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테마

[2021/03] Theme 3. 3·1운동에 대한 중국의 시선

페이지 정보

본문

중국 5·4운동의 방향성 제시 


패배주의에 빠진 

인민 각성시킨 희망의 돌파구   


글 | 이상구(국가보훈처 공적검증팀 연구원)


  중국 매체들의 3·1운동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자, 중국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혁명운동이 오히려 한국보다 뒤처진 사실을 자각하면서 “혁명운동의 신기원을 열었다”, “가장 약자인 피식민지 조선의 인민들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혁명을, 가장 위대한 방식으로 해냈다”고 경탄했다. 


1919년 3월 1일, 아시아 최초의 시민혁명 3·1운동이 일어났다. 중국 매체들은 한국의 3·1운동 소식을 발 빠르게 전했다. 그동안 알려진 바로는 3월 5일 상해에서 발행된 『신보(申報)』에 ‘서울의 시위행진[漢城示威游行]’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것이 최초였다. 그런데 그보다 하루 앞선 3월 4일 상해의 외국 조계지(租界地)에서 『자림서보(字林西報, North-China Daily News)』와 『대륙보(大陸報, THE CHINA PRESS)』가3월 3일자 오사카 발 로이터통신의 기사를 타전한 것이 최초 보도로 확인된다. 


외신이 보도되자,  3월 6일 북경의 『신보(晨報)』에서 ‘한국혁명운동의 상세보도[高麗革命運動詳報]’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고,  천진의 『대공보(大公報)』도 ‘한국에서 발생한 난리에 대한 외신(高麗亂事之西迅)’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면서 전국으로 확산하는 양상을 보도했다. 이렇듯 최초의 소식은 주로 대도시의 유력매체를 중심으로 외신을 타전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중국 매체들의 3·1운동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자, 중국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혁명운동이 오히려 한국보다 뒤처진 사실을 자각하면서 “혁명운동의 신기원을 열었다”, “가장 약자인 피식민지 조선의 인민들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혁명을, 가장 위대한 방식으로 해냈다”고 경탄했다. 그들은 왜 한국에서 일어난 3·1운동에 그렇게 경탄의 반응을 보였는지, 우선 당시의 중국 상황을 살펴보자.


중화민국 선포 후 정치적 혼란에 빠진 중국


  1912년 1월 1일, 신해혁명으로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 ‘중화민국’이 선포되었다. 1840년 아편전쟁의 패배로 굴욕적인 남경조약을 체결한지 70여 년이 지난 후였다. 아편전쟁 패배의 충격으로 1860년대 중체서용(中體西用), 즉 구체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근대적 기술을 도입하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추진했지만, 1895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체제개혁 없는 근대화의 한계를 드러냈다. 이후 1898년에는 강유위(康有爲)·양계초(梁啓超) 등이 변법자강(變法自强), 즉 전제주의 체제개혁을 통한 유신운동(惟新運動)을 추진했지만, 수구파에 밀려 실패로 돌아갔다. 청조도 1901년 신정(新政)을 통해 근대적 국가로의 모색을 시도했으나, 이미 국력이 다한 후였다. 그리하여 1911년 10월 무능한 청조를 무너뜨리는 신해혁명을 시작하여 중화민국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다.


1912년 3월 11일에 공포된  「중화민국임시약법(中華民國臨時約法)」은 “중화민국은 중화 인민으로 구성되고, 주권은 국민 전체에 귀속됨”을 선포했다. 또한 오늘날 국회에 해당하는 참의원(參議院), 행정부에 해당하는 국무원(國務員), 사법부인 법원(法院)으로 삼권분립(三權分立)을 하고, 임시대총통이 국가원수를 맡는 공화국을 표방했다. 이로써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체제 중국이 하루아침에 가장 전형적인 공화국으로 탈바꿈했다. 


그 후 현실은 기대와 다르게 전개되었다. 1912년 공화국 선포 후, 중국에는 크게 세 가지 정치세력이 각축했다. 국회 내에는 청말(淸末) 입헌과 개혁을 주장했던 인사들이 중심이 된 진보당(進步黨)과 공화혁명의 주역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자 했던 국민당(國民黨) 의원들이 신생국가의 정치체제를 놓고 결론 없는 당쟁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청조 전복(顚覆)의 1등 공신은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중심으로 하는 군부였다. 군부는 공화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해, 공화체제를 황제체제로 되돌리기[복벽(復辟)]에 이르렀다. 이렇게 아시아 최초로 공화국을 선포한 중화민국이었지만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면서 중국인들은 새로운 공화체제에 대한 희망보다 좌절감에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당시 지식인들은 ‘과분중국(瓜分中國)’ 즉 청일전쟁 이후 열강에 의해 중국의 영토가 이리저리 점령되어 반식민지(半植民地) 상태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구망도존(救亡圖存)’이라는 절박함을 갖고 중국의 현실 문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노력이 1916년부터 시작된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이었다. 신문화운동은 중국의 지식인들이 근대의 핵심 가치인 민주(民主)와 과학(科學)을 중시하고 백화문(白話文)을 통해 국민과 소통하고자 노력한 운동이다. 


