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Inside

순국선열 역사기행 [2023/01] 홍매화 여행길에서 만난 단재 신채호 선생

페이지 정보

본문

기미독립선언서를 찢어버리고

붓끝의 힘과 폭탄의 힘을 합하다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신채호 선생은 어째서 최남선의 기미독립선언서를 찢어버리기까지 했을까? 기미독립선언문이 민초들의 고통과 일본의 술수와 태도를 통찰하지 못한 탁상공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직시했기 때문이었을까?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서 논설위원과 주필로서 그 당시 세태와 현실을 가장 심각하게 직시하고 있는 통찰력과 현실감각의 신채호 선생의 촉(觸)에는 최남선의 명문(名文)이 피지배 민족의 나약한 몸짓으로 보였을까?  


몇 년 전 통도사 홍매화를 보고 싶은 마음에 경남 양산시를 찾아갔다. 꽃샘바람이 아직 쌀쌀한 햇살 밝은 통도사 하늘. 먹색 기와 지붕과 오색 단청. 파란 하늘에 해맑은 구름. 거기에 풍경을 더하고 있는 홍매화의 어우러짐. 색깔 잔치를 하고 있는 둣한 황홀경이다. 통도사의 절 풍경도 그윽하다. 매화 향이 절 마당에 가득한 느낌이다. 정신을 잃을 듯한 전율이 느껴진다. 매화가 이토록 아름다울수도 있구나! 봄 잔치의 흐드러진 매화봉오리와 꽃잎을 스치는 봄바람. 그냥 좋았다. 사진기를 누르느라 정신없었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양산시 옆에 밀양으로 가보자는 의견이다. 


국적을 빼앗긴 이들의 

처절하고 숨 막히는 유혈 투쟁


밀양. 밀양아리랑으로 알려진 곳이리라. 발음하기도 좋은 미음, 리을, 이응의 흐름이 기분 좋게 흐른다. ‘밀양’을 생각하며 45분쯤 달리는 동안, 여러 이름들이 머리를 스친다. 김원봉, 박차정 등…. 아마도 약산 김원봉이 밀양 사람이라서 이곳에 ‘의열기념관’을 세웠나보다. ‘의열단’을 만들어 의열 투쟁 독립운동에 최 첨봉에 서 있었던 분. 


일제 강점기 때, 치열하게 의열 투쟁을 벌였던 당시의 처절함이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 복 많은 세대에 태어난 우리들. 기념관에서 전시물들을 둘러보았다. 아픈 마음이다. 마음이 가라앉는다. 45분여 전에 통도사에서 보았던 봄 풍경이 이곳 전시실 풍경과 겹치면서 아찔한 느낌이 든다. 외면하고 싶은 전시물들. 그러나 홍매화의 매력에 빠지는 것만큼, 역사를 직시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아 본다. 여러 전시물을 둘러보던 중, 단재 신채호 선생이 쓰셨다는 ‘조선혁명선언문’이 눈에 뜨인다. 


일제 강점기 때, 2가지의 독립선언문이 있었다. 최남선이 기초한 기미독립선언문과 신채호 선생이 쓴 조선혁명선언문이다. 민족대표 33인 중에 한 분이었던 육당 최남선이 썼다는 기미독립선언문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1919년 당시의 남녀노소를 격양시키는 명문(名文)이어야 했다. 전국적인 만세 운동으로 번지게 만든 단초였다.


“정의라는 군사와 인도라는 무기로써…”와 같이 “인도주의”를 주장한다. “병조수호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다.”와 “일본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다”고 했다.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남을 시새워 쫓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로다.”고 했다. 미온적인 표현이다. “평화적으로 독립을 얻겠다”는 것이었다. 


3·1 만세 때, 무기가 아닌 태극기를 들고 만세 운동을 하는 민중에게 일제는 총을 쏘아대었다. 무기를 들지 않은 민간인들에게 가한 살상(殺傷)을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만세 운동으로 인해 사살되거나 부상을 당하고, 투옥되어 고문당한 이들이 얼마나 많을지는 내다보지 못한 종이 위에 검은 글씨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3·1운동 참가 인원은 200여만 명이고, 희생자는 7천 509명이다. 우리는 최남선의 ‘기미독립선언서’를 국어 교과서에서도 배웠다. 국한문혼용체라서 한자 풀이하느라 고생스러웠다. ‘비폭력’, ‘무저항’ 정신이라고 배웠던 기억이 있다. 


