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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 Theme 2. 광복 이후, 중국 지역 내 한인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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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해외동포의 귀환 

그대 곁에 모국이


해외독립운동의 거점이자, 한인사회의 중심 

만주 질서 및 중국의 입장 우선 고려

쉽게 돌아오지 못한 그들 


글 | 황선익(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교수)



  해외 한인의 귀환은 일본인·중국인·대만인 등을 포함한 1천 500만명의 인구이동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그 중 중국 지역 한인의 귀환은 그 규모나 범위에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더욱 방대한 문제였다. 게다가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 충돌하는 내전구도와 중국-미국-소련이 얽혀있는 외교관계가 이를 더욱 복잡다단하게 만들었다. 해방과 함께 부상된 한인의 귀환문제는 중국국민정부와 연합군총사령부의 동의, 그리고 승인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는 한인의 귀환이 미·중관계에 따라 영향받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재중한인의 처우는 태평양전쟁기 체계화된 중국의 대한정책과 전후처리 구상에 좌우되었다.



한인사회의 특수성과 중국정부의 인식


 20세기 전반 중국은 해외독립운동의 거점이자, 한인사회의 중심지였다.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과 이주, 일제에 의한 집단이주와 강제동원 등 다양한 배경으로 재중 한인사회는 확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중국에는 약 250만 명에 달하는 한인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 


 1900년대부터 본격화된 한인의 중국 이주는 만주에서 본토(關內)로 확대되었다. 간도(間島)에서 만주, 연해주로 이어진 한인사회는 관내의 상해(上海), 북경(北京), 천진(天津) 등지로 확장되었다. 1910년대 독립운동의 거대 축이었던 만주와 상해의 한인 사회는 일제의 중국 침략에 따라 크게 동요되었다. 상해 한인사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에 따라 입지가 변하였고, 1932년 일본군의 상해침략 이후 일제의 직접적 압박을 받게 되었다. 만주 한인사회의 경우 이미 1920년대 초부터 일본군과 만주 군벌의 이중적 탄압을 겪고 있었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중국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중국 내 한인사회도 변질되었다. 중국 관내 도시에서 활동하던 이들 중에는 전향자가 속출했으며, 만주에는 ‘집단이주’한 한인들이 빈궁한 국내 생활을 포기하고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했다. 독립운동가와 부일 전향자, 그리고 만주에서 중국인과 경쟁적 관계에 놓인 소위 ‘개척 농민’ 등 다양한 한인들이 재중 한인사회를 구성했다. 자연히 이들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 또한 다각적이었다.


 태평양전쟁기 중국정부는 미국, 영국 등과 전후 한국문제를 협의하면서 내부적으로 한국의 독립과 신탁통치, 연합군 주둔과 한국군 창설문제, 재정원조방안 등을 검토해갔다. 그리고 광복을 전후하며 한인들의 국적 부여, 재산권 처리, 국내로의 귀환, 거주권 인정 등 각종 의제를 정책화되어갔다. 중국 외교부는 전쟁 종결, 독립, 정부 수립 상태에 따라 한인의 처우가 상당히 변할 수 있다고 전망하며, 한인의 귀환 책임은 미국‧중국‧영국이 져야할 것으로 보았다. 나아가 한국의 완전한 독립 후 해외 한인의 국적은 한국이 정한 법률에 의거해 다뤄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중국 내 한인에 대해서는 전면적인 조사 후, 친일부역의 혐의가 있거나 ‘불량분자’가 아니라면 중국 내 거주를 허용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중국 정부의 전망은 연합국 진영간의 조율 속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광복과 함께 부상된 한인의 처리문제는 중국 국민정부와 연합군총사령부의 협의를 거쳐 진행되었다. 특히 다른 지역에 비해 방대한 문제였던 중국 지역 한인의 귀환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충돌하는 내전 구도와 중국-미국-소련이 얽힌 외교관계로 인해 복잡다단하게 전개되었다. 여기에 일본에 대한 전후처리, 미소의 한반도 분할점령 등 급변하는 국제정세로 인해 한인 사회는 일대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중국 내 외국인의 송환 구도와 한인의 귀환


