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Inside

잊혀져가는 역사를 다시 생각한다 [2023/01]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성지를 찾아서 . 신흥무관학교 터

페이지 정보

본문

후손 대대로 물려주어야 할 역사정신의 보고(寶庫)  


우리가 간직해야 할 

가장 위대한 역사의 힘 


글 | 안상경(중국 선양시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 소장) 


독립전쟁 3대 대첩으로 불리고 있는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대전자령전투의 유적지 등의 발굴작업은 광복 77주년을 넘긴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항일독립전쟁의 주요 사적지 신흥무관학교, 대한통의부, 광복군 사령부, 조선혁명군 전적지, 참의부 고마령 전투지, 한국독립군 주둔지 및 전적지 등 수많은 유적지 역시 방치, 훼손, 멸실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전쟁 역사는 경술국치 이후 35년 동안 끊임없이 전개되었던 항쟁의 기록으로써 후손 대대로 물려주어야 할 역사정신의 보고(寶庫)이다. 

중국 길림성 통화현(通化县) 광화진(光华镇) 광화촌(光华村)! 마을 지명이 ‘빛(光)’과 ‘꽃(華)’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만큼 주변 풍광이 빼어나다. 하지만 산과 강이 사방을 두르고 있어 외부인의 접근이 쉽지 않다. 읍내라고 할만한 곳에는 10여 개의 식당이 있다. 그런데 문을 열었는지 닫았는지, 열어놓은 식당마저 닫아놓은 식당처럼 스산하다. 이곳에서 광화진의 책임자와 바이주(白酒)를 몇 순배 돌려 마셨다. 그를 만나기 위해 애를 썼다. 무턱대고 만나면 헛수고일 게 뻔하니, 이런저런 “꽌시(關係)”를 동원하여 어렵사리 줄을 댔다. 그리고 마법 같은 바이주의 도움으로 금시에 호형호제했다. 

“광화촌의 땅을 사고 싶습니다. 1,000여 평의 임지를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충분히 사례하겠습니다.” 그러자 책임자가 받아쳤다. “왜 굳이 그 궁벽한 곳의 땅을 사려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처음 부임했을 때, 그 인근 야산에 올라 교육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100년 전에 조선인 군사학교가 있었는데, 졸업생들이 성장하여 남한과 북한에서 공히 장군이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 땅값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한데 그곳의 땅을 사려면 우리 진의 발전을 위해 100억 원 이상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도와드리겠습니다.” 나는 애꿎게 바이주만 들이키며 시시껄렁한 얘기만 나눌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사려고 했던 땅은 신흥무관학교 터였다. 

오인한 역사 속 장소, 
그러나 진짜 장소는 산골짜기에

중국으로 자리를 옮긴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이다. 어느 날 조선족 재야학자가 나들이를 가잔다. 신흥무관학교 터를 둘러보자는 것이었다. 그러잖아도 궁금하던 터라 선뜻 응했다. 그렇게 통화현(通化县) 합니하(哈泥河)로 향했다. 이곳은 1912년에 유하현(柳河縣) 추가가(鄒家街)에서 개교한 신흥강습소를 이전하여 확대한, 즉 만주지역에서 독립군을 본격적으로 양성한 항일무장투쟁사의 성지였다. 그러나 100년 전의 일이라 흔적은 찾을 길 없다. 그래도 역사적 실재야 우리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가? 나는 블루베리 농장으로 변한 들판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했을 그때의 생도들을 상상했다. 이곳에 서 있는 그 자체가 감격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감격은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15세 최연소 나이로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김산(본명 장지락)이 합니하로 이전한 신흥무관학교의 모습을 달리 그려놓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합니하에 있는 조선독립군 군관학교, 이 학교는 신흥학교(新興學校)라고 불렀다. 아주 신중한 이름 아닌가! 하지만 내가 군관학교에 들어가려고 하자 사람들은 겨우 15살밖에 안 된 꼬마였던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최저 연령이 18살이었던 것이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서 엉엉 울었다. 마침내 내 기나긴 순례여행의 모든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자 학교측은 나를 예외적인 존재로 취급하여 시험을 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학교는 산속에 있었다. 18개의 교실로 나뉘어 있었는데,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산허리를 따라 줄지어 있었다. 18살에서 30살까지의 학생들이 100명 가까이 입학했다. (중략) 우리는 군대 전술을 공부했고 총기를 가지고 훈련받았다. 그렇지만 가장 엄격하게 요구되었던 것은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 게릴라 전술, (중략) 한국의 지세, 특히 북한의 지리에 관해서는 아주 주의 깊게 연구했다. 그날을 위해 나는 방과 후에 국사를 열심히 파고들었다. 

