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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 Theme 4. 대한독립선언서와 만주지역 무장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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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전쟁 제창한 최초 선언문


독립군 총궐기와 한민족 전체에게 ‘육탄혈전’ 촉구  


글 | 장세윤(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올해 2월은 중국 동북(만주)지역의 지린에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된 지 102주년이 되는 달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선언서가 1919년 2·8독립선언서나 3·1독립선언서보다 빠른 1918년(무오년)에 작성, 배포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무오독립선언서’라는 별칭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최근 연구를 종합해보면 대한독립선언서는 1919년 2월 중·하순경(혹은 늦어도 3월 2일)에 발표된 것으로 파악된다(신운용·이숙화). 따라서 종래 알려진 것처럼 3·1운동 전후 시기에 발표된 독립선언서 가운데 최초의 것은 아니지만, 독특한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선언서라고 할 수 있다. 


대한독립선언서의 맥락


대한독립선언서는 1919년 2월 주로 만주 등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교헌 등 39명의 독립운동 지도자 명의로 중국 지린(吉林)에서 발표되었다. 모필(毛筆: 붓)로 쓴 것을 석판으로 약 4,000부 인쇄했는데, 중국 관내와 동북지방, 러시아 연해주, 미주지역 및 하와이 등지에 우편으로 배포되었다. 특히 하와이에서 활동하던 박용만 등에게도 전달되어 영문으로 번역·전파되기도 했다. 이처럼 주로 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배포되어 독립을 선언하고, 적극적 무장투쟁을 독려했다는 점이 매우 독특하다. 이 선언서는 미주지역에서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여 3점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 선언서 작성의 주체는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部)’로 파악되는데, 1919년 1월 말 중국 동북 지린성 성도인 지린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이다. 그러나 조소앙은 자신이 1919년 2월에 이 선언서를 기초했음을 여러 차례 밝혔다. 특히 그는 1917년 7월 배포된 ‘대동단결의 선언’을 기초했다는 점에서 이 선언서와의 연관성을 살펴볼 수 있다. ‘대동단결의 선언’은 해외에서 활약하던 신규식·박용만·조소앙 등 14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상하이에서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제안한 선언서이다. 


  신규식·조소앙 등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 각지에 산재한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한 최고기구의 조직과 국민주권설에 입각한 통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위한 민족대회의 소집을 제안하는 ‘대동단결의 선언’과 그러한 대회 소집의 찬동여부를 묻는 ‘찬동통지서’를 국내외 각지에 발송하였다. 독립운동의 최고 통합조직으로 ‘임시정부’를 설립코자 한 것인데, 이 선언은 그러한 명분과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 ‘선언’의 요지는 주권불멸론에 의한 국민주권설의 제창, 주권을 상속받아 국가적 행동을 실천하기 위한 방안 제시, 국가적 행동을 성취하기 위한 통일기관·통일국가·원만한 국가 달성이라는 3단계 독립론을 제창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 선언의 계획이 바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신한민보(新韓民報)』 등을 통해 해외동포 사회에 전파되면서 임시정부 수립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3·1운동의 결과, 같은 해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이 ‘대동단결의 선언’은 3·1운동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나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을 받기에 앞서 우리 민족 스스로 대동단결과 최고 통치기구 설립을 제의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주요 내용 및 특징


   대한독립선언서의 기초자와 배포자로 알려진 조소앙과 정원택 등의 회고에 따르면 상하이에 있던 신규식 등을 통해 1919년 전후 국제정세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파리강화회의 소식 등이 전해지면서 이 해 1·2월경에 지린에서 독립의군부가 결성되고, ‘대한독립선언서’의 작성과 배포가 추진되었다. 따라서 중국 동북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 세력이 국내외 정세에 기민하게 대응하여 중국 관내지역과 동북지역을 연계하면서 해외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선언서는 제목, 본문, 발표날짜, 서명자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은 35행으로, 모두 1,273자이다. 주요 내용을 보면 ①내외에 독립 선언, ②일본의 죄악 규탄, ③독립의 역사적 의의를 규정, ④독립운동의 방침 또는 방법 천명 등으로 이루어졌다.


매우 주목되는 내용은 “일체의 방편[一切方便]으로 군국전제(君國專制)를 삭제하여 민족 평등을 세계에 널리 베풀[普施]지니 이는 우리 독립의 제일의 뜻[第逸意]이요”라고 밝히고 있는 부분이다. 바로 공화주의 이념을 주창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더욱이 이 선언서는 소위 ‘한일합병’의 무효를 선언하고, 일본을 응징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독립군의 총궐기와 한민족 전체의 ‘육탄혈전(肉彈血戰)’을 촉구하고 있다. 또 본문의 끝 문단 첫 부분에서 ‘단군대황조(檀君大皇祖)’라고 밝히고 있는 사실을 보면, 이 선언서 작성의 주체들은 대종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선언서는 1919년 초 국외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사고와 정서가 잘 반영된 중요문서라 할 수 있다. 또 3·1운동 시기에 발표된 여러 독립선언서 가운데 해외 무장독립운동 세력의 ‘독립전쟁론’ 입장을 강력히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이 선언서는 1919년 3·1운동 직전의 이른 시기에 발표되었다는 점, 항일무장투쟁의 사상적·인적 배경으로 대종교와 그 계열 인사들이 크게 작용한 점, 이른바 ‘혈전주의’를 내세운 점, 일본 도쿄의 2·8독립선언이나 국내 3·1독립선언 등과 관련이 없이 독자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하겠다.  


