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 3·1절이면 생각나는 사람들
페이지 정보
본문
훼절한 민족 대표들의 구차한 변명
세상사 속속들이 알면 서글퍼지네
글 | 신복룡(전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연행된 민족 대표들은 종로경찰서와 경무총감부, 그리고 경성지방법원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손병희는 “나는 한일 합병에 대하여 별로 찬성이라든가 불찬성도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정춘수는 “나는 본래 한일 합병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차마 이름을 후대에 남길 수는 없지만, “나는 도장을 찍은 적이 없는데, 아마 ○○○가 나를 대신하여 찍은 것 같다”고 대답한 사람도 있다. 한용운은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양한묵은 심문을 받다가 노령과 지병을 견디지 못하고 옥에서 순국했다. 그 밖의 민족 대표들 가운데는 지조를 지킨 분도, 훼절(毁節)한 사람도 있다. 미국의 현대 최고 지성의 한 사람인 촘스키(Noam Chomsky)의 말을 빌리면, “세상사를 속속들이 알고 나면 우리는 늘 마음이 서글퍼진다.”
때는 1919년(기미년) 2월 하순 어느 날, 어스름이 깔리는 안국동 사거리 근처에 한 남자가 땅 밑을 바라보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申哲: 본명 申勝熙)이었다. 그는 발 밑으로 들려오는 어떤 기계 소리를 육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옆 건물인 보성사(普成社)를 바라보았다.
이종일은 곧 천도교 유력자인 최린(崔麟)에게 이 사태를 보고했고, 최린은 신철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최린은 신철에게 민족을 위해 며칠 동안만 입을 다물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최린은 그에게 5천 원을 주며 만주로 떠나라고 권고했다. 당시 쌀 한 가마니의 값이 41원이었다. 일본 측 기록에는 신철이 그 돈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한국 측 기록에는 그가 돈을 받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나갔다고 되어 있다.
최린의 집에서 나온 신철이 입을 다물음으로써 3·1운동의 모의는 비밀이 유지될 수 있었다. 만세 운동 지도부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3월 3일로 예정된 거사를 1일로 앞당겼다. 신철은 현장을 피하여 만주로 출장을 떠났다. 만세 운동이 진압될 무렵인 5월 14일에 서울로 돌아온 신철은 정보를 갖고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경성헌병대에 투옥되었다가, 곧 자살했다.(《매일신보》 1919년 5월 22일자)
그런데 최근에 신승희(신철) 형사의 사망진단서가 발굴되었다. 최우석 독립기념관 연구원이 《한겨레신문》에 제공한 사망진단서에 따르면, 신승희는 1880년(明治 13년) 7월 6일생이었으니까 사건 당시에 39세였다. 그는 1919년(大政 8년) 5월 19일 오후 9시에 종로구 화동(花洞) 132번지에서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살하였으며, 사망진단서의 발급자는 조선헌병대사령부 육군 군의관 미야자키 이나사쿠(宮崎稻作)로 되어 있다. 그의 죽음이 조사를 받고 방면된 다음 날 자택인 것을 보면, 3·1운동의 정보 보고를 하지 않은 데 대한 추궁과 이로 말미암은 압박감으로 일어난 자살 사건임을 알 수 있다.(《한겨레신문》 오승훈 기자)
본래 독립선언서는 최남선(崔南善)이 쓰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장이 너무 어려운 한문 투인 데다가 내용이 온건하다 하여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이 다시 쓸 것을 자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결과 “일본이 금석 같은 맹약을 식(食)하였다 하여 일본의 무신(無信)을 죄하려 하지 않노라”는 식으로 부드럽게 넘어가게 되었다.
태화관은 이완용의 별장이었던 곳
거사 전날인 2월 28일 무렵 지도부는 최종 점검을 하고자 재동 손병희(孫秉熙)의 집에 모였다. 그들은 우선 “유혈 충돌을 피하려고” 자신들은 약속 장소인 파고다공원으로 나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민족 대표들은 어디에서 모일 것인가? 여러 얘기 끝에 당시 장안의 제일가는 요정인 태화관(泰和館)에서 모이기로 했다.
이 요정은 한말에 궁내부 의전국장을 지낸 안순환(安淳煥)이 운영하던 곳으로, 요정으로 문을 열기 전에는 이완용(李完用)의 별장이었다. 이곳은 지난날 주산월(朱山月)이 일하던 곳이었다. 당시 명월관 기생 이난향(李蘭香)의 『회고록』(《중앙일보》 1971년 1월 15일자 「남기고 싶은 이야기: 명월관 편」)에 따르면, 산월은 손병희에게 “몸과 마음을 바친 사이”였다고 한다.
