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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 Theme 3. 재일 조선인의 사회 형성과 귀국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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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광복 후, 해외동포의 귀환

그대 곁에 모국이


일제 식민 지배의 역사가 살아있는 삶의 궤적 

차별과 핍박 속에 흔들리는 정체성 

조센진이 아닌 진정한 한국인


글 | 김인덕 (청암대학교 교수, 재일코리아연구소장)


  조국을 떠나 산다는 것은 힘겹고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원한 것도 아닌데 강제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면 그 아픔은 굳이 말이 필요치 않은 일이다. 그렇게 이 땅을 떠나 일본으로 간 사람들이 바로 재일조선인이다. 그들은 낯선 일본 땅에서 ‘조센진’으로 극심한 고통과 차별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조국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일제에 맞서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조국의 분단을 그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다. 또한 차별 없는 평안한 삶 대신 자신을 잊은 조국의 국적을 선택했다. 재일조선인, 그들은 더 이상 조센진이 아니다. 그들은 진정한 조선인이자 한국인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은 재일조선인에게 해방이었다. 재일조선인은 해방을 일본 땅에서 맞이했다. 1945년 8월 일본에는 210만 이상의 한국인이 있었다. 식민지 지배 아래 살아야 했던 이들에게 해방은 환희와 기쁨이었다. 


 라디오 앞에서 무조건 항복을 한다고 하는 천황의 방송을 듣고 있던 우리 한국인들은 내심 날뛸 듯이 기뻤다. … 눈을 감고 우리들에게 이제부터 펼쳐질 여러 가지 일을 상상하면서 그리운 고국의 산과 강, 꿈에도 잊지 못한 부모님 형제들 처자식을 눈앞에 그리며, … 곧바로 달려서 돌아가겠다. 이제 돌아갈 수 있다. 우리들에게 때가 온 것이다. 자유세계의 자유로운 몸. 튼튼한 사슬로 꽉 매어 있던 몸이 일시에 풀어난 것 같다. 이 순간의 환희, 어떻게 필설로 나타낼 수 있을까.

             - 정충해(井下春子訳), 『朝鮮人徴用工の日記』, 151쪽


 특히 나이든 사람들은 살았다면서 눈물을 흘렸고, 젊은 사람들은 귀국해서 새로운 나라 만들기를 고민했던 것이다. 


일본가기 역사 : 재일조선인, 그들은 누구인가 


  일제는 일본 경제와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 따라 도일정책을 수립하여 조선인의 도일을 통제했다. 1922년 12월에는 여행증명제도가 철폐되고, 1923년에는 도항증명제가 실시되었다. 1923년 경부터 단체 모집이 허가되지 않다가 관동대지진 때의 파괴된 시가지를 복구하기 위해 도항증명제를 폐지했다. 1925년 10월부터는 도항저지가 정책적으로 실시되었고, 1928년 7월 조선총독부는 도일허가 조건을 까다롭게 했다. 이러한 도일정책은 1930년대 일시귀선증명서제도와 도항소개장 발급제도로 귀결되어, 도일을 원하는 조선인은 본적지나 주소지 소재 관할 경찰서장한테 도항소개장을 발급 받아야만 했다. 조선인은 전시동원체제가 되면서 강제연행되어 일본, 만주, 사할린, 남양군도, 남방지역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에 간 조선인은 1910년을 기점으로 늘어났고, 1920년에는 재류자의 숫자가 3만 명이 넘었다. 이들 도일한 조선인은 일본 전역에 거주했으며 거주 상황은 일본의 산업구조와 노동조건 등과 관련되어 있었다. 재일조선인의 대다수는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고베(神戶) 등지에 거주했다. 이들 지역에는 1920년 전후 조선인 마을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조선인이 모여 살았다. 조선인 마을은 조선인을 위한 해방구였다. 경기 변동에 직면하여 항상 먼저 희생이 되는 사람, 그들이 바로 도일한 조선인의 모습이었다. 최하층 노동자가 바로 재일조선인이었다.


해방은 선택의 출발점…돌아갈 것인가, 남을 것인가 


해방과 함께 귀국을 희망하는 재일조선인은 일본 각지에서 시모노세키(下關), 센자키(仙崎), 하카타(博多) 등지로 모였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한반도에 있던 일본인을 일본으로 먼저 귀국시킨 이후 일본에 있던 조선인을 한반도로 귀국시키고자 했다. 1945년 12월부터 귀환자는 1인당 현금 1천 엔 이내를 지참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때문에 일본에 재산이 있거나 직장이 있고 부양가족이 있는 사람은 조선으로의 귀국을 신중하게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귀환한 사람 중에는 일본 정부나 연합 군사령부의 수송계획으로 편안히 돌아 온 사람도 있지만 구사일생으로 귀국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당시 조선인의 귀국 관련 일을 했던 일본인의 회고는 흥미롭다. 패전 직후 시모노세키와 센자키에서 귀환자 원호를 둘러싼 재일조선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패전 직후 귀국을 희망하는 한국인들이 일본 각지에서 下関으로 쇄도했다. 하루에 2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이 밀려오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下関港은 미군이 투하한 어뢰와 일본군이 부설한 어뢰․잠수함 방어 그물 등으로 선박 출입이 불가능했다. … 한국인들이 귀환을 기다리며 下関역 부근에 운집했으며 大和町界隈에는 100채 이상의 판자집 음식점과 많은 상점이 생겨났다. 北九州의 若松에서 밀선이 출항한다는 소문을 듣고 한국인들은 若松으로 몰려가기도 했다. 仙崎에서 연락선이 출항하면서 下関에서 仙崎로의 대이동이 시작되었으며 수 만명이 仙崎에서 노숙했다.

   - 萩原晉太郎, 『さらば仙崎引揚港: 敗戦․激動の峡間から』, 65-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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