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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우리땅 [2023/01] 장엄한 역사의 흔적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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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품에 안고 싸운 독립군의 뜨거운 숨소리


매서운 겨울 칼바람에 맞서는 

나목들의 웅장한 외침을 듣다


글 | 편집부  사진 | 한국관광공사·국립공원공단 


화려한 단풍이 지고 마른 잎마저 떨어져 앙상해진 나목들…. 겨울이 깊어가는 지리산을 걸으며 온몸으로 칼바람에 맞서는 나목들에 연민을 느낀다. 그러다 문득, 짙은 녹음에 가리어졌던 산길이 마침내 드러났음을 깨닫는다. 지리산에 숨어들었던 독립군들은 벌거숭이가 된 겨울 산에서, 모든 움직임이 포착되는 이곳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겠구나. 조국을 품에 안고 나목들 사이사이로 숨죽이며 뛰어다녔을 뜨거운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지리산, 그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웅장해진다. 지리산에서 연을 맺고 생명이 태어나고, 이루지 못한 사랑이 지리산에서 끝내 죽음을 맞이하고, 조국을 위해 횃불을 들고 일제의 총칼에 맞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대하소설 속 장면들이 지리산 골짜기, 비탈길마다 비장한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는 듯하다. 그런 까닭에 노란 산수유, 붉은 단풍으로 곱게 물든 절경의 계절보다 나목들이 칼바람에 우짖는 겨울의 지리산을 더 좋아하게 됐다. 


어머니 품속 같은 명산


지리산은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초 국립공원이다. 1967년 12월 29일 지정되었으니 반세기가 훌쩍 지났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한반도 삼신산(三神山)으로 손꼽혔다. 신라의 오악, 조선의 사악, 대한제국의 오악으로 지정되어 제사를 받는 등 고대부터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덕분에 많은 이들이 지리산을 “어머니 품속 같은 산”이라며 깊은 애정을 표한다. 요즘도 영화·드라마·소설 속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지리산은 ‘지혜를 주는 산’이라는 뜻을 가졌다. 경남의 하동·함양·산청, 전남의 구례, 전북의 남원 등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 483.022㎢의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둘레가 320여 km나 되는 지리산에는 수없이 많은 봉우리가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20여 개의 능선 사이로 계곡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동과 서, 영남과 호남이 서로 만나는 특별한 장소이기도 하다. 


역사의 격변기마다 많은 이들이 지리산 산속으로 찾아들어 목숨을 걸고 싸웠다. 동학농민혁명이 치열하게 펼쳐진 현장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수많은 독립군이 지리산을 근거지로 항일투쟁을 벌였다. 지리산 자락을 이용해 경상남도 서부, 전라, 충청을 넘나들며 게릴라식 전투가 펼쳐졌다. 식민지 치하 억압받고 고통받는 민중들은 지리산이 내어준 안식처에서 생을 이어갔다. 나라 잃은 한민족에게 끊임없이 희망과 용기를 북돋웠다. 


지리산 독립군, 

그 의로운 넋이여


을사늑약 이후인 1907년부터 1915년까지 지리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운 민중은 1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항일 투사 3천 명 이상이 이곳에서 순국했으나 정확한 역사적 사실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 150여 명만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정부 서훈을 받았다. 


독립군은 하동 쌍계사와 칠불사, 산청 법계사 등 지리산 일대 3개 사찰을 주요 근거지로 삼아 게릴라전을 펼쳤다. 일본인이 숙박하는 집과 경찰서를 습격해 불태웠으며, 일본군 수비대와 수십 차례 교전해 큰 피해를 줬다고 기록돼 있다. 


이를 기리는 ‘지리산항일투사기념탑’이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취간림에 세워져 있다. 1908년 1월 박매지가 이끄는 의병대가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현장으로, 항일투사 300여 명이 이곳에서 전투를 치러 80명이 전사했다. 지난 2008년 건립된 기념탑은 1907년부터 1915년까지 지리산 일대에서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인 전국 1만 무명 항일의병과 행적이 뚜렷한 하동 출신 의병 13명을 기리고 있다.


기념탑 왼쪽에는 일본군 위안부로 한 많은 삶을 살아간 고 정서운 할머니를 추모하는 평화의 탑이, 오른쪽에는 한국전쟁이 일깨워준 전쟁의 폭력성을 되새기게 하는 민주·자유·평화의 상이 함께 서 있어 아픈 역사를 일깨운다. 


