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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 Theme 2. 미주 한인사회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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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에 전해진 3·1운동의 불꽃  


이국땅에서 흘린 피땀 ‘독립자금 젖줄’ 되어

세계만방에 퍼지다 


글 | 김도형(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


  한국인들은 1903년 하와이 이민을 통해 공식적으로 미주지역에 첫발을 내렸다. 미주로 이민을 온 한인들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1910년 망국이라는 통한을 당하고 말았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면서 미주 한인사회에는 독립을 위한 활동들이 폭풍같이 휩쓸고 나아갔다. 하와이와 북미에 있는 모든 한인단체들은 독립운동에 온 정성과 노력을 다 바쳤다. 미주의 한인 이민 1세들에게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고 자고 먹고 살아왔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현순, 3·1운동 소식을 미주에 알리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국과 자주민임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독립선언 이후 전국적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으며, 국외 한인사회에도 독립을 선언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내에서 독립선언을 준비하던 기독교 측에서는 이를 외부세계에 알리기 위해 현순을 중국 상해로 파견하였다. 현순은 국내에서 거족적인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중국 내에서 발간되는 신문을 통해 확인하였다. 그리고 3월 9일 오전 12시 45분 미국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안창호 앞으로 영문전보를 보냈다. 3·1독립선언 소식은 신한민보 1919년 3월 13일자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3월 1일발 전보에 가라대 독립단은 예수교회 3천과 천도교회 5천과 각 대학교와 모든 학교들과 및 각 단체들이 일어나 조직한 자라. 독립단은 3월 1일 하오 1시에 서울, 평양과 및 그밖에 각 도시에서 대한독립을 선언하고 대표자는 손병희, 이상재, 길선주 3씨로 파송하였오, 이승만 박사는 어디 있오. 회전하시오. 

- 상해특별대표원 현순


현순은 샌프란시스코의 안창호에게 전보를 보내고, 곧이어 오전 12시 53분에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 총회장에게도 같은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3·1운동의 소식이 미주에 전해진 3월 9일은 마침 일요일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인들은 한인교회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는 소식을 처음 접한 미주의 한인들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천지가 진동할 듯 만세를 불렀다.


맥클래치, 「독립선언서」 영역본 미주에 전달하다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선포된 「독립선언서」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국과 자주민임을 선포하고, 동양의 평화와 인류의 공영을 위해 반드시 독립이 되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밝힌 문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선언서」는 3·1운동을 알리는 신호탄이며, 3·1운동의 사상과 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 독립을 선언한 「독립선언서」 영역본을 미주지역에 전달한 사람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발행되는 새크라멘토 비(Sacramento Bee)의 발행인 발렌타인 맥클래치(Valentine Stuart McClatchy, 1857~1938)이다. 맥클래치는 1919년 3월 3일부터 이틀 반 동안 서울에서 3·1운동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만세시위를 취재하였을 뿐만 아니라, 3·1독립선언서 영문 번역본을 입수하여 이를 국외사회에 전달하여 전 세계에 알렸다.


맥클래치는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일제에 발각되지 않으려고 그것을 자신의 ‘돈을 넣는 혁대(money belt)’에 감추어 가지고 미주로 가지고 왔다. 그가 몰래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 영역본은 하와이의 영자신문인 퍼시픽 콤머셜 애드버타이저(The Pacific Commercial Advertiser) 1919년 3월 28일자 1면과 2면에 실렸다. 그리고 독립선언서 영역본을 북미지역 최초로 자신이 발행인으로 있는 새크라멘토 비 1919년 4월 3일자에 전문을 게재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맥클래치는 독립선언서 영역본을 AP통신사에 제공하여 전 세계에 한국민이 독립을 선언하였다는 것을 알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정의와 인도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독립선언의 당위성을 호소하고 있기 때문에, 영어로 번역된 선언서를 읽는 세계인들이 한국민족이 반드시 독립이 되어야만 한다는 데에 공감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독립선언서」가 대내적으로 3·1운동의 대의를 표방하고 대중화에 기여하였다고 한다면, 영어로 번역된 「독립선언서」는 대외적으로 한국민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데에 크게 공헌을 하였음에 틀림이 없다.


「독립선언서」를 미주에 전달한 맥클래치는 자신이 한국에서 본 3·1운동 만세시위를 새크라멘토 비 1919년 4월 5일부터 18일까지 연재하였다. 그리고 그가 새크라멘토 비에 연재한 글을 모아 아시아의 독일(The Germany of Asia) 이라는 팸플릿을 제작하여 무료로 배부하였다. 아시아의 독일이라고 제목을 정한 이유는, 일본이 독일과 같이 침략적 야심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정책이 독일과 같이 잔인하고 무도하기 때문이었다.


미국 독립선언처럼 성대하게!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하다


현순으로부터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는 전보를 받은 안창호는, 이승만과 서재필에게도 즉시 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천고(千古)에 희한한 일이며 하늘님의 도움심”이라고 하였다. 곧바로 미국 국무부에 한국 애국자들이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지 않도록 해달라고 전보를 보냈다.