이 선언서의 주요 내용을 간략히 검토한다. 특히 밑줄 친 부분은 독립의 제1목표가 공화제 정체의 수립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판단된다.   

   

우리 대한(大韓) 동족 남매와 온 세계 우방 동포여!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신성한 평등복리로 우리 자손 여민(黎民: 백성)에 대대로 전하게 하기 위하여, 여기 이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을 해탈하고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중략)  

십년 무력과 재앙의 작란(作亂)이 여기서 극에 이르므로 하늘이 그들의 더러운 덕을 꺼리시어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주실 새, 우리들은 하늘에 순종하고 인도에 응하여 대한독립을 선포하는 동시에 그들의 합병하던 죄악을 선포하고 징계하니, 

(중략)

그러므로 하늘의 뜻과 사람의 도리[天意人道]와 정의법리(正義法理)에 비추어 만국의 입증으로 합방 무효를 선포하며, 그들의 죄악을 응징하며 우리의 권리를 회복하노라.

 (중략)  

아 우리 대중이여, 공의(公義)로 독립한 자는 공의로써 진행할지라, 일체의 방편[一切方便]으로 군국전제를 삭제하여 민족 평등을 세계에 널리 베풀[普施]지니 이는 우리 독립의 제일의 뜻[第逸意]이요, 무력 겸병(武力兼倂)을 근절하여 평등한 천하[平均天下]의 공도(公道)로 진행할지니 이는 우리 독립의 본령이요, 밀약사전(密約私戰)을 엄금하고 대동평화를 선전(宣傳)할지니 이는 우리 복국의 사명이요, 동등한 권리와 부[同權同富]를 모든 동포[一切同胞]에게 베풀며 남녀빈부를 고르게 다스리며, 등현등수(等賢等壽)로 지우노유(知愚老幼)에게 균등[均]하게 하여 사해인류(四海人類)를 포용[度]할 것이니 이것이 우리 건국[立國]의 기치(旗幟)요, 나아가 국제불의(國際不義)를 감독하고 우주의 진선미를 체현(體現)할 것이니 이는 우리 대한민족의 시세에 응하고 부활[應時復活]하는 궁극의 의의[究竟義]니라. 

(중략)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본령(國民本領)을 자각한 독립임을 기억할 것이며,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皇天)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祇奉) 일체 사망(邪網)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건국기원 4252년 2월 

  

이 선언서의 서명자 39명 중 30명이 대종교 관련 인물로 파악된다. 따라서 선언서의 기초자는 조소앙이지만, 김교헌 등 대종교 관련 인물이 대거 서명자로 발표되었다는 점, 그리고 대종교 관련 용어와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북간도(중국 연변) 일대에 근거한 대종교 등 만주 독립운동 세력의 ‘독립전쟁’을 위한 선언문, 나아가 독립군 단체가 설립되어야 할 명분과 당위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하나의 헌장(憲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이 선언서의 서명에 포함된 인물 모두의 동의를 받았다거나, 회합을 거쳤다는 기록은 없지만,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명망가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선언서의 중요성과 가치가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향후 영향과 의의


3·1운동은 국내는 물론, 다수의 한인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던 만주지역까지 확산되었다. 특히 1919년 3월 13일 북간도(현재 중국 연변지역) 룽징(龍井)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운동에는 2만(최대 3만)여 명의 많은 동포들이 참여하여 조국 독립과 민족 해방을 위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군경의 발포로 17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하는 큰 희생을 치렀다. 현재 연변 학계에서는 이를 ‘3·13반일시위운동’ 또는 ‘3·13반일군중운동’이라 부르고 있다.


연변 3·13운동 당시 김약연 등 17명의 ‘재남북만주(在南北滿洲) 조선민족 대표’ 명의로 「조선독립선언서 포고문」이 발표되었다. 김약연은 대한독립선언서 서명자의 1인이었다. 3·13운동이 중국 당국의 탄압으로 진압된 뒤 중국 연변과 동북지방에서 독립군의 무장항쟁이 고양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3·13운동의 기획에 대종교 간부 고평(高平, 이명 고인석)이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 독립의군부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그 이념과 인맥을 계승하여 1920년 10월 청산리독립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대한군정서(일명 북로군정서)가 서일 등 대종교 지도자들의 주도로 조직되었다는 점에서 독립의군부와 이 선언서의 의미를 조명할 수 있다.


또한 독립의군부와 대한독립선언서에 참여한 인물 가운데 다수가 향후 대한민국임시정부 등 독립운동과 무장독립전쟁에 참가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이 선언서의 영향과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더구나 대부분의 독립선언서가 도쿄의 2·8독립선언이나 서울의 3·1독립선언서 영향을 받아 비폭력을 표방하며 정의·인도 등을 내세운 것과 달리 ‘혈전’을 내세우며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무장투쟁론을 펴고 있다는 측면에서 우리 민족의 적극적 독립운동론을 대변한 대표적 선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시종 일본제국주의 세력을 꾸짖고 질책하면서 독특한 논리와 체제, 사상 구조와 이념, 독립운동 방법론을 반영하여 이후 독립운동에 작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더욱 높이 평가되어야 할 귀중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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