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Inside

우리문화 사랑방 [2023/01] 한 해의 시작 정월 세시풍속

페이지 정보

본문

계묘년은 부지런한 식신(食神)의 해


복조리 걸어두고 세함에 이름 적고

‘이레놀음’으로 이웃과 정 나누다


글 | 김영조(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2023년 계묘년(癸卯年)이 밝았다. 사주학에서 계(癸)는 계수(癸水)​​라고 하는데 수(水)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물로 생명체를 살리는 근원이라고 하여 계묘년 검은 토끼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부지런한 식신(食神)의 해라고 말한다. 계묘년을 맞아 우리 겨레의 정월 세시풍속을 알아본다. 


2023년 계묘년(癸卯年)이 밝았다. 계묘(癸卯)에서 계(癸)는 검정, 묘(卯)는 토끼이기에 ‘검은 토끼의 해’라고 말한다. 사주학에서 계(癸)는 계수(癸水)​​라고 하는데 수(水)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물로 생명체를 살리는 근원이라고 하여 계묘년 검은 토끼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부지런한 식신(食神)의 해라고 말한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계묘년을 맞아 우리 겨레의 정월 세시풍속을 알아본다.


설날 새벽에 사서 

벽에 걸어두는 복조리


우리네 민속품 가운데는 쌀을 이는 도구로서 조릿대를 가늘게 쪼개서 엮어 만든 ‘조리’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한 해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에서 설날 새벽에 사서 벽에 걸어두는 것을 우리는 특별히 ‘복조리’라 한다. 복조리는 있던 것을 쓰지 않고 복조리 장수에게 산 것을 걸었는데 일찍 살수록 길하다고 여겼다. 따라서 섣달그믐 자정이 지나면 복조리 장수들이 “복조리 사려.”를 외치며 골목을 돌아다니고, 주부들은 다투어 복조리를 사는 진풍경을 이루었다.


그런가 하면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 복조리 장수가 집집이 다니며 복조리 1개씩을 집안에 던지고 갔다가 설날 낮에 복조리 값을 받으러 오는 지방도 있었다. 그런데 복조리를 살 때는 복을 사는 것이라 여겨 복조리 값은 당연히 깎지도 물리지도 않았다. 설날에 한 해 동안 쓸 만큼 사서 방 한쪽 구석이나 대청 한 귀퉁이에 걸어놓고 하나씩 쓰면 복이 많이 들어온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그 복조리에는 실이나 성냥·엿 등을 담아두기도 했다. 또 복조리로 쌀을 일 때는 복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라는 뜻으로 꼭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일었다. 


이와 달리 남정네들은 복조리 대신 복을 갈퀴로 긁어모으겠다는 뜻으로 ‘복갈퀴’를 사고팔기도 했다.


조리를 만드는 조릿대는 산죽(山竹)이라고도 하는데 잎사귀 모양이 대나무와 거의 같지만 대나무에 견주면 키가 1미터 남짓하고 굵기는 지름 3~6mm밖에 안 되는 난쟁이다. 우리나라의 조릿대 종류는 신이대, 제주조릿대, 섬조릿대, 갓대 등이 있다. 복조리를 전문으로 만드는 대표적 마을이 바로 전남 화순의 복조리마을인데 백아산 줄기의 차일봉 서쪽 기슭 아래에 있는 이 마을은 마을 주변에 복조리의 재료가 되는 조릿대가 많이 자라기 때문에 예부터 농한기에는 복조리 공동작업장에 모여 복조리를 만들었고, 복조리마을로 불렸다.


한국인의 나이는 

설날 떡국으로부터 나온다


설날 음식 가운데는 떡국이 반드시 들어가는데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떡국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떡국은 집에서 가래떡을 만들어 끓여 먹었는데 가래떡은 멥쌀가루를 쪄서 떡판 위에 놓고 자루 달린 떡메로 여러 번 쳐서 둥글고 길게 떡을 뽑아 만들었다. 떡메로 여러 번 쳐대기 때문에 떡이 차져서 쫄깃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대형마트나 편의점 등에서 팔고 있는 포장된 떡국을 사다가 끓여 먹고 있다.


