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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 Theme 3. 2·8 운동으로 본 재일조선인 항일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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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심장부 저격한 독립의 함성 

최후 일인까지 피 흘릴지니 영원히 혈전을 선언하노라 


글 | 김인덕(청암대학교 교수)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은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8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했다. 2·8독립선언서는 당시의 국제 정세 속에서 새로운 국가 건설의 현실적 요구와 필요를 담아냈으며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무엇보다 일제의 심장부인 일제의 수도에서 대낮에 공개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놀랍다. 내용 역시 혁명적이다.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일제와 ‘영원한 혈전’을 벌이겠다고 맹세하고 있다. 2·8독립선언은 이후 3·1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재일조선인 유학생과 2·8독립운동의 전개 


1918년 12월 15일자 『저팬 애드버타이저 The Japan Advertizer』에 ‘한국인, 독립을 주장 Korea, Agitate for Independence’이라는 제하에 재미동포들이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정부에 제출하였다는 보도기사와 12월 18일자 ‘약소민족들 발언권 인정을 요구’라는 기사에 재일조선인 유학생은 크게 고무되었다. 이와 같은 소식을 접한 재일조선인 유학생은 1919년 1월 6일 도쿄 간다(神田)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이하 학우회) 웅변회를 열고 반일투쟁을 위한 실행위원을 선출하였다. 이들 실행위원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다. 당시 실제 문안작성은 이광수가 전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월 8일 600여 회원의 환호 속에 역사적인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런 2·8독립운동은 재일조선인 유학생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던 역사적 사건이다. 실제로 일본에 한국 유학생이 가기 시작한 것은 1881년부터였다. 특히 1910년 강제병합 때까지 개화파 사람들과 갑오개혁 때의 사람들이 유학했다. 


1910년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인의 일본 유학이 있었다. 국내에 제대로 된 학교가 없던 시절에 근대적인 국가로 성장하여 한국을 침략한 일본은 새로운 지식의 보고로 보였던 것 같다. 1910년 이후의 재일조선인은 주로 사비유학으로 일본에 갔다. 그 구성원도 1910년 이전과 달리 문벌과 권세가 있는 집안의 사람만이 아니라 다양해졌다. 특히 고학생이 늘어났다. 전문학교 이하의 학교에 재학하는 경우 학비 때문에 야간에 공부하고 주간에 노동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조선인 고학생은 주로 도쿄와 오사카, 고베, 교토 등지에 살면서 신문배달, 인력거꾼, 일용노동자, 점원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당시 조선인 유학생의 다수는 도쿄에 거주했다. 


재일조선인 사회는 1910년 이후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일본으로 이주한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들은 소수이지만 일본 사회 속에서 ‘조선인’으로 살아갔다. 


  2·8독립운동이 있기 얼마 전인 1917년 12월 재일조선인 유학생은 총 589명으로 그 가운데 456명이 도쿄에 거주했다. 1918년 말은 769명 가운데 642명이 도쿄에 거주했다. 아울러 1919년 5월 총수는 366명이고 이 가운데 310명이 도쿄에 거주하고 있었다. 5월에 유학생의 총수가 현저하게 준 이유는 3·1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한 유학생이 속출했기 때문이었다. 1920년 유학생의 총수는 1,023명으로, 일제 문화통치의 영향으로 재일유학생의 수가 급증했다.


재일조선인 사회의 모습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유학생들은 단체를 조직했다. 1895년 4월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와 같은 해 9월 제국청년회를 결성하여, 조선인 유학생은 친목도모와 민족의식의 고취에 앞장섰다. 1910년 이전에도 도일한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은 다수가 반일적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1906년에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 1909년에 대한흥학회를 결성했다.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는 황성기독교청년회의 분회로 1906년 11월 5일에 창립되었다. 대한흥학회가 2·8운동의 중심인 학우회를 조직하는 구심이었다. 학우회는 대한흥학회의 후신으로, 1911년 조선유학생친목회가 결성되었다. 이 조직이 다음해 3월 해산 당하자, 조선인 유학생들은 종래의 도별 유학생 구락부를 기초로 하여 1912년 10월 27일 학우회의 조직에 성공했다. 