이러한 때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중국 지식인들은 한국인들의 일치단결된 행동에 놀라움과 더불어 마치 자신들의 일인 양 면밀히 지켜보고 의미를 찾고자 했다. 패배감과 절망에 빠져있던 중국인들에게 한국의 3·1운동은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희망이자 돌파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신속한 언론보도 통해 동정과 지지 보내


한국의 3·1운동 소식이 들려오자, 중국의 각 매체는 신속하게 보도를 이어갔다. 두터운 독자층을 갖고 있던 각 정치세력의 기관지들은 단순 보도를 넘어 평론을 싣거나, 특집호를 편성하여 대체로 동정과 지지의 태도를 보였다. 그 가운데는 중국의 사회·문화뿐만 아니라 정치적 변혁을 꿈꾸는 글도 있었다.  


예를 들어, 상해에서 발행하는 국민당의 기관지 『민국일보(民國日報)』는 3월 9일 ‘조선의 혁명운동[朝鮮之革命運動]’을 시작으로, 3·4월 두 달 동안 총 103편의 기사를 쏟아냈다. 또한 ‘조선의 독립선포 상황[朝鮮宣布獨立詳情]’을 4회에 걸쳐 연재하여 전국 각지의 시위 정황을 상세히 전했다. 4월 13일 ‘조선의 의로운 함성[朝鮮義聲]’에서는 군산의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와 학생 수백 명의 만세시위에 대한 판결 내용을 전했고, 4월 18일에는 ‘조선 목포의 광복운동[朝鮮木浦之復國運動]’이라는 제목으로, 마치 중국 국내의 소식인 듯 상세히 보도했다. 특히 『민국일보』는 ‘난사(亂事)’, ‘소요(騷動)’ 등 당시 중국주재 일본 통신사(通信社)들이 쓰던 표현들을 지양하고 ‘존경하다[可敬]’, ‘안타깝다[可憫]’ 등 3·1운동에 대한 존중과 동정을 드러냈다. 


  중국인들이 3·1운동에 대해 본격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 계기는 ‘독립선언서’가 알려지면서다. 3월 9일 『시보(時報)』를 시작으로, 3월 10일 『민국일보』·『신문보(新聞報)』, 3월 12일 『대공보』에 ‘조선독립선언서’라는 제목으로 독립선언서의 중국어 번역본이 실렸다. 3·1운동이 발발한 지 불과 10일도 되지 않아 독립선언서가 알려지자, 중국인들은 3·1운동의 취지와 목적, 수단과 방법에 이르기까지 더 명확히 이해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3월 16일자 『매주평론(每週評論)』에는 ‘조선독립의 소식, 민족자결의 사조가 원동에 왔다[朝鮮獨立的消息, 民族自決的思潮也流到遠東來了]’라는 평론이 실렸다. 이 글에서는 중국인들이 독립선언서에서 3·1운동이 비폭력 평화운동이 된 근거를 확인하였다. 3·1운동의 비폭력성에 대해서 “그들은 정의(正義)·인도(人道)가 무력(武力)·강권(强權)을 타파할 수 있다고 자신(自信)하고,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순수한 인민의 자격으로서 운동했다. 간단히 말해 혁명사의 신기원(新紀元)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독립선언서에 대해서는 “차분한 언어로 공리(公理)와 정의(正義)에 따라 인류의 동정(同情)을 환기시키려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한편, 4월 1일자 『신조(新潮)』에는 푸스녠[傅斯年]이 쓴 ‘조선독립운동 중의 새로운 교훈[朝鮮獨立運動中之新敎訓]’이 실렸다. 그는 3·1운동에서 배워야 할 세 가지 교훈을 들어 중국인들을 각성시키고자 했다. 첫째는 무기가 없는 비폭력 혁명으로,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조선인의 혁명은 진정한 정의의 결정체”라는 것이다. 둘째는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는 혁명으로, “모두가 하지 않는다면 어찌 가능하겠는가? 또한 모두가 한다면 어찌 불가능하겠는가?”라면서 중국인의 행동하지 않는 문제를 꾸짖었다. 셋째는 순수한 학생혁명으로, “조선의 독립운동은 어떠한 다른 힘도 쓰지 않고 오직 학생들의 자각심에 의해서 일어난 가장 순결하고 광명정대한 의거였다”라고 평가했다. 따라서 그는 “관료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학생을 원망해야 하며, 판단력이 없는 완고한 노인들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겉과 속이 다른 신세대를 책망하라”면서 중국의 청년 학생들이 각성할 것을 촉구하였다.  