설날 떡국용 떡을 일컬어 가래떡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그 유래 가운데 하나로 ‘가래’라는 낱말이 ‘떡이나 엿 따위를 둥글고 길게 늘여 만든 토막’이라는 뜻이 있는데 가래떡의 모양이 이와 같아서 가래떡이라 한다는 설이 있다. 그 밖에 농기구 ‘가래’에서 유래되었다는 것과 한 갈래 두 갈래 할 때의 갈래에서 왔다고도 한다. 가래떡은 떡국 말고도 떡볶이의 주재료이며, 떡꼬치로 해 먹기도 하고, 간단하게 꿀이나 엿, 또는 간장이나 참기름에 찍어 먹기도 하고 살짝 구워서 먹기도 하며, 떡산적·떡찜 따위를 해 먹기도 한다. 풍어제에서는 용떡이라고 해서 가래떡을 굵고 길게 뽑아내어 고사를 지낸다.

요즘은 흰떡이 아닌 현미떡, 오색떡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또 떡국에 들어가는 떡의 양은 조금 줄이고, 다른 여러 가지 부재료를 넣어 영양 균형을 맞추기도 한다. 특히 두부, 부추, 다진 돼지고기 따위를 넣은 만두는 떡국과 맛이 잘 어울릴 뿐만 아니라 영양 궁합도 잘 맞는다. 단백질이 부족할 수 있는 떡국은, 만두에 들어 있는 두부나 돼지고기 목살이 단백질을 보충해 준다. 달걀을 풀어 넣어도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으며, 칼슘과 철분이 많은 매생이 같은 해산물을 넣어도 좋다. 또 비타민 A·C·E와 오메가3가 많이 들어 있어 체내에서 항산화 작용을 한다고 하는 들깨를 넣기도 한다.


조선시대 정초 풍속, 

세함에 이름 적기


조선 후기 문신 홍석모(洪錫謨)가 쓴 연중행사와 풍속들을 정리하고 설명한 풍속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각사의 서리배(관아에 딸려 행정실무에 종사하던 이들)와 각 군영의 장교와 군졸들은 종이에 이름을 적어 관원과 선생의 집에 들인다. 문 안에는 옻칠한 소반을 놓고 이를 받아두는데, 이를 세함(歲銜)이라 하며, 지방의 관청에서도 이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1819년 조선 후기 문신·학자인 김매순(金邁淳:1776~1840)이 한양의 연중행사를 기록한 책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따르면, 


설날부터 정월 초사흗날까지는 승정원과 모든 관청이 쉬며, 시전(市廛) 곧 시장도 문을 닫고 감옥도 비웠다. 이때는 한양 도성 안의 모든 남녀가 울긋불긋한 옷차림으로 왕래하느라 떠들썩했다. 또 이 사흘 동안은 정승, 판서와 같은 고위 관원들 집에서는 세함만 받아들이되 이를 문 안으로 들이지 않고 사흘 동안 그대로 모아 두었다고 한다. 


‘세함(歲啣)’이란 지금의 방명록(芳名錄) 또는 명함과 비슷하다. 흰종이로 만든 책과 붓·벼루만 책상 위에 놓아두면 하례객이 와서 이름을 적었다. 설이 되면 일가친척을 찾아다니면서 세배해야 해서 집을 비울 수 있어 그사이 다른 세배객이 찾아오면 허탕을 칠 수 있는데 이때 세함에 이름을 적어 놓으면 누가 다녀갔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쓰는 명함과 달리 정초에만 사용되므로 세함이라 부른다. 