주권과 영토를 빼앗기고 그간의 약탈과 강압과 위압 속에서 고통당했던 국민의 압통이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신채호 선생은 기미독립선언서를 읽고 찢어버렸다는 내용을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시대에 3대 문장가라는 최남선, 홍명희, 신채호 선생. 신채호 선생은 어째서 최남선의 기미독립선언서를 찢어버리기까지 했을까? 기미독립선언문이 민초들의 고통과 일본의 술수와 태도를 통찰하지 못한 탁상공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직시했기 때문이었을까?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서 논설위원과 주필로서 그 당시 세태와 현실을 가장 심각하게 직시하고 있는 통찰력과 현실감각의 신채호 선생의 촉(觸)에는 최남선의 명문(名文)이 피지배 민족의 나약한 몸짓으로 보였을까? 


기미독립선언서 밖에 배우지 못한 우리들은, 신채호 선생이 ‘조선혁명선언서’를 썼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지 않은가? 우리들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지 않는가? 관심 없는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으니…. 그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생존을 위협받는 일, 국적을 빼앗긴 이들의 처절하고 숨 막히는 유혈 투쟁이었으나….


요즘은 유리관 안에 전시된 전시물밖에 되지 않는다. 이미 저버린 홍매화 꽃잎처럼. 


아니다. 그들의 피끓는 전투를 꽃잎에 비유하는 것은 가벼운 감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무거운 비유로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질 않는다. 그 시대 태어나보지도 겪어보지도 목격한 일도 없는 까닭에, 우리 현대인들은 영화 ‘봉오동 전투’, ‘박열’, ‘암살’이나 ‘아나키스트’ 등의 영화 속에서나 마음 졸이며 애국심 한 조각을 태우고 있다.


강도 일본 물리칠 방법은

폭력적 방도밖에 없음을 천명


밀양의 ‘의열기념관’에서 몇 년 전에 보았던 신채호 선생의 ‘선언서’에 나 역시 관심이 없었다. ‘이런 것도 있었나 보다. 의열단 활동이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던 차에, 의열단의 활동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줄 만한 이념적 사상이 필요하여, 약산 김원봉이 신채호 선생에게 부탁하여 쓰게 되었다’는 설명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 전, 청주 신채호 선생기념관에 갔다가 기념관 전시물을 못 보고 온 게 아쉽기만 하다. 신채호 선생 평전을 구해서 읽었다. 청주에 다시 내려가 보려고 기념관에 전화를 해보았다. 문화해설사님의 설명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기념관을 휴관 중이라고 한다. 신채호 선생은 책 속에서 만나는 길밖에 없게 되었다. 평전을 몇 번씩 반복해서 읽어본다. 책을 읽다 보니, 밀양 ‘의열기념관’에서 몇 년 전에 보았던 전시물-‘조선혁명선언’이 생각난다. 홍매화와 함께 통도사 풍경도 떠오른다. 기억의 낱장들이 기억 상자에 쌓이면  힘이 생기나 보다. 같은 날 보았던 홍매화의 진분홍 꽃잎도 함께 떠오른다.  


신채호 선생은 1910년 망명 후에 연해주 북경 등에서 여러 신문과 잡지를 발간하면서 그곳에서도 언론으로써 독립투쟁, 일제에 항거를 계속해왔다. 만주에 산재해 있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하며 역사서를 저술하여 민족의 역사-만주를 살려내었다. 그런 선생에게 1922년 12월 김원봉이 찾아온다. 상해에 있는 폭탄 제조 공장을 신채호 선생에게 보여주며, 김원봉은 의열단의 독립 투쟁의 의지를 역설한다. 그 즈음 의열단의 폭력적인 독립 투쟁이 세간에서 비난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의열단은 동양척식회사, 조선총독부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등 일본 주요 기관을 파괴하기도 했고, 일본 수뇌부 요원을 암살하는 폭력적인 항거를 계속 해왔다. 하지만, 의열단이 던진 폭탄에 일본 수뇌부만 상해를 입는 게 아니었다. 인근에 선량한 외국인들까지 피해를 입었고, 각국 대사관에서 항의가 빗발쳤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의열단에게 쏟아지는 비난으로 그들의 항쟁도 주춤거리게 되었다. 


