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 Theme 2. 3·1운동에 대한 일본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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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조선’을 다시 보는 계기 마련
젊고 강렬한 독립심
정치적 선진성과 치밀한 계획에 감탄
글 | 윤소영(독립기념관 학술연구부장)
한국근대사상 전무후무한 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의 언론들은 3·1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해 무지·미신·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절하하고, 조선왕실과 한인 대중을 이간질했으며, 한국인이 민족자결주의를 오해하고 있다는 기사를 반복적으로 게재하는 등 왜곡보도를 일삼았다. 하지만 3·1운동의 중심이 청년이며, 여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도 했다. 일부 언론은 3·1운동의 주체가 조선총독부의 감시와 탄압 체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준비했는지 감탄했다. 3·1운동의 장기화는 일제강점 후 국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을 조롱하고 무시했던 일본인들에게 한국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1910년 한국을 강점한 후 일본의 정치·사상적 상황은 다소 유연한 모습을 보였다.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로 대표되는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서구의 민주주의 사상을 연구하여 개인적 이해를 넘어선 고차원적 집단의식이 사회를 합리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라 지적하고, 정치 주체로서 개인의 자각과 참정권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18년 9월 29일 일본 최초의 정당내각인 하라 다카시(原敬) 내각이 성립했다. 일본 국민은 메이지시대 이래의 사츠마(薩摩) 조슈(長州) 중심의 번벌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여서 하라 다카시를 ‘평민재상’이라 부르며 환영했다. 그 와중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참전하고 파리강화회의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주재 하에 이루어지게 되자, 민주주의가 세계적 대세라는 전망이 청년들 사이에서 희망으로 싹트고 있었다. 그리하여 후대의 학자들은 이 시기를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라고 명명했다.
왜곡보도 일삼고 조선왕실·한인대중 이간질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3·1운동에 대해 당시 일본은 어떻게 인식했을까? 3·1운동 당시 한국에는 오사카아사히신문과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의 기자가 파견되어 있었다. 지금은 도쿄가 일본 언론의 중심이지만 근대 시기 언론의 중심은 오사카였다. 이들이 파견된 이유는 3월 3일에 거행되는 고종황제의 국장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와중에 고종 국장일을 전후하여 기획된 전대미문의 3·1독립운동 현장을 목도하게 되었고, 보도사진과 함께 그 모습을 일본에 타전하기에 이른다.
물론 보도내용은 기본적으로 관제보도의 한계를 넘을 수 없었다. 일본에 보도되는 기사는 먼저 내무성 검열을 거쳐서 게재되었기 때문이다. 1909년에 제정된 법률41호 신문지법은 안녕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풍속을 해하는 것으로 인정될 때 발매 반포금지 및 차압할 수 있으며(제23조·24조), 육군대신·해군대신 및 외무대신은 군사 혹은 외교사항에 대해 게재금지·제한할 수 있고(제27조), 황실의 존엄을 모독하고 일본의 정치체제를 바꾸고자 하거나 일본헌법에 위배되었을 때 발행인·편집인·인쇄인은 2년 이하 금고 또는 300원 이하 벌금에 처(제42조)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 언론에 보도된 3·1운동 관련 내용은 기본적으로 정보의 왜곡이 전제되어 있었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왜곡 보도는 3·1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한 점이다.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은 3월 4일 석간에서 “이태왕 국장례를 기회로 경성의 대소요, 조선인 대군중이 악성만세를 절규했다”는 데서 시작하여 3월 8일 석간에서는 “조선인의 폭동은 무지, 미신,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고 ‘손병희의 한바탕 연극’이라던가 ‘구제할 길이 없는 조선학생’, 3월 10일자 ‘이해 못할 소요 인민’, ‘협박에 약한 조선인’, ‘질서회복을 방해하는 불량한 무리’라는 제목에서 보듯 독립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언설로 일관했다. 심지어 3월 11일자에는 “조선왕실에서도 망동하는 자는 무지몽매하다고 했다”고 보도하여 조선왕실과 한인 대중을 이간질했다.