이때 방문객이 세함을 놓고 갈 뿐 마중하고 배웅하는 일이 없는데 이는 정초에 이루어지는 각종 청탁을 배제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먼 곳에 세배를 가야 하는 사람들이나 벼슬이 높아 궁중의 하례식에 참석하는 경우 만날 수 없는 사정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정초 처음 서는 장에서는 

키를 사지 않아


키는 탈곡이 완전히 기계화되기 전까지 농가에선 없어서 안 되는 도구였다. 곡물을 털어내는 탈곡 과정에서 곡물과 함께 겉껍질, 흙, 돌멩이, 검부러기들이 섞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로 곡물을 까불러서 이물질을 없앴다. 고리버들이나 대나무를 납작하게 쪼개어 앞은 넓고 평평하게, 뒤는 좁고 오목하게 엮어 만든다. 키는 지방에 따라서 ‘칭이’, ‘챙이’, ‘푸는체’로도 불렀다.

‘키’ 하면 60대 이상 사람들은 어렸을 때 밤에 요에다 오줌싼 뒤 키를 뒤집어쓰고 이웃집에 소금 얻으러 가던 물건쯤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키를 쓰고 간 아이에게 이웃 아주머니는 소금을 냅다 뿌려댔다. 그리곤 “다시는 오줌을 싸지 마라!”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그렇게 놀래주면 오줌을 싸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래도 또 싸는 아이들이 있었던 것을 보면 이 방법이 그리 신통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경상남도 지방에서는 정초에 처음 서는 장에 가서는 키를 사지 않는데 키는 까부는 연장이므로 복이 달아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만약 모르고 사 왔을 때는 집안 어른이 부숴버린다. 또 제주도에서는 섣달그믐날 ‘키점(箕占)’을 친다. 부엌을 깨끗이 치우고 키를 엎어두었다가 새해 아침에 그 자리를 살펴보는데 쌀알이 떨어져 있으면 쌀이, 조가 떨어져 있으면 조가 그해에 풍년이 들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윤달에 주부가 마루에서 마당 쪽으로 키질하면 집안이 망한다고 믿었다. 이는 대문에서 집을 지켜주는 문전신(門前神)을 키질로 내쫓는 행위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민속마을에나 가야 볼 수 있는 키질, 키질하던 어머니 모습이 그립다.


정월 초이렛날 즐기는 ‘이레놀음’


정월 초이렛날이 되면 여자들이 아침부터 쌀자루를 메고, 집집이 돌아다니며, 생활 정도에 따라 쌀을 거두어들여 모둠밥을 해 먹고, 윷놀이를 하며 하루를 보내는 ‘이레놀음’을 즐겼다. 그뿐만 아니라 거둔 쌀 가운데 밥할 것만 남기고, 모두 팔아 김, 조기 같은 반찬거리를 사고 술도 조금 마련한다. 그렇게 하여 동네 어른들에게 바친다.


옛날에 살기가 어려운 서민들은 명절이나 제삿날이 아니면 쌀밥은 물론 별다른 반찬 한 가지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날 하루라도 어른을 즐겁게 해드리려는 배려에서 생긴 풍속이 ‘이레놀음’이다. 이렇게 우리 겨레는 어려운 이웃을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겨울철 날짐승을 위해 감나무에 까치밥을 남겼고, ‘고수레’라 하여 산천초목은 물론 짐승에게 조차 베풀려 했다. 이게 바로 김남주 시인이 <옛 마을을 지나며>라는 시에서 말한 ‘조선의 마음’인 것이다. 토끼해를 맞은 올 한 해도 이웃과 더불어 사는 훈훈한 정을 나누는 한 해였으면 좋겠다.  


필자 김영조 

2000년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2011년 한국문화사랑협회를 설립하여 한국문화를 널리 알리고 있다. 또한, 2015년 한국문화를 특화한 국내 유일의 한국문화 전문지 인터넷신문 <우리문화신문>을 창간하여 발행인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맛깔스런 우리 문화 속풀이 31가지》, 《하루하루가 잔치로세(2011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종가》, 《아름다운 우리문화 산책》 등이 있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