 

천두슈, 3·1운동 언급하며 자국민 각성 촉구


  2021년 올해는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당이 곧 국가인 중국에서 1921년 중국공산당의 창당은 가장 의미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여겨진다. 그 역사의 중심에 중국공산당 창당의 주역 천두슈(陳獨秀)가 있다. 그는 근대 중국을 대표하는 언론인이자 사상가로 신문화운동과 5·4운동, 중국공산당의 창당 등 중국 근·현대사의 대변혁을 이끈 인물로 평가된다. 

1916년부터 시작된 신문화운동이 문화운동에서 정치운동으로 점차 영역을 확대해갈 무렵, 북경대학(北京大學)의 교수였던 천두슈는 1918년 12월 정치 선전 매체인 『매주평론』을 창간했다. 『매주평론』은 ‘공리(公理)를 주장하고, 강권(强權)을 반대한다’는 발행 취지로, 군벌통치와 일본의 군국주의를 반대하고, 민족자결주의와 러시아 혁명을 지지했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한국의 3·1운동에 대해 중국 매체들 가운데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이유도 『매주평론』의 이러한 정치적 입장 때문이었다.

실제 『매주평론』은 3월분 전체면의 15%를 3·1운동에 관한 내용으로 채웠다. 특히 3월 23일에는 1면 머리기사인 ‘국외의 큰 사건에 대한 평론(國外大事述評)’에서, 3·1운동은 “생기(生氣)와 살기(殺氣)의 충돌이며, 공리(公理)와 강권(强權)의 힘겨운 전쟁이다. 최후의 그날 결국 누가 이기고 누가 질 것인가”라며, 중국인들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한국의 3·1운동은 『매주평론』의 발행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5·4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특히 『매주평론』 3월 23일자에 발표된 천두슈의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감상[朝鮮獨立運動之感想]’은 한국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을 잇는 연결고리로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다. 다음에서 천두슈의 글을 직접 인용해본다. 


이번 조선의 독립운동은 위대하고 간절하며, 또한 비장하다. ‘무력을 쓰지 않고 민중의 의지를 무기로 삼는다’라는 분명하고 정확한 관념을 갖고 있어 세계혁명사의 신기원을 열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찬미하지만 비통해하고, 흥분하고 희망적이지만 부끄러운 온갖 감상에 잠긴다. 


우리는 조선인의 자유사상이 여기에서 계속 발전하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조선민족의 독립과 자치의 광영이 머지않아 실현될 것으로 믿는다. 우리는 조선이 독립한 후에도 지금의 ‘무력을 쓰지 않고 민중의 의지를 무기로 삼는다’는 태도를 지켜나가기를 희망한다. 영원히 한 명의 병사도 모집하지 말고, 한 발의 총탄도 만들지 않는 세계 각 민족의 새로운 결합(나라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의 모범이 되기를 희망한다. (중략)


  조선민족의 활동에 빛이 나니, 우리 중국민족의 병들고 치욕스런 모습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공화국을 세운 지 8년이나 되었는데, 일반 국민들은 여태껏 하루도 정확한 의식적 활동을 한 적이 없다. (중략) 시골의 농민 백성들이 소리 낼 엄두도 못 낼지라도, 부르짖을 줄 아는 명류, 신사, 정객, 상인, 교육계 인사들도 버젓이 스스로 국민의 주인공이라는 자격을 취소하고 제3자로 물러나서 타협한다. 이번 조선인의 활동을 봐라. 무기가 없기 때문에 반항하지 못하니 주인공 자격을 내려놓고 제3자가 되겠다고 했던가? 우리는 조선인과 비교해서 정말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후략)


한국의 3·1운동이 막바지에 접어든 1919년 5월 4일, 중국에서 ‘5·4운동’이 발발했다. 5·4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일본의 21개조 요구와 산동 반도의 이권(利權) 이양(移讓)을 반대하며 북경의 학생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반제(反帝)·반봉건적(反封建的) 애국운동을 말한다. 이후 시민·노동자·상인 등 각계각층이 시위·청원·파업·휴점 등의 방식으로 참여하고, 상해·천진·남경·광주·무한 등 대도시를 중심에 두고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등 한국의 3·1운동과 유사한 전개양상을 보였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