이승만을 비롯한 서재필과 정한경은 국내에서의 3·1독립선언이 마치 미국의 독립선언을 연상시킴으로 이를 보다 극적으로 연출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미국이 독립선언을 했던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열기로 하였다. 이승만 등 3명은 미국의 각 사업계, 교회계, 교육계, 신문잡지계 등 대표될만한 인사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회의를 개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제1차 한인회의는 3일간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 필라델피아 중심가에 있는 리틀극장에서 개최되었는데, 미주 한인 대표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저명한 인사들도 연사로 다수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는 많은 초청연사들의 연설이 있었고 「대한공화국정부에 보내는 메시지」, 「미국에의 호소문」,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 「일본의 지각있는 국민들에게」, 「미국정부와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 등의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그 가운데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은 총 10개조로 구성되었는데 독립 후의 국가건설에 대한 구상이 담겨 있다.


제1차 한인회의가 끝난 후 참석자들은 한국과 미국의 국기를 들고 필라델피아에 있는 미국 독립관(Independence Hall)까지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승만은 독립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미국 초대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책상에 앉아 기념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한국과 미국을 위한 만세삼창을 불렀다.


미주 한인, 재정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미주지역은 ‘한국독립운동 자금의 젖줄’이라고 불릴 정도로 독립운동에 막대한 자금을 제공하였다. 3·1운동 이후 미주 한인들은 독립의연금, 공채금, 애국금, 혈성금, 국민부담금, 독립금 등의 명목으로 수십만 달러를 거두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한 각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3·1운동의 소식이 미주에 전해진 이후 미주지역 한인을 대표하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국내외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재정적 지원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중앙총회장 안창호는 “우리가 금전으로 싸우는 것이 생명으로 싸우는 것만치 요긴하다. 매삭 매주일 수입에서 20분의 1을 거두어들이게 합시다. 실시하려면 4월부터 시작하게 되리니 이달에는 미주·멕시코·하와이 재류동포 전체가 10원 이상의 특별의연을 내게 합시다”라고 호소하였다. 중앙총회에서는 재정 확보책을 ‘독립의연’이라고 이름하고, 중앙총회에서 직접 북미·하와이·멕시코 각 지방에 출장소를 두고 3월까지 매명 10달러의 의연금을 거두게 하였다. 이와 함께 4월부터는 매삭·매주일 혹 1년 수입의 20분의 1을 내게 하는 ‘21례’를 실시하였다.


한편, 이승만은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국내에서 선포된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로 선출되었다는 문건을 받고, 1919년 8월 25일 미국 워싱턴에 집정관총재 직권으로 ‘대한민국 특파 구미주차위원부’ 즉 ‘구미위원부’를 출범시켰다. 구미위원부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회의나 임시의정원의 동의 절차를 받은 공식 외교기관은 아니지만, 대통령 이승만의 직접적인 관할하에 미주지역의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구미위원부에서는 독자적으로 공채표를 발행하여 미주한인 및 외국정부와 민간인을 대상으로 대규모 자금을 모집하고자 하였다. 구미위원부는 1919년 9월부터 1922년 4월까지 총 148,653달러 모집하였으며,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및 하와이 지방총회와 합치면 30만~35만 달러를 모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상품 배척하는 배일운동을 전개하다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진 후 한인들이 재정모금, 외교활동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긴 것은 미주 현지에서의 배일운동이었다. 미주 한인들에게 있어 3·1운동 즉, 독립을 선언한 것은 일본과의 독립전쟁을 선언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이 선언되면 반드시 국교의 단절이 있고 통상이 금지되기 마련이기 때문에 미주 한인 개개인이 일본인과 단절하고, 개인 간의 통상을 끊는 것은 당연하다고 인식하였다. 또한 미국이 독립전쟁 당시 영국의 상품을 배척한 것과 같이 미주의 한인들도 일본상품에 대해 보이콧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미주지역 한인들은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배일운동으로 ‘일(왜)화배척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일화배척과 일본인과의 교제를 절단할 것을 지시하였다. 미 본토, 멕시코,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인정할 때까지 일본상품에 대한 보이콧을 결의하였다. “왜놈의 물건 한 푼어치라도 쓰면 이는 다 역적”이라고 하면서 강력하게 보이콧을 하였다. 특히 하와이에서 한인들은 일본인들과 같은 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일본제 식료품을 사먹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과의 관계 단절이나 일본상품에 대한 보이콧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지만, 한인들은 일본간장도 안 먹고 일본물건도 전혀 구입하지 않았다.

 

  또한 3·1운동과 더불어 미주의 한인들은 국내의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한 생활상의 각가지 방법을 강구하였다. 중앙총회에서는 독립선언을 기념하고 자랑스런 한국인임을 표시하기 위해 패표(button)를 제작하여 동포들에게 배포하였다. 이 패표는 옷깃에 차는 것으로, 바람에 날리는 태극기와 미국 성조기를 교차하게 만들었으며, 독립을 선언한 3월 1일과 건국기원의 단년(檀年)을 새겨 넣었다. 이와 더불어 「독립선언서」 원문이 미주에 전달되면서, 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국한문으로 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판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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