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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 Theme 3. 재일 조선인의 사회 형성과 귀국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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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광복 후, 해외동포의 귀환

그대 곁에 모국이


일제 식민 지배의 역사가 살아있는 삶의 궤적

차별과 핍박 속에 흔들리는 정체성 

조센진이 아닌 진정한 한국인2


글 | 김인덕 (청암대학교 교수, 재일코리아연구소장)


 한편 연합군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1946년 3월 귀환을 희망하는 재일조선인은 등록했다. 그리고 1946년 4월 1일부터 수송이 재개되었다. 해방 이후 일본에서 조선으로 귀국한 재일조선인의 시기별 변화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렇게 해방 이후 1946년 3월까지 재일조선인의 경우 가장 많은 수의 귀국자가 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 자주적인 부분과 조련(재일본조선인연맹)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주요했다. 


 물론 여기에는 연합군사령부와 일본 정부의 역할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체 귀국에서 이 시기 귀국은 수에서, 자주성에서 우세가 확인된다. 


 한편 일부의 재일조선인은 귀환을 미루거나 정주하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국내 정치의 불안, 남한의 인플레, 일제 동화정책의 잔재, 생활기반의 문제, 미불 임금 문제와 지참금 1,000엔이 작아서였다고 한다. 


 필자는 여기에서 연합군사령부와 일본 정부와 함께 재일조선인 주체의 움직임에도 주목하고자 한다. 해방된 공간의 재일조선인에 의한 최고의 단체인 조련은 초기부터 귀국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강령에서 이 조직은‘귀국동포’의 편의와 질서를 도모했다. 그리고 제10회 확대중앙상임위원회에서는 징용노동자에 대한 귀국여비와 위문금품 지급을 결의하고, 중앙 질서 있는 행동을 호소하며,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下關과 博多에 출장소 설치를 결정했다. 귀환자 수송계획을 세우고 사업을 진행할 때는 品川驛에 관동지방 수송연락사무소를 설치했던 것이다. 이런 움직임이 있어 재일조선인의 귀국에 희생이 적었다고 할 수 있다.


돌아오지 못한 귀국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 호의 침몰


 전술한 것처럼 귀국을 위해 일본의 주요 항구에 모여든 재일조선인은 주로 사선을 이용한 동항을 적극 실행했다. 이와 함께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우키시마마루(浮島丸) 호의 침몰 사건이다. 


 우키시마마루호는 해군특별수송선이었다. 8월 22일에 이 배는 재일조선인 노동자와 가족 3,735명과 해군승무원 255명을 태우고, 靑森縣의 大湊항을 출발하여 부산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京都府의 舞鶴灣에서 어뢰 폭발로 침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 해군은 재일조선인 524명과 일본인 승무원 25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실제 사망자가 5천여 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조사도 하지 않고 침몰 원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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