전전하면서 괴로운 마음을 적의 칼날에 끝마쳤거나 이 모두 적과 싸워 죽겠다는 굳센 의지니, 개인으로 단체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죽임을 당하였거나, 그 피해 서로 다르지만 내어 뿜은 민족적 예기(銳氣)는 그치지 않았으니, 이 피가 마르지 아니하매 적과 싸움에 쉬신 적 없고, 싸움이 그치지 아니하매 왜적이 한시도 이 땅을 완전히 장악했다 하지 못하리라.”

 - 「추념사」 한 부분


순국선열 정신, 반드시 계승하고 배워야 할 정신적 덕목


 어느 순국열사의 최후인들 하늘이 울고 땅이 슬퍼할 일이 아니겠는가.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도 나라와 겨레를 품은 그 고귀한 뜻과 희생을 무엇으로도 가득하게 표현하기 힘든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희생과 투쟁이 침탈을 당하던 그 세월 동안 쉼 없이 펼쳐졌다는 강인한 역사가 강조되고 되새겨진 자리였다. 김구 주석의 추념사는 나라 밖에서 지낸 오랜 세월 동안 “산 자들도 죽음의 길에 있어 의존한 것은 오직 선열들의 혼백”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렇다. 멀고도 험한 망명지, 가장 절박했던 순간순간에 오로지 기댈 곳은 ‘선열의 혼백’이었다. 그러니 광복을 맞자마자 그 선열을 기리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순국선열의 날은 선뜻 대한민국 정부 차원의 기념일이 되지 못하고 민간단체 손에 맡겨졌다. 


   대한민국 정부가 순국선열의 날 기념행사를 주관하기 시작한 때는 광복 이후 17년이나 지난 1962년이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1970년 정부 기념일 축소통합 정책에 따라 다시 민간단체 주관으로 현충일 추념식에 포함되면서 위상이 떨어졌다. 그러다가 1997년에 와서 다시 정부가 주관하는 행사로 복원되었다. 이것은 독립운동과 순국선열에 대한 평가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순국선열을 기리는 이유는 하나다. 앞으로 닥칠 어떠한 고난도 이겨내면서 나아갈 정신적 지표와 지혜를 구하는 정수(精髓)가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실낱같은 희망마저 보이지 않던 날, 자신을 불살라 나라를 구하려던 그 뜻과 희생이야말로 후손에게는 빛이요 길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도와 달라 기대기보다는, 선열의 역사에서 지혜를 배우고 내일을 열어가고자 다짐하는 것이 곧 기념하는 일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가장 절박할 때 제정한 순국선열의 날, 그 법통을 계승한다고 천명한 대한민국 정부가 이를 제대로 잇고 기리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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