학우회는 임시총회 및 웅변회, 졸업생 축하회, 신도래학생환영회, 운동회 등을 통해 배일사상을 고취했다. 아울러 기관지 『학지광』을 발간하여 유학생뿐만 아니라 국내 학생에게도 신사상과 반일사상을 고취했다. 학우회는 다양한 형태의 집회를 통해 조선 독립을 대중적으로 선전하고 조직의 강화를 도모했으며, 조선 독립을 갈망하는 대중적 열기를 응집시켜 나갔다. 창립 이후 1919년 2·8독립운동 시기까지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2·8독립선언의 주요 내용


  2·8독립운동은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재일조선인 유학생이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8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함으로써 막이 올랐다.


도쿄 유학생 거의 대부분인 약 600명이 참가했다. 회장 백남규가 개회를 선언하고, 최팔용의 사회로 대회의 명칭을 조선독립청년단 대회로 바꾸고,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순서에 따라서 백관수가 2·8독립선언서를,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했다.


이날의 운동은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이 하루아침에 계획하여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요인을 들어보면, 첫째로 도쿄에 유학하고 있었던 학생들은 일찍부터 서로 간에 친선을 도모하고 학문을 서로 권할 수 있는 조직을 형성하고, 상당 부분 반일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사실이다. 둘째로는 재일 유학생들은 웅변회, 토론회 등을 통하여 민족의 독립 문제를 표명하고 민족사상을 보다 심화시켜왔던 사실을 들 수 있다.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경 이들 학우회의 주요 구성원이 주도한 조선청년독립단은 2·8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 일본 국회의원, 조선총독부 그리고 도쿄 및 각지의 신문사와 잡지사, 개별적인 학자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했다.   


이렇게 2·8운동은 재일조선인 유학생 특히 학우회에 의해 주도적으로 조직, 전개되었다. 이들은 변화하는 세계사 속에서 이념과 사상을 선언과 결의문의 형태로 천명했다. 2·8독립선언서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4천 3백 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은 실로 세계의 오래된 민족 중의 하나이다. (중략) 1895년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앞장서 승인하였고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여러 나라도 독립을 승인할뿐더러 이를 보전하기로 약속하였다. 


당시 러시아의 세력이 남하하여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안녕을 위협하니 일본은 한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러일전쟁을 시작하였다. (중략) 급기야 전쟁이 종결되고 당시 미국대통령 루즈벨트의 중재로 러일 간의 강화회담(포츠머스 조약)이 열리게 되니 일본은 동맹국인 한국의 참가를 불허하고 러일 양국 대표자 간에 임의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안건으로 올렸으며, 일본은 우월한 병력을 가지고 한국의 독립을 보전한다는 옛 약속을 위반하여 미련하고 어리석은 당시 한국 황제와 그 정부를 위협하고 속여서 “한국의 충실함이 족히 독립을 득할 만한 시기까지라”는 조건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이를 일본의 보호국을 만들었다. (중략) 합병조약을 체결하니 이에 우리 민족은 건국 이래 반만년에 자기를 지도하고 원조하노라 하는 우방의 군국적 야심에 희생되었도다. 


  가능한 온갖 반항운동을 다하다가 정예한 일본 무기에 희생이 된 자가 부지기수다. (중략) 오늘날 세계 개조의 주역이 되고 있는 미국과 영국은 보호와 합병을 지난날 자기들이 솔선하여 승인한 잘못이 있는 까닭으로, 이때에 지난날의 잘못을 속죄할 의무가 있다고 단언하는 바이다. (중략) 어느 면으로 보아도 우리 민족과 일본과의 이해는 서로 배치되며 항상 그 해를 보는 자는 우리 민족이니,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의 생존할 권리를 위하여 독립을 주장하노라. 