얼마간의 훈련을 받고나자 나도 힘든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으며 그러자 훈련이 즐거워졌다. (중략) 새벽 6시 기상 나팔소리에 전교생이 연병장에 나가 체조를 하고 아침식사 후 조례에 나가 애국가, 독립군 용진가 등을 불렀다.
- 님웨일즈, 『아리랑』 중에서

신흥무관학교 터는 내가 섰던 그 자리, 즉 블루베리 농장이 아니었다. 1976년에 원병상(元秉常, 제1기 졸업생이자 교관으로 활동)이 회고한 글에서도 관련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흥무관학교는 합니하에서 북쪽으로 깊은 산골짜기에 있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고 산허리를 따라 18개의 교실을 듬성듬성 마련했다. 줄지어 왕복 4km에 달하는 거리였다. 외부인의 시선을 차단하는 것은 물론 게릴라전을 대비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산을 재빨리 오를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도 신흥무관학교 터가 들판이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흥무관학교 터는 어디인가? 합니하와 엉켜 있는 드넓은 산속에서 그곳을 어떻게 비정할 수 있을까? 

생도들이 마셨다던 우물, 
그러나 1950년대 이후에 조성

합니하를 방문한 지 몇 달 후, 조선족 재야학자에게 전화가 왔다. 들뜬 목소리였다. ‘합니하 인근에 고려관자(高麗館子)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조선식 옛 우물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이 오가다가 마셨을 법하다’는 것이었다. 또 솔깃했다. 다시 한번 나들이 삼아 합니하로 향했다. 그리고 마을 한 귀퉁이에서 실제로 우물을 발견했다. 중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조선식 두레우물이었다. 마을의 지명도 ‘고려여관이 있던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하니, 인근의 여느 지역에 비해 신흥무관학교와 어떤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단정할 수 없었다. 일단 마을 원로들에게 묻기로 했다. 원로들은 이방인의 질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는 게 안쓰러웠는지 명쾌하게 답을 주었다. 첫째, 고려관자촌은 원래 광화진 정부(광화진 사무소)에서 북쪽으로 3~4km 떨어져 위치했다. 100여 년 전부터 그곳에 조선인들이 거주했는데, 1950년대 들어서 마을이 사라졌다. 둘째, 현재 고려관자촌은 옛 고려관자촌에 살던 조선인들이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이지만, 지금은 한족 15가구만 거주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고려관자촌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11대대라고 부르고 있다. 

고려관자촌의 두레우물은 1950년대, 즉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된 지 30여 년이 지나서 조성한 것이었다. 조선인들이 사용하던 것은 맞지만,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이 오가다가 마신 것은 아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 애초 큰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스스로 위로했다. 그래도 먼 길을 달려왔으니, 전에 관계를 맺고 호형호제했던 광화진 책임자와 식사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얼마간 기다려 어느 식당에서 책임자를 만났다. 우리는 그때처럼 몇 순배의 바이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다시 마법에 이끌려 엑스터시 상태로 돌입했다. 그러자 그가 포문을 열었다. “나는 경찰로 공무를 시작했습니다. 광화진으로 발령을 받고 지역의 역사나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합니하 인근의 북쪽 산에 올랐던 적이 있습니다. 어느 물구덩이에 당도했는데, 당시 교관이 그 물구덩이를 가리키며 신흥무관학교에서 사용하던 마구간이라고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술기운을 빌려, 내가 찾는 답의 힌트를 준 것이었다. 신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혹 그곳으로 안내해 줄 수 있느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그럴 수 없습니다.”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이에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신흥무관학교의 교관과 생도들이 삽과 곡괭이로 고원지대를 평지로 만들었다. 20여 리 좁은 산길을 따라 돌을 나르는 노역이었다. 3개월 후 4개 학년별로 널찍한 강당과 교무실을 마련했다. 교사(校舍)는 전체 18개로 산허리를 따라 줄지어 정렬했다.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내무반에는 사무실, 숙직실, 편집실, 나팔반, 식당, 취사장, 비품실을 갖추었다. 행랑 아래에는 생도의 이름을 부착한 총가(銃架)를 별도로 설치했다. 유하현 추가가의 허름한 옥수수 창고와 비교할 수 없는 명실상부한 군사학교의 면모였다. 그러나 흔적을 찾을 길이, 오늘날은 묘연하다. 설령 찾는다 해도, 자그마한 기념비조차 세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10월, 정계 인사를 주축으로 국가유공자, 의병선양회, 전통무예인 등 500여 명이 남산 예장공원에서 신흥무관학교 재개교식을 거행했다. 신흥무관학교의 설립 정신을 계승할 목적으로, 온·오프라인 교육을 통해 애국정신을 함양한 글로벌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보건대, 신흥무관학교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니 때를 놓쳐, 그 누군가 그 어떤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되기 전에, 신흥무관학교의 실체 파악에 대한 관계기관의 관심이 확산하기를 바란다. 어느 개인이 실천하기에는 더 없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 안상경 
충북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문화콘텐츠학박사 학위를 복수 취득했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문화자원센터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했고,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충북대학교 교양학부에서 초빙교수로 재직했다. 현재는 중국 선양시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소장을 역임하며, 한·중 문화교류 연구 및 관련한 문화산업을 추진하고 있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