  해외 한인 문제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논의는 전쟁 종결 후 긴밀하게 지속되었다. 중국지역 한인 귀환 문제는 연합군총사령부를 중심으로 한 미국․중국 군사참모회의에서 다뤄졌다. 이때 주목할 것은 한인의 귀환이 일본군 포로 및 교민, 대만인(臺灣人) 등의 송환과 연계되어 협의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내 일본 세력의 점진적 철수를 골자로 하는 일본인의 송환은 자발적 의사에 따라 결정되는 사안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한인의 귀환도 사실상 ‘중국 내 외국인의 본국 귀환’이라는 측면에서 송환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1945년 9월부터 시작된 미․중간 협의는 10월 25~27일 개최된 연합군총사령부, 중국 지역 미군사령관, 미 7함대 및 중국국민정부 대표자 간의 회의에서 구체화되었다. 이때 양측은 중국 내 이동은 중국 측이 부담하고, 선박 운용 및 권역별 이동 승인은 연합군총사령부를 위시한 미군이 담당하기로 합의하였다. 한․중․일 귀환에 이용될 항구는, 중국 및 대만(天津 上海 靑島 廣州 海口 厦門 海防 基隆 高雄), 일본(佐世保 鹿兒島 博多 吳), 한국(부산 인천 목포)별로 지정되었다. 미․중은 귀환의 대상이 될 한인․일본인․대만인의 총수를 2백만 명으로 보았다. 한인의 경우 대상자 55,622명 중 80% 이상이 천진의 당고(塘沽)항과 상해에 집중되어 있었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합국 진영은 중국 내 한인 귀환자수를 지나치게 적게 파악하고 있었다. 1945년 10월경 중국 관내지역에 거주하는 한인의 수는 최소 7~8만 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지역별로는 북경(北京)지역 3만 5천명, 천진(天津)지역 1만 5천명, 상해(上海)지역 5천 6백명, 태원(太原)지역 1만 5천명, 제남(濟南)지역 4천명, 서주(徐州)지역 3천명 등이었다. 게다가 만주지역 한인은 전혀 파악되지 않고 있었다. 


 한인의 귀환은 미․중간의 협의에 따라, 1946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공식적인 첫 귀환은 천진의 당고항을 출발하여 1946년 2월 1일 인천에 도착한 1,838명이었다. 하지만 한인의 귀환이 순탄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당고항에서의 2차 귀환은 4월에 들어서야 재개되었고, 귀환을 기다리며 수용소에 집결된 한인들은 질병과 식량부족으로 고통을 겪었다.

 북경, 천진지역 한인을 대상으로 한 당고항에서의 귀환에 뒤이어 상해지역에서의 귀환이 이뤄졌다. 1946년 3월 4일 상해에 있던 광복군 잠편지대원들도 이때 귀환했다. 제남(濟南) 등 내륙지역 한인들의 이동이 증가하는 가운데 청도항도 주요 귀환항구로 활용되었다. 1946년 3월경 중국지역 한인의 공식적인 귀환은 절반 정도 진행되었다. 


복잡한 국제정세와 다양한 경로로 진행된 귀환  


   중국지역 한인 귀환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자 주한미군정은 상해 청도 천진 3곳에 연락반을 설치하였다. 미군 장교 1명과 한인 2명으로 구성된 각 연락반은 1946년 말까지 현지 항구에서 귀환자 운송을 돕는 역할을 하였다. 중국에서의 미군정의 활동은 중국군 혹은 주중미군사령부를 보조하는 차원에서 이뤄졌을 뿐, 한인의 보호와 귀환에 대한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게다가 소련 점령지구인 동북지구는 관할하지 않아 공백상태에 놓였다.


 동북지역 한인의 귀환은 호로도항구를 통해 진행되었다. 동북지역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하여 육상으로 귀환할 수도 있었다. 해방 직후 동북지역에는 약 216만 명의 한인이 있었으며, 약 70만 명이 자유롭게 귀환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1945년 말부터 북한지역으로의 이동이 제한되기 시작했다. 특히 38선 이남으로의 이동은 더욱 어려운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 동북지역에서의 한인 집단귀환은 1946년 12월에 1차로 이루어졌다. 본래 계획에는 1만 5천명의 송환이 예정되었으나, 기후와 교통 등의 문제로 2,483명이 실제 귀환하였다. 1947년 9월부터 추진된 제2차 집단귀환 때에는 귀환을 요구하는 한인이 1만 명을 넘었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1946년 중국지역 한인의 집단 귀환 이후, 모든 귀환 행정은 중국 외교부가 미국대사관을 통해 연합군총사령부 및 주한미군 당국에 입국여부를 타진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리고 미군과 행정원 선후구제총서(善後救濟總署)가 교통수단을 제공하였는데, 이때 휴대물품은 1인당 500파운드로 제한되었다. 소지할 수 있는 현금은 1천 원으로 제한되었고, 초과액은 몰수되었다. 그리고 달러와 일본 화폐는 휴대가 금지되는 등 통화 휴대에 대한 엄격한 규정이 적용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정부와 교섭하여 한인 교포들의 보호와 귀환을 담당할 기구 마련을 협의했다. 그리고 1945년 10월부터 한인의 보호와 귀환을 담당할 한교선무단(韓僑宣撫團)을 화북(華北)․화중(華中)․화남(華南)의 세 권역에 설치했다. 선무단은 교포들의 거주 조사와 구호를 위한 선무활동에 들어갔다. 나아가 임시정부는 환국 직전인 11월 1일 외교기구인 주화대표단을 설치하여 중국 내 한인문제를 전담토록 했다.


