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 Theme 5. 3·1운동에 대한 재한 외국인 선교사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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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만행 고발하며 세계 여론 압박
“만행에 중립 없다”
비폭력 한국혁명에 공감과 지지 선언
글 |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3·1만세시위를 목격한 선교사들 “이날은 이 나라 역사에서 기억할만한 날이다. 전 대한제국 황제이던 이태왕(李太王·고종)이 최근에 죽었으며, 모레는 장례식 날로 예정되었다. 그 장례식은 일본제국의 황족의 자격으로, 국장(國葬)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그 장례식은 신도의식(神道儀式)에 따라 엄수되어질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이에 매우 분노하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장례식이 자기 나라 의식에 따라 치러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례식 때에 서울에서 벌어질 일에 대해 많은 소문이 떠돌고 있다. 고(故) 고종 황제를 애도하는 봉도식(奉悼式)이 이 도시에서 열릴 것이라고 며칠 전에 발표되었다. 한 모임은 숭덕학교(기독교계 남학교), 다른 모임은 감리교회(남산현교회), 그리고 세 번째 모임은 천도교 본부(교구당)에서 각각 열릴 것이다. (중략) 운동장은 3천 명의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우리는 아주 앞쪽의 한쪽 열 옆으로 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의 모든 기독교 학교와 대부분의 공립학교에서 온 학생들이 참석했다.” 그는 이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를 참관하고 이날이 한국 역사에서 기억할만한 날이 될 것을 직감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미북감리회 여선교사 노블 부인(Mattie Wilcox Noble, 1892~1934)도 그의 1919년 3월 1일자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오늘은 한국의 위대한 날이다. 그들의 기쁨이 얼마나 지속될 지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오후 2시, 초등학교에서 중등학교에 이르는 모든 학교들이 일본의 한국 통치에 항거하여 시위에 나섰다. 모두가 행렬을 지어 거리로 나가 양손을 치켜들고 모자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거리의 사람들도 그들과 함께 이 행렬에 가담하여 그런 기쁨에 찬 외침이 온 도시를 뒤덮었다. 나는 긴 행렬 하나가 궁궐 담장 모서리를 지나는 광경을 우리 집 창문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관립 여학교의 학생들도 대열에 합류했다. 이화학당 앞을 지나던 한 무리의 남학생들은 학교 안으로 몰려가 이화학당의 학생들에게 나오라고 했다. 이화학당의 여학생들은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기모노 차림을 한 월터 양(Miss Walter)이 달려와 대문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학생들을 저지했다. 테일러 씨(Mr. Tayler)와 아펜젤러 (Mr. Appenzeller)씨가 월터 양을 도와 학생들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학생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몇몇 남학생들은 몹시 화를 냈으나 결국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선교사들이 이화학당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막은 것은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 그들의 주장에 반대해서가 아니었다. 부산의 일신여학교에서도 호주장로회 여선교사들이 학생들의 시위를 말리려다가 오히려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구류 당했다가 신문을 받고 풀려난 경우도 있었다. 이때 구류 당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일신여학교 교장 데이비스(M. S. Davies)는 그의 진술서 서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일어난 소요에 대한 일을 알고서 이곳에서도 비슷한 시위가 있을 것을 우려하여 우리는 교사들과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을 경고하고, 교칙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우리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어난 어떤 봉기에도 참여하기로 결심하여, 3월 11일 저녁에 오후 8시 반경 그들은 우리를 피해서 그들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중략) 그들이 우리가 다가가는 것을 보자 우리가 가서 그들을 막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우리에게서 도망쳤다. 