3월 1일 오후 2시, 약속대로 젊은 학생들은 파고다공원에 모였으나 민족 대표들은 보이지 않았다. 「3·1절 노래」에 “기미년 3월 1일 정오”라고 「3·1절 노래」의 가사를 지은 것은 정인보(鄭寅普)의 착오이다. 학생들은 당황했지만, 곧 경신(儆新)학교 출신인 정재용(鄭在鏞)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민족 대표가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자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보성(普成)법률상업학교 학생 강기덕(康基德), 연희(延禧)전문학교의 김원벽(金元璧), 그리고 경성관립의학전문학교 학생 한위건(韓偉健)이 민족 대표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 그때가 오후 3시였다.
그렇다면 이 시간에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2시에 모이기로 한 사람들이 그곳에 거의 모두 모인 것은 오후 3시였으며 숫자는 29명이었다.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4명의 목사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뒷날 그들은 ‘다른 임무’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음식상이 나왔으나 식사를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민족 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배포받아 읽어본 뒤 한용운이 일어나 “무사히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된 것을 경하하며, 더한층 노력하자”는 연설을 한 다음 그의 선창으로 만세 삼창을 했다. 이때가 오후 4시였다.
전화통고설은 입증되지 않아

종래의 관찬(官纂) 기록에 따르면, 경찰이 태화관으로 쳐들어온 것은 민족 대표들이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종로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집회를 통고하도록 했고, 이 연락을 받은 경찰이 달려와 민족 대표를 연행했다고 되어 있으나(원호처, 『한국독립운동사』 2권, 1971, p. 102) 출처가 없다. 아마도 이 기록은 이난향의 회고록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가 과문한 탓인지 이 전화통고설은 어떤 일차 사료로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전화를 정확히 몇 시에 걸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화를 건 것이 사실이라면 경찰이 혈안이 되어 민족 대표의 소재를 찾으려고 2시간이나 헤맸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 엄혹하던 식민지 시대에 일개 요릿집 주인이 종로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독립 운동을 신고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갑성(李甲成)의 「경성지방법원 예심 조서」(4월 28일자)에 따르면, 그는 3월 1일에 집을 나서면서 자기 집에서 일하는 서영환(徐永煥)을 시켜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독립청원서」를 전하도록 하고 집합 장소를 태화관으로 기록했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집에서 부리는 하인”이 조선 총독을 만나 문서를 전하러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통고란 앞서 지적한 것처럼 원초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투항이라는 용어는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 더 이상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하는 행위로서 이 또한 독립운동자들에게는 맞지 않는 용어이다. 그냥 연행되어간 것이다.
훼절(毁節)의 논쟁
연행된 민족 대표들은 종로경찰서와 경무총감부, 그리고 경성지방법원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손병희는 “나는 한일 합병에 대하여 별로 찬성이라든가 불찬성도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손병희에 대한 경성지법 예심 조서」, 4월 10일자)
정춘수는 “나는 본래 한일 합병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정춘수에 대한 검사 조서」, 3월 21일자) 홍병기(洪秉箕)는 “나는 총독부에 독립건의서를 제출하고 그 회답을 기다리면서 건의서를 배포할 목적으로 태화관에 갔다”고 대답했다.(「홍병기에 대한 경찰 조서」, 3월 1일자) 차마 이름을 후대에 남길 수는 없지만, “나는 도장을 찍은 적이 없는데, 아마 ○○○가 나를 대신하여 찍은 것 같다”고 대답한 사람도 있다.
한용운은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일관되게 독립 운동을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양한묵(梁漢默)은 심문을 받다가 노령과 지병을 견디지 못하고 옥에서 순국했다. 그 밖의 민족 대표들 가운데는 지조를 지킨 분도 있고, 훼절(毁節)한 사람도 있다. 미국의 현대 최고 지성의 한 사람인 촘스키(Noam Chomsky)의 말을 빌리면, “세상사를 속속들이 알고 나면 우리는 늘 마음이 서글퍼진다.”
※ 이 글은 편집자의 양해를 받아 필자의 글 [잘 못 배운 한국사](서울 : 집문당, 2022)의 일부를 재구성하여 옮긴 것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