둘째, 일제 측의 탄압을 축소 보도하고, 일제 측 피해를 과장·강조하는 방식으로 보도했다.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은 3월 1일의 상황을 고종의 국장 경비를 위해 동원된 순사 헌병 300명과 경기도 관내 헌병 순사가 아침부터 경성에 도착해 있었지만 단속명령을 받지 않아 시위 군중을 수수방관할 뿐이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조선헌병대사령부의 3월 1일자 보고서에는, 용산 보병 3개 중대와 1개 기병 소대를 동원하여 헌병과 경찰관을 지원하고 시위대를 진압하여 저녁 7시가 되어 겨우 소강상태를 맞이했다고 적고 있다. (조선헌병대사령부 편 「朝鮮騷擾事件ノ槪況」)
일본에서 발간된 영자지 『Japan Advertiser』 3월 7일자 기사에도 3월 1일 경찰이 칼을 빼들어 시위대를 무력 진압했다고 보도했고,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헌병 분대가 병기를 사용·진압하여 시위대 중 사상자가 발생했음을 보도(‘Police With Drawn Swords’, 『The Japan Advertiser』, March 7, 1919)했던 것과 달리, 일본 내 신문에는 이와 같은 기사는 게재되지 않았다.

셋째, 한국인이 민족자결주의를 오해하고 있다는 기사를 반복적으로 게재했다.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은 3월 4일자 논설에서 유럽대전의 소란을 기회로 민족자결주의가 고조되자 조선인이 민족자결주의를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일본인과 조선인은 원래 한 민족”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여 한국의 독립 요구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오사카신보(大阪新報)』는 1919년 3월 8일자 ‘조선의 소요’에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일본은 民命과 재산을 바쳐 조선을 도왔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언설을 펼쳤다.
넷째, 3·1운동 발발 초기에 일본 측 신문은 3·1운동의 주동자가 손병희와 천도교라고 지적하고 매우 부정적인 보도로 일관했다. 『오사카아사히신문』 3월 7일자는 “이번에 무지한 조선 사람을 유혹한 것은 천도교라는 사이비종교를 주장하여 평소부터 다수의 우민을 이끌고 있는 교주 손병희”라며 천도교를 ‘사이비종교’로 폄하하고 이를 신봉하는 조선인은 무지한 우민이라고 단정했다.
3·1운동의 계획성·정치적 선진성에 감탄
그렇지만 이와 같은 왜곡보도의 행간을 읽어보면, 일본인들이 정작 3·1운동의 전개양상에 대해 얼마나 경이롭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3·1운동에 대한 기사가 일본 신문에 처음 게재된 3월 3일자 『오사카마이니치신문』 석간 6면에는 ‘조선 각지의 소요-여학생도 섞인 수천 명의 단체’라는 기사가 실렸다.
1일 오후 2시경 조선 경성에 일대 소동이 야기되었다. 이 일은 중등학교 이상의 조선인 학생 전부가 결속하고 이에 다수의 여학생도 참가하여 일대(一隊)를 조직하고 고 이태왕 전하의 대장례가 다가온 것을 기회로 삼아 일대 시위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우선 종로에서 행진을 시작하여 대한문에 이르렀는데 이때 그 숫자는 점점 불어나 수천 명이 되었다.
특히 시위대가 학생들이고 그중에 여학생도 참여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시위 중 부상당했지만 일본인 의사의 진찰을 거부한 조선여학생의 일화나 마산의 시위운동에서 여성이 웃으며 포박을 받았다(3월 24일자)는 기사에서는 3·1운동 당시 여성들이 얼마나 적극적이고 당차게 시위운동에 참여했는지 놀라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한 3·1운동의 중심이 다름 아닌 청년들이었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있었다. 『시사신보(時事新報)』는 3·1운동이 발발한지 2주가 경과한 시점에서 서울의 분위기를 전하기를, “이번 3월에 졸업증서를 수여받아야 할 각종 실과학교(實科學校) 생도들의 경우, 일본인이 세운 학교의 졸업증서는 필요 없다고 호언하며 한 사람도 등교하지 않는가 하면 길거리에서 교직원을 만나도 인사하는 자가 없다”고 지적하며 “소요는 진압되겠지만 청년들이 이러한 불령(不逞)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장래의 화근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또한 “일본인은 조선인의 머릿속에는 사대사상이 새겨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고 주의를 촉구하기도 했다. (‘朝鮮統治方針’, 『時事新報』, 在京城漢江漁史, 1919.3.25)