  1946년말 한인의 귀환이 마무리되는 가운데, 선무단은 해체되고, 주화대표단도 북경, 상해에 판사처를 설치하며 기능이 축소되었다. 1946년 11월 주화대표단은 중국에 직원 105명의 귀환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중국 외교부는 귀환허가 사실과 함께 연합군총사령부가 제시한 조건을 알려왔다. 


 “첫째, 해당 일반송환자의 예에 따라 귀국하며 특별한 우대조치를 누릴 수 없다. 둘째, 해당 한교들은 귀국선을 기다리는 다른 송환자와 같은 수속절차를 밟아야 한다. 셋째, 해당 한교들은 자신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는 것임을 분명히 이해하고 어떠한 정치적 연락이나 의존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조건하에 이들 한교들의 귀국을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귀환하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결국 주화대표단 철수 인원은 12월 일반 한인 3백여 명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재중 한인에 대한 처우와 거주권 


 중국지역 한인의 귀환은 임시정부 요인을 비롯한 주요 인사와 일본군에 배치된 한인 포로 3만여 명, 그리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임정 요인과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인의 귀환은 대체로 1945년 말까지 사실상 봉쇄되었다가 1946년부터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한편으로 한인들의 지위 또한 모호하게 대우되었다. 특히 일본군으로 징집되었던 한인 병사들은 일본군인들과 함께 수용되기도 했다. 이에 임시정부는 한인 병사가 일본인과 같이 패전국 포로로 취급받는 점을 지적하며 그 부당성을 지적하여 분리 수용되었다. 그러나 한인 병사들은 기본적으로 포로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 이들은 종전 직후 소속부대에서 ‘소집해제(復員)’된 후, ‘한적사병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일반인과 같은 배를 타고 귀환하였다. 


    1946년 중국 국민정부는 한인의 집단귀환을 추진하는 한편, 한인들에 대한 법적 장치를 정비해갔다. 중국 정부는 1945년말  「한교․한인 포로 처리법(韓僑韓俘處理辦法)」을 제정하며, 포로와 일반 한인, 일본인과 한인의 구분을 법제화하였고, 1946년 4월 「한인처리법대강(韓僑處理辦法大綱)」으로 향후 중국에 거주할 수 있는 이들에 대한 ‘거류증’ 발급 규칙 등을 제도화했다. 이에 따라 한인에 대한 거류증의 검사와 발급은 해당 지방경찰기관이 조사하고 처리하게 되었다. 중국에서의 한인 문제가 본격적으로 내정의 영역에서 다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중국의 각 지방정부는 한인들에 대한 인구조사는 물론 이력조사 등을 통해 거주허용 가능자와 불가자를 구분한 후, 가능자는 체류시키되 불가자는 ‘강제송환’하는 정책을 취했다.


 결국 중국 국민정부는 집단수용-집단귀환-거류조사-개별귀환 및 강제송환(병행)-잔류 단계로 한인 정책을 마련해갔다. 1946년 들어 중국 정부는 임시로 인정하던 한인의 거주권을 엄격히 해나갔다. 특히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전면적 내전 조짐이 표출되는 가운데, 국민정부는 중국 내 한인의 이동까지 제약했다. 


 1949년 국공내전이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관내에 있던 한인들은 대만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터전을 잡기도 했지만, 대부분 대륙에서 삶을 이어갔다. ‘조선족’이라는 소수민족으로서 새로운 정체성이 부여된 한인들은 한국과 단절된 채 반세기를 보냈다. 그리고 냉전의 종식과 함께 비로소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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