그들이 빨리 도망하면 도망할수록 우리도 빨리 쫓아가서 마침내 두세 명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한 여학생은 내 말에 순종하여 집으로 돌아갔으나, 다른 여학생들은 말을 듣지 않고 우리 손을 뿌리쳤다.” 한국인들에게 공감하며 동정 나타내 한국인을 대상으로 선교하던 재한 선교사들은 거의 모두가 일제의 비인도적 만행에 분노하고, 한국인들에게 공감하며 동정을 나타냈다. 그리하여 언론이 극도로 일제에 의해서 통제된 상황에서도 상당히 많은 선교사들이 서울에 있는 본국 영사관에는 물론 안식년으로 귀국하는 동료들이나 해외 여행객을 통해서, 또는 직접 중국이나 일본으로 나가서 본국 전도본부와 가족과 친지, 언론사 등에 한국 상황과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편지나 보고서를 보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세계 여론의 압력으로 일제의 만행이 조속히 그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30여 명의 재한 선교사들이 서울에서 한국 상황을 토론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 모인 것은 3월 중순경이었다. 3월 16일에 애비슨 집에서 모인 이 회의에는 귀국길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애비슨의 전보를 받고 급히 다시 내한한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암스트롱도 참여하였다. 이 모임에 참석한 선교사들은 한국에 있는 일본 군대, 경찰, 헌병제도를 ‘독일 기계’라고 부르는 데 동의했다. 그리고 3월 9일에 있었던 총독부 관리들과의 회합 자료를 비롯한 선교본부와 영·미 정부 및 언론사에 전달할 각종 일제의 만행에 관한 진술서들을 주면서 이 사실을 속히 해외에 알리도록 암스트롱에게 부탁하였다. 북장로회 한국선교부 실행위원회에서도 제암리교회 학살·방화 사건이 알려진 직후인 4월 22일부터 24일까지 서울에서 모여 ‘현재 한국독립운동’이라는 제암리 사건을 포함한 「현재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의 초안은 어드만과 쿤스에 의해 마련되었으며, 전체 실행위원회에서 2차례의 심의를 거쳐서 확정하였다. 사본 12부를 만들어 실행위원 각 한 부씩, 2부는 선교본부 브라운 총무에게, 한 부는 서울주재 미국총영사에게 송부하고, 선교본부에 출판 허락을 요청하였다. 이 보고서를 받은 미국총영사 베르그홀쯔도 5월 22일자 국무성에 보내는 공문에 이 문서를 첨부하여 본국에 보고하였다. 이 보고서의 일부는 미국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에서 발행한 『한국의 상황』(The Korean Situation)에도 발췌되어 실릴 정도로 중요한 문서이며, 당시 재한 선교사들의 3·1운동에 대한 인식을 가장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문서라고 할 수 있다. 보고서에서 그들은 한국인들이 요구하는 것은 ‘절대 독립(absolute independence)’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의 독립운동 참여는 개인 자격으로 이루어졌으며, 선교사나 교회, 기독교계 학교와는 무관함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일제의 비인도적인 탄압 방법과 기독교계에 대한 부당한 박해에 대해서도 선교사들이 보내온 보고서와 편지를 발췌하여 실제 사례를 들어 비판하고 있다. 요컨대, 한국인의 독립요구와 평화적 시위 방법은 정당하고, 일제의 식민통치와 비인도적인 탄압 방식은 부당하며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치적 중립을 표방해온 선교사들도 “만행에 중립 없다(No neutrality for brutality)”가 표어가 되어가고 있으며, 일제 당국은 이러한 탄압방식이 국제 여론의 열린 법정에서 견딜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독립운동의 용기·끈기·독창성에 감탄 미북감리회 한국선교부를 책임지고 있던 웰치 감독(Bishop Herbert Welch)도 3·1운동을 목격하고 미국에 건너가 그곳 교계신문인 『The Christian Advocate』에 「1919년 한국 독립운동」이라는 글을 4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여기서 그는 이 운동에서 보여준 한국인의 거족적 참여와 용기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왜냐하면 전체 인구, 고령자에서 초등학교에 있는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이 운동에서 그들의 자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젊고, 늙고, 부유하고, 가난하고, 좋거나 나쁘거나, 교육받거나 무지한 사람들은 주목할 만하고 전례 없는 민족적 통합에 동참한다. (중략) 남자들, 여자들, 심지어 어린 아이들까지도, 그들에게 어떤 처벌이 닥쳐도 감당한 준비로, 위축되지 않고 법의 집행관들과 대면했다. 그들의 용기, 끈기, 독창성, 보여준 조직력은 가장 오래된 선교사(웰치 자신)에게는 놀라운 것이었다.” 3·1운동은 재한 선교사들에게 놀라움 그 자체였으며, 그들은 이것을 ‘한국혁명(Korean Revolution)’ 또는 ‘비폭력 혁명(Passive Revolution)’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