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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사랑방 [2022/12] 한 해 마무리 섣달그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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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썹세는 날’이라 불리는 섣달그음 세시풍속


아이들 신발은 슬쩍 감춰두고

‘담치기’로 어려운 이웃 돌봐요


글 | 김영조(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호랑이해인 2022년 임인년(壬寅年)의 마지막 달인 12월, 이달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섣달그믐 곧 ‘설밑’이 있는 달이다. 전통적인 섣달그믐이야 음력으로 따져야 하겠지만, 요즘은 양력 12월을 한 해를 마무리하는 해로 여기고 있으니 이번 호에는 섣달그믐의 풍속을 살펴보기로 한다. 

섣달그믐을 달리 일러 ‘눈썹세는 날’이라고도 한다. 조선후기 권용정(權用正)이 쓴 《한양세시기(漢陽歲時記)》에 보면 “어린아이들에게 겁주기를 ‘섣달그믐날 밤에 잠을 자지 말아야 한다.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얘진다.’라고 했는데, 아이들 가운데는 이 말을 그대로 믿어서 새벽이 될 때까지 잠을 자지 않는 일도 있다.”라고 했다. 또 19세기 중엽 김형수(金逈洙)가 쓴 《소당풍속시(嘯堂風俗詩)》에도 “나이 더한 늙은이는 술로써 위안 삼고 눈썹 셀까? 어린아이 밤새도록 잠 못 자네.”라고 하였다. 여기서 ‘눈썹 세는 날’이란 말이 비롯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예전부터 우리 겨레는 음력 섣달그믐날 밤에 방이나 마루, 부엌, 다락, 뒷간, 외양간에 불을 밝게 밝히고 잠을 자지 않았다. 그 유래는 도교(道敎)의 경신수세(庚申守歲)에서 왔는데 도교에서는 60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경신일이 되면 사람 몸에 기생하던 삼시충(三尸蟲)이 사람이 잠든 사이에 몸을 빠져나와서 옥황상제에게 가서 지난 60일 동안의 잘못을 고해바쳐 수명을 단축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밤에 잠을 자지 않고 깨어있으면 삼시충이 몸에서 빠져나가지 못함으로써 옥황상제께 자신의 죄가 알려지지 않아 오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섣달그믐의 세시풍속에는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담치기’가 있었다. 아이들이 풍물을 치고 다니면 어른들이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을 부대에 담아준다. 그렇게 걷은 곡식은 노인들만 있거나 환자가 있거나 가난하여 명절이 돼도 떡을 해 먹을 수 없는 집을 골라 담 너머로 몰래 던져주었다. 이 ‘담치기’는 이웃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해야 그해 액운이 끼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입춘의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이나 밭뙈기 하나도 없는 가난한 집에서 십시일반으로 곡식을 내어 마을 어른들을 위해 잔치했던 입동의 ‘치계미(稚鷄米)’와 함께 우리 겨레에게 이어져 오던 아름다운 풍속이었다. 지난 3년은 돌림병 코로나19 탓으로 사람들은 유난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또 10월 29일에는 서울 한복판 이태원에서 많은 젊은이가 희생된 참사가 일어나 온 국민이 가슴 아픈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때의 설밑에 ‘담치기’ 정신으로 서로 어려움을 나눠 가지면 좋을 일이다.

잡귀를 쫓는
나례(儺禮)와 처용무(處容舞)

지난 6월 국립국악원 무용단은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정기공연 ‘신(新)궁중나례’를 선보였다. 무용단은 조선시대 궁중나례의 의미를 담아 코로나19를 끝내고 희망의 시대를 비손하는 마음으로 연희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선보이는 새로운 궁중나례를 무대에 올린 것이다.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그믐 전날, 어린이 수십 명을 모아서 붉은 옷과 두건을 씌워 궁중에 들여보내면 그믐날 새벽에 관상감에서 북과 피리를 갖추고 방상씨(方相氏, 탈을 쓰고 잡귀를 쫓는 사람)와 함께 잡귀를 쫓아내는 놀이 곧 ‘나례(儺禮, 나희儺戱)’를 했다. 또 나례 때는 ‘처용무(處容舞)’를 춘다. 처용무는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지었다는 8구체 향가 ‘처용가’를 바탕으로 한 궁중무용이다.