피로 물든 지리산 피아골


폭포·담소(潭沼)·심연이 계속되는 계곡미가 뛰어나 지리산 10경(景)의 하나로 꼽히는 지리산 피아골에는 뜨거운 근현대사가 켜켜이 쌓여있다. 임진왜란,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한말 의병전쟁 때 결전의 현장이었고 한국전쟁 직후에는 빨치산과 토벌대의 치열한 접전이 수없이 벌어졌었다. 그때 죽어간 사람들의 피가 골짜기마다 붉게 물들었기에 피아골이라고 붙여졌다고도 하며 그들의 넋이 나무마다 스며들어 피아골의 단풍이 유난스레 붉다고도 한다. 실제 피아골이라는 지명은 예로부터 이 지역에서 피를 많이 가꾸었기 때문에 ‘피밭골’이라고 부르다가 피아골이 되었다. 


피아골 길목에 연곡사가 있다. 그 연곡사에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서 서희 할머니 윤씨부인은 불공을 드리러 갔다. 그곳에서 동학접주 김개주를 만난 윤씨부인은 아이를 배고 구천(김환)이를 낳는다. 구천이는 김개주의 형인 우관스님의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이복형인 최치수의 아내 별당아씨와 사랑에 빠져 지리산으로 숨어든다. 최치수가 구천이와 별당아씨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가슴 졸였던가.


연곡사에서 1시간 남짓 오르면 깎아지른 암벽에 세워진 사성암이 나온다. 경관이 뛰어나 소금강이라 불렸다한다. 구례 오산 사성암 일원은 1984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3호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대한민국의 명승 제111호로 승격되었다. 가는 길에 수많은 돌탑이 저마다의 소원을 품고 있다. 


오산 사성암을 내려오면 구례 섬진강 강가에 색다른 풍경을 자아내는 대나무숲길이 있다. 일제강점기 사금 채취로 인해 섬진강 강변 모래밭이 많이 유실되어 해마다 여름철만 되면 강 주변의 마을들이 물난리를 자주 겪었던 곳이었다. 이를 막고자 주민들이 대나무를 하나둘씩 갖다 심은 것이 점점 모여 지금의 대나무숲 군락지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 속에도 푸르름을 간직한 대나무숲은 존재만으로도 매우 특별하다. 


​노고단에서 

새로운 해를 맞이하다


지리산 노고단으로 향하는 길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천은사에서 성삼재휴게소로 이어지는 길과 휴게소에서 노고단대피소로 이어지는 길, 그리고 노고단에서 화엄사로 이어지는 길이다. 겨울에는 천은사에서 시작해 노고단으로 향하는 길이 가장 안전하다. 


천은사 경내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인 극락보전을 비롯해 아미타후불탱화, 괘불탱, 금동불감 등 여러 가지 보물이 있다. 천은사를 지나 성삼재로 향하는 길에 삼일암, 도계암, 수도암, 상선암 등 산내 암자들이 자리한다. 천은사에서 성삼재휴게소까지는 총 10km 구간으로 걸어 올라갈 때는 3시간 반, 내려올 때는 2시간 반 정도 걸린다.


해발 1,102m 성삼재는 삼한시대에 성이 다른 세 장군이 지켜낸 고개라는 뜻을 지녔다. 주차장과 휴게소, 전망대가 조성되어 있고, 등산용품 판매점과 커피 전문점도 자리한다. 노고단 탐방로 안내소가 있어 등산객들의 안전장비를 점검하고, 등산 시 주의사항 등 정보를 제공한다. 


성삼재 방향으로는 노고단 정상이 올려다보이고, 아래로는 구례군의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성삼재 주차장에서 노고단 고개까지는 1시간 정도 소요된다. 노고단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를 국모신으로 모시고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면서 노고단으로 불리게 되었다. 노고는 순우리말로 ‘할미’라는 뜻이다. 


노고단에서 새로운 해를 바라보며 조지훈의 시 ‘새아침에’를 읊조린다. 성진(星辰)의 운행만은 변하지 않는 법도를 지니나니/ 또 삼백예순날이 다 가고 사람 사는 땅 위에/ 새해 새아침이 열려오누나./ (중략) 굽이치는 산맥 위에 보랏빛 하늘이 열리듯이/ 출렁이는 파도 위에 이글이글 태양이 솟듯이/ 그렇게 열리라 또 그렇게 솟으라/ 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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