만주에서 붓끝의 힘으로 동포들의 항일정신을 주도하고 있는 신채호 선생의 정신적 영향력을 모르지 않을 김원봉이었을 것이다. 붓끝의 힘과 폭탄의 힘의 합류가 이루어졌다. 의열단원이며 투철한 이론가였던 유자명과 신채호 선생은 한 달여를 함께 숙식하며 장문의 ‘조선혁명선언서’를 완성한다. 1923년 1월에 이 선언문은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배포된다. 중국, 만주, 미주, 도쿄 등에 퍼져있던 의열단원들에게 배포되어 거사 때마다 단원들은 선언서를 품속에 늘 휴대하며 다녔다. 의열단의 독립운동과 방략을 이론으로 천명한 선언서가 된다. 이 선언서는 의열단뿐 아니라 전 민족 구성원에게 독립에 대한 확신과 목표를 불어 넣는다. 비폭력적이며 평화적인 기미독립선언과는 본질이 달랐다. 독립을 위한 폭력투쟁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무정부주의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조선 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구축할지며, 강도 일본을 구축하자면 오직 혁명으로써,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구축할 방법이 없는 바이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다. 강도 일본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의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일류로서 일류를 압박하지 못하게, 사회로서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 것이다.” 


일본을 강도로 일축했다. 강도 일본을 구축할 방법은 폭력적인 방도밖에 없음을 천명했다. 의열단원들의 이념적 집초, 정신무장할 정신적 이념의 무기가 되었다. 그 시대 급진적인 선언서였으며, 신채호 선생이 선언서를 천명한 후에 의열단원들은 더욱 의기있게 의열투쟁을 했으며, 비난도 종식되었다. 당시 민중의 항일 의식을 일깨우는 최고 정신적 고수가 천명한 선언문은 의열단 활동에 더욱 불을 지폈다. 


시대가 바뀌었다. 우리는 해방을 맞았다. 치열했던 독립 전쟁이 있었던 사실을 현대인들은, 역사책에 기록된 구태의연한 이야기로만 인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후 신채호 선생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에 경도되었고 실제로 아나키스트인 이회영 선생과 뜻을 같이한다.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연맹’과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을 결성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자가 된다. 결국 대만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사건에 관련, 국제 위체 사기문제로 대련에서 일경에 체포된다. 10년 형을 받고 뤼순 감옥에서 노역에 시달리며 건강이 나빠진다. 몇 년에 걸쳐 옥중에서도 조선일보에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호사>. <조선문화사초> 등을 연재한다. 복역 8년 만에 옥사한다. 


1919년 4월에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다. 선생은 의정원의원이 되어 임시정부 수립을 돕는다. 그러나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뽑히자, 임시정부를 떠난다. 상해임시정부와 이승만을 규탄하는 글을 써서 발표한다. 이로 인해 이승만의 반대세력이 커졌고 이승만은 미국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일로 이승만과 신채호의 골은 깊어갔다. 1921년 <독립신문>에서 이광수를 북경으로  보내어 주필이 되어주길 청했으나, 그마저 거절한다. 단재는 임시정부에서 요직을 맡거나, 신문을 발행하는 것조차 노선을 달리하며 혼자만의 외로운 투쟁의 길을 걷는다. 나중에 이회영, 김원봉, 백정기 등과 아나키스트로서의 괘를 같이 하며 독특한 독립투쟁을 벌였다. 


뼛가루가 되어 고국 청주 귀래리로 돌아왔을 때는, 무국적자로서 자신이 자라던 고향에 묻히는 데에도 고초가 있었다. 그가 국적을 회복한 것은 1992년의 일이었다. 이승만에게 미움을 받던 신채호는 죽은 후에도 화해하지 못하는 독립노선으로 인해 고독했을 것이다. 1962년에 그는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 서훈을 받았다.  


필자 강소이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교육대학원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으며, 월간 <시문학>으로 시, <서울문학>에 수필로 등단했다. 한국시문학문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국제협력위원으로 있다. 문단에 나와 시와 수필, 평론 등을 쓰며 문학의 지평을 넓혀왔던 필자는 최근 역사 유적지 여행을 정리한『독립운동가 숨을 만나다 1, 2, 3권』을 발간했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