처용가는 “서울(도읍지 금성, 현재 경주) 밝은 밤에 밤늦게 노니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도다. 둘은 나의 것이었고,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오?”라고 노래한다. 

《삼국유사》의 <처용랑·망해사> 조에 보면 동해 용왕(龍王)의 아들로 사람 형상을 한 처용(處容)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 천연두를 옮기는 역신(疫神)으로부터 인간 아내를 구해냈다는 설화가 있다. 그 설화를 바탕으로 한 처용무는 동서남북 그리고 가운데의 오방(五方)을 상징하는 흰색·파랑·검정·빨강·노랑의 옷을 입은 다섯 명의 남자가 춘다. 처용무의 특징은 자기의 아내를 범하려는 역신을 분노가 아닌 풍류와 해학으로 쫓아낸다는 데 있다. 춤의 내용은 음양오행설의 기본정신을 기초로 하여 액운을 쫓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춤사위는 화려하고 현란하며, 당당하고 활기찬 움직임 속에서 씩씩하고 호탕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처용무는 통일신라에서 고려 후기까지는 한 사람이 춤을 추었으나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다섯 사람으로 구성되었고, 성종(재위 1469∼1494) 때에는 더욱 발전하여 궁중의식에 사용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어 오다가 1920년대 말 이왕직 아악부가 창덕궁에서 공연하기 위해 재현한 것을 계기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는 가면과 옷·음악·춤이 어우러진 수준 높은 무용예술로, 춤사위나 반주음악 또는 노래에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그 맥을 즈믄 해(천년)가 넘게 이어오고 있는 예술성이 풍부한 춤이다.
또 그믐날 이른 새벽에는 처용(處容), 각귀(角鬼), 수성노인(壽星老人), 닭, 호랑이 등과 같은 그림을 궁궐문과 집 문에 붙여 잡귀를 쫓는다고 하는데, 이것을 문배(門排) 또는 세화(歲畵)라고 부른다.

까치설날과 
양괭이귀신 물리치기

섣달그믐을 까치설날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소지왕 때 왕비가 한 스님과 내통하여 임금을 해치려 하였는데 까치[까마귀]와 쥐, 돼지와 용의 인도로 이를 모면하였다. 그런데 쥐, 돼지, 용은 모두 ‘12지(十二支)’에 드는 동물이라 기리는 날이 있지만, 까치는 기릴 날이 없어 설 바로 전날을 까치를 기리려고 까치설이라 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옛날 섣달그믐을 작은설이라 하여 ‘아치설’ 또는 ‘아찬설’이라 했는데 이 ‘아치’가 경기지방에서 ‘까치’로 바뀌었다고도 전한다. 음력 22일 조금(밀물·썰물의 차이가 가장 낮은 때)을 다도해 지방에서는 ‘아치조금’이라 하지만 경기만 지방에서는 ‘까치조금’이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동국세시기》에 있는 재미난 세시풍속은 ‘양괭이귀신(야광귀-夜光鬼) 물리치기’다. 섣달그믐 양괭이귀신은 집에 와서 아이들의 신발을 신어 보고 발에 맞는 것을 신고 가버리는데 그러면 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믿어, 신을 감추거나 뒤집어 놓았다. 그런 다음 가루를 곱게 치거나 액체를 거르는 데 쓰는 기구인 체를 벽이나 장대에 걸어놓고 일찍 잠을 잔다. 이때 양괭이귀신은 구멍이 많이 뚫린 이상한 모양을 한 물건을 보고 신기해서 구멍을 하나둘 세다가 새벽이 되면 물러간다고 믿었다.