러시아는 이미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신국가를 건설하려던 중이며 중국도 그러하며 더욱이 이후 국제연맹이 실현되어 다시 군국주의적 침략을 감행할 강국이 없을 것이다. (중략) 우리 민족은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자유를 추구할 것이나 만일 이로써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민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하여 온갖 자유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위하여 뜨거운 피를 흘릴지니 이 어찌 동양평화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우리 민족에게는 한 명의 병사도 없다. 우리 민족은 병력으로써 일본에 저항할 실력이 없다. 그러나 일본이 만일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하노라. 


2·8독립선언서에서는 첫째, 조선 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으며 다른 민족의 실질적 지배를 받은 경우가 없는 민족이라고 하고, 미국과 영국이 일제의 조선 침략을 승인한 것을 비판했다. 둘째, 침략의 부당성과 한일합방 후 10년간의 식민통치를 비판하고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피력했다. 셋째, 한일병합 이후 10년 동안 식민통치는 우리 민족의 이해와는 배치된다면서 우리 민족은 자신의 생존권을 위하여 독립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넷째, 국제적인 환경을 볼 때, 일본이 지금까지 청일·러일전쟁을 구실로 한반도에 들어왔던 일이 있었을지라도 자신만의 안정을 위하여 한반도를 점령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했다. 다섯째,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식민통치를 계속한다면 일본에 대해 우리 민족은 영원히 투쟁할 것이며 결국은 ‘동양평화의 화원(禍源)’이 될 것이라고 일본에 경고했다. 여섯째, 선언서는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선진국의 모범을 따라서 신국가를 건설하고 반드시 세계평화에 공헌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특히 선언문 중에서는 러시아는 이미 군국주의적 야심을 버리고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하고 있다고 신국가의 한 모델로 러시아를 상정하기도 했다.


2·8독립선언서의 역사적 의의


2·8독립운동의 다음날인 2월 9일 재일조선인 유학생 기숙사에서는 동맹 퇴사가 모의되어, 80여 명의 기숙사생이 총 퇴사를 단행했다. 2월 12일 히비야공원(日比谷公園)에서 2차 시위를 계획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실행되지 못했다. 이후 2월 24일 히비야공원 독립운동을 계획했지만 이것도 거사 전에 발각이 되었다. 당시 변희용, 최승만, 장인환, 강종섭은 새벽에 연행되어 검속되었다. 다른 유학생들이 시위운동을 결행하여 2월 24일 오후 2시 반에 150명이 모였고 서명자 중 한 명인 최재우가 숨어 있다가 등장하여 명주에 쓴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소집촉진부 취지서’를 낭독하고 전단지를 배포했다.


  2·8독립선언서는 당시의 정세 속에서 기본적인 보편적 세계사의 발전과정에 따라서 새로운 국가 건설의 현실적 요구와 필요를 담아냈으며 독립의 당위성을 국내외에 선전했다. 또한 2·8독립선언서는 일제의 심장부인 일제의 수도에서 대낮에 공개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놀랍다. 아울러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일제와 ‘영원한 혈전’을 벌인다는 뜻을 다짐했다. 이는 3·1독립선언의 공약 3장이 지향한 ‘평화적 해결’과 대조적이다. 


결의문은 적극적인 반일투쟁을 통한 독립과 영원한 혈전을 결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일본 내 정치정세와 국제정세에 적극 행동으로 조선민족대회 소집과 만국평화회의 ‘위원’ 파견을 주창하고 있다.


이광수가 초안을 작성한 2·8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 등은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선언했다. 첫째, 민족자결(民族自決)에 의한 자유·독립을 요구이며 둘째, 한일합방은 일본의 강압으로 이룩된 것이니 무효다. 셋째, 일본의 사기는 인류의 치욕이요, 세계가 개조되는 이때 한국이 독립함은 당연하다. 넷째, 일본 국회와 정부는 조선민족대회를 개최케 하여 한민족의 의사를 물어보라. 다섯째, 민족의 생존권을 위하여 일본에 대해 영원한 혈전(血戰)을 전개할 것 등으로, ‘3·1독립선언서’에 비하여 훨씬 구체적이고 투쟁적이며 시민적이고 혁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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