3·1운동이 조만간 진정될 것이라는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가자 3월 중순 이후 각 신문에는 천도교의 유래와 손병희를 분석하는 연재기사가 늘었다. 일본 신문은 천도교의 존재를 전적으로 ‘사교’, ‘미신’으로 간주하던 경향에서 벗어나 손병희와 천도교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분석하는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먼저 천도교가 1910년대에 추진한 교육의 근대화에 주목했다. 천도교가 지원하는 보성법률상업학교, 보성전문학교, 동덕학교 등의 경영을 비롯하여 배영학교, 양덕여학교 등 직할하지 않는 학교에는 보조금을 부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 청년학생이 이번 운동의 주축이 된 것이며 아울러 천도교는 기관 잡지도 발행하고 있어서 3·1운동 당시 대량 전단지 인쇄도 문제없이 할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3월 1일 오후 2시 첫 시위운동이 개시되었을 때 소위 선언서는 이미 각 방면으로 빠짐없이 배포되었으며 그날 관헌이 손병희 등 33명을 체포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이미 독립신문 호외라는 것이 발행되어 그들이 체포되었다는 것을 보도했다. 그 외 선언서류와 같은 인쇄물은 수십 종이나 발행되었는데 그중에는 등사 인쇄한 것도 있고 조선을 오늘의 안락으로 이끈 조선인의 은인이라고 해야 할 이완용 외 5명을 역적으로 비난하며 선동한 것도 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것은 그들 일파 중에도 과격파가 한 일이라고 하는데 요컨대 교묘하게 인쇄물을 이용하여 하나부터 열까지 총독부를 앞지른 형국이다. (‘조선인을 어지럽히는 천도교의 정체(4)’, 『大阪朝日新聞』, 1919.3.17)
일본 언론은 3·1운동의 주체가 조선총독부의 감시와 탄압체계에도 불구하고 이를 뚫고 얼마나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준비했는지 감탄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나아가 『오사카아사히신문』 4월 11일자에는 ‘대한민국 가정부’라는 제목으로 정통령을 손병희, 부통령을 이 아무개(이승만)라 하고 각 대신의 이름을 열거한 선언서를 첨부하여 조선인 각 호에 배포하는 자가 있었다며, 이것을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망상, 발칙한 선언 유포’라는 표제로 기사를 실었다. 하지만 3·1운동이 단순히 일제로부터의 독립만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전제국가로의 회귀가 아닌 공화정을 지향하고 있음에는 말문이 막혔다고 했다. (『大阪朝日新聞』 1919.4.11) 그 이유는 일본에 강점되었다고 깔보았던 한국이 천황제를 고수하고 있는 일본보다 오히려 정치적인 선진성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3·1운동의 장기화는 일제강점 후 국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을 조롱하고 무시했던 일본인들에게 한국을 다시 보는 계기를 부여했다. 즉, 3·1운동을 통하여 일본 언론은 한국의 뿌리 깊은 독립운동세력의 존재에 대해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베유신일보(神戶又新日報)』는 손병희 일파와 해외 독립운동세력과의 연계가 이루어진다고 하여 한국독립운동이 국제적인 연락망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리하여 조선은 ‘삼천년 이래 문화를 갖는 나라’이므로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논조를 보였다. (‘朝鮮暴動原因’, 『神戶又新日報』, 1919.4.13)
그중 3·1운동의 역사적 성격을 가장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지적한 것은 도쿄제국대학 교수인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였다.
마치 으리으리한 집은 사람들이 관심이 없는 사이에 비가 새고 바람이 부는 대로 점점 썩어간다. 그 아래에서는 그 썩은 것이 비료가 되어 새롭게 싹을 틔우고 생명이 자라나는 것처럼 망국의 조선의 그늘에서 우리는 흥국(興國)의 조선이 있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중략) 소위 일본의 식자는 망국인 조선은 알아도 흥국 조선이 있다는 것은 몰랐던 것이 실로 일본의 조선통치가 잘못된 최대의 원인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만약 우리들이 거의 모든 조선인민이 실로 애국적 독립심에 불타고 있으며, 아니, 이를 자각하려는 조짐이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좀 더 다른 정치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좀 더 교묘하고 치밀하고 기술적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탄압, 말살함과 아울러 청년들을 회유하지 않으면 한국병합조약으로 ‘영원히 일본제국으로 편입된’ 한국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과 과제를 낳았다. 그것이 이른바 1920년대 일제의 ‘문화통치’란 이름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에 맞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도 국내외에서 더욱 가열차게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