섣달 그믐밤을 밝혔던 남포등 

예전엔 밤이 되면 등잔불을 켜놓고 책도 읽고 바느질도 했었다. 그 등잔불은 호롱불이라고도 했다. 그러다가 조선말에 ‘남포등’이란 것이 들어왔다. 남포등은 원래 네덜란드에서 만들어 휴대용으로 쓰였던 램프(lamp)인데 이것이 일본을 통해 들어오면서 lamp → ランプ(람뽀) → 남포가 된 것이다. 남포등은 석유램프, 석유등, 양등(洋燈), 호야등으로도 불렀다. 남포등은 등잔불보다 더 밝고 편리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을음이 많아 자고 나면 콧구멍에서 검댕이 나올 정도였다. 특히 불을 좀 더 환하게 하려고 심지를 지나치게 올리면 그을음은 더 심해졌다. 또 그을음이 남포등 유리에 붙으면 불빛이 침침해지는 바람에 아침마다 그 유리를 닦는 것도 중요한 일과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남포등의 유리가 워낙 얇아서 잘 깨지니 조심조심해서 닦아야 했다. 아들 녀석이 효도한답시고 남포유리를 힘있게 닦다가 유리가 깨지기라도 하면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는 일도 허다했다.

이 남포등을 어떤 이는 과시용으로 쓰기도 했는데 어두운 밤에 걸어두는 남포등은 옆집이나 뒷집에서도 훤히 보였다. 그래서 돈 좀 있다 하는 집들은 방마다 남포등을 걸어두는 것이 유행이었다. 특히 섣달 그믐밤에는 이 남포불을 환하게 켠 채 새해를 맞기도 했다. 

연말에 나누는 쌀 한 홉의 사랑

“회양군 난곡면 해동의원장 이일재 등은 평소부터 다대한 자선사업을 하여 왔으며 지난 섣달그믐을 맞이하여 동리의 극빈자들에게 백미 한 말과 정육 한 근을 분급하였다”, “함경남도 풍산경찰서 직원 일동은 풍산군내의 다수의 기민(饑民,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코저 자금을 모아 위선 읍내에 가난한 집 10여 호에 백미를 배급하였는데 이후로는 지방 인사들과 협력하여 대대적으로 구제책을 강구하리라 한다.” 이는 1934년 2월 15일 동아일보 기사다. 당시에는 일제강점기인지라 총독부 방침으로 양력을 썼으나 사람들은 음력을 기준으로 설밑에 이웃을 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경성부내 서대문 1정목에 있는 구세군 본영에서는 며칠 남지 않은 음력설을 앞두고 제3차로 마을 사람들 1,050명에게 설명일(설명절)에 한 끼의 밥이라도 지어 먹게 하기 위해 이날 오후 2시 30분부터 본영 앞마당에서 백미 20가마니를 가지고 1인당 1승(1되) 내지 2승을 분배해 주었다.” 이는 1935년 2월 3일 동아일보 기사다. 음력이 되었든 양력이 되었든 연말이 되면 이렇게 우리 겨레는 이웃에게 따뜻한 밥 한 끼라도 챙길 줄 아는 아름다운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자랑스럽다.

섣달그믐은 한 해를 정리하고 설을 준비하는 날이다. 그래서 집 안 청소와 목욕을 하고 설빔도 준비하며, 한 해의 마지막 날이므로 그해의 모든 빚을 청산한다. 곧 빚을 갚고, 또 빚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다. 그해 빌린 돈이나 빌려온 연장과 도구들을 꼭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 밖에 남은 밥을 모두 먹고, 바느질 등 그해에 하던 일을 이날 끝내야만 했다. 이러한 것들은 묵은해의 모든 일을 깨끗이 정리하고, 경건하게 새해를 맞이하기 위하여 생겨난 풍습들이다. 

필자 김영조 
2000년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2011년 한국문화사랑협회를 설립하여 한국문화를 널리 알리고 있다. 또한, 2015년 한국문화를 특화한 국내 유일의 한국문화 전문지 인터넷신문 <우리문화신문>을 창간하여 발행인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맛깔스런 우리 문화 속풀이 31가지》, 《하루하루가 잔치로세(2011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종가》, 《아름다운 우리문화 산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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