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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 이순신에서 윤봉길 그리고 4·19 로 이어진 4월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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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知止)’의 지혜와 ‘공인(公人)’의 정신

대통령은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글 |  김학준(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필수불가결의 덕목은 바로 자기희생의 정신과 자세다. 그것은 책임정신으로 연결된다. 지난해 탈레반세력이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무너뜨렸을 때 대통령이 해외로 도망쳐 세상의 조롱거리가 됐다. 대조적으로, 최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대통령이 미국의 해외망명 제의를 뿌리치고 선두에 서서 항전을 외치는 자세는 칭찬을 받고 있다. 이제 우리는 새 대통령의 취임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가 정치적 비전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국민통합을 성취하고 여러 방면에서 발전을 실현하길 기대한다. 그러나 그것에 앞서 사리사욕을 버리고 공인(公人)의 정신에 철두철미하기를 바란다. 


‘성웅’ 충무공을 기억하면서 

수많은 의병을 기리는 까닭


4월이 되면 우선 떠오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역사적 인물은 조선왕조 때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4월 28일에 태어난 그는 7년에 걸친 왜란 때 무너지기 직전의 우리나라를 구출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으며, 그래서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를 기억하고 존경한다. 


충무공은 뛰어난 전략가였다. 한산섬대첩과 명량대첩 그리고 노량대첩 등이 그 점을 말해준다. 유럽에서는 흔히 영국의 넬슨 제독을 해전에서의 최고 전략가로 꼽지만, 그렇게 꼽는 사람들조차 충무공이 넬슨보다 한 차원 위였다고 칭송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충무공의 고매한 인격이다. 나라를 위한 충성심, 백성에 대한 사랑, 부하를 보살피는 마음 그 어느 하나에서도 빠짐이 없었다. 그 바탕에는 자기희생의 정신과 자세가 있었다. 무고를 받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뒤에도 조정을 향해 한을 품는 대신에 백의종군하는 겸허함을 보였으며, 삼도수군통제사라는 높은 지위에 올라서서도 사리사욕을 채운 일이 한 차례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충무공을 성웅이라고 부르며 숭모하는 것으로, 그의 정신을 그가 태어난 4월을 염두에 두고 ‘4월 정신’이라고 명명하기로 한다.


충무공을 떠올릴 때 따라오는 것은 왜란 때 조선 8도 곳곳에서 일어났던 의병이다. 조선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훗날 조선에서 그렇게 많은 의병이 곳곳에서 일어나 끈질기게 항쟁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며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한 말이 나올 정도로, 의병항쟁은 그 규모와 열정에 있어서 놀라웠고 결코 왜군이 패퇴해 제 나라로 황망하게 돌아가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충무공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성명 석 자를 제대로 남기지 못한 수많은 의병의 순국을 기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지(知止)’ 지키지 않은 이승만의 최후

꺼져가던 임시정부 되살린 윤봉길의 순국


자기희생의 애국정신은 이후 우리 역사에서 수없이 발현됐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1919년 3월 1일의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름 없는 동포들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가 목숨을 잃거나 고통을 겪었던가. 그러나 그들의 희생은 전혀 헛되지 않았다. 그것은 1919년 4월 11일에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던 것이니, 이 임정수립의 정신 역시 ‘4월 정신’이라고 명명하기로 한다. 이 임정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뿌리임은 말할 것도 없다. 북한정권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유랑객의 집합소’로 폄하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이끌던 이승만 박사였다. 그 공로가 인정을 받기도 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됐지만, 대한민국 4대 대통령선거에 나섰다가 전국적인 부정선거의 결과로 당선은 됐으나 1960년 4월 19일에 시작된 부정선거규탄운동이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진행된 결과로 4월 26일에 하야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해외망명길에 오르게 됐으니, 4월과 그의 인연은 끈질겼다고 하겠다.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부정선거규탄운동의 정신을 ‘4월 정신’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다시 상기해야 할 것은 그의 노욕이 그를 결국 그릇되게 했다는 사실이다. 1960년에 그는 만 85세였다. ‘백세시대’를 말하는 오늘날의 생각으로 만 85세는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는 나이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 시대에 그 노령이면 물러서 있는 것이 바람직했다. 더구나 의원내각제에서의 대통령직이 아니라 대통령제에서의 대통령직을 수행하기에는 너무 높은 나이였다. 그런데도 “멈출 때를 알아야 한다”는 뜻의 ‘지지(知止)’를 지키지 않았기에 하야와 해외망명의 길에 접어들었던 것이니, 독립운동가로서의, 건국운동가로서의 그리고 한미동맹을 성사시킨 외교가로서의 큰 공적이 애석하게 느껴진다.


4월에 결코 잊을 수 없는 민족의 스승이 매헌 윤봉길 의사이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꼭 90년 전인 1932년 4월 29일에, 상하이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침략한 일제의 수괴들이 상하이에서 일제 국왕의 생일을 축하하고 자신들의 사변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거창한 식을 거행하던 때 식단에 폭탄을 던져 응징한 것이다. 이 의거로 의사는 25세의 너무나 아까운 나이에 순국했으나, 의거에 감복한 중화민국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적극적 후원에 따라 꺼져가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되살아날 수 있었다. 참으로 거룩한 순국이었다. 우리는 그의 의거 역시 ‘4월 정신’이라고 명명하기로 한다.


사리사욕 버리고 

공인(公人)의 정신에 철두철미하기를


자기희생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더구나 제왕적 대통령에 취임한 지도자에게 필수불가결의 덕목은 바로 자기희생의 정신과 자세다. 그것은 책임정신으로 연결된다. 지난해 탈레반세력이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무너뜨렸을 때 대통령이 해외로 도망쳐 세상의 조롱거리가 됐다. 자기희생의 정신은커녕 책임정신도 저버린 처사였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최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대통령이 미국의 해외망명 제의를 뿌리치고 선두에 서서 항전을 외치는 자세는 칭찬을 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나는 대통령으로서 죽음을 두려워할 권리가 없다”라는 비장한 명언까지 남겼다.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자기희생을 각오한 책임정신의 발현을 보고, 우크라이나 국민은 물론이고 국제사회도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제 우리는 새 대통령의 취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우리는 그가 시대를 앞서가는 정치적 비전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국민통합을 성취하고 여러 방면에서 발전을 실현하길 기대한다. 그러나 그것에 앞서 사리사욕을 버리고 공인(公人)의 정신에 철두철미하기를 바란다. 우선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과 친인척을 제대로 관리해야 하며, 선거 때 도움을 주었거나 열심히 뛰었다는 공로를 내세우며 몰려드는 엽관운동가와 이권운동가를 과감히 물리쳐야 할 것이다.


또 ‘지지’의 지혜를 지니고 거기에 따라 처신해야 한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잘못을 저지른 것이 있었다면 거기서 멈추고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벌써 지금부터 퇴임 이후를 생각하며 재물을 쌓아놓으려는 생각, 퇴임 이후에도 뭔가 누리기 위해 어떤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려는 생각 등등을 모두 버려야 한다. 감히 말하고자 한다. “대통령 퇴임 이후에 대해서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아무런 준비를 하지 마십시오. 연금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으로 품위 있는 생활이 충분할 겁니다. 뭘 준비하다가 그걸로 망하는 사례를 우리는 여러 차례 보았습니다.”


이것이 충무공이 보였고, 의병이 보였으며, 윤 의사가 보였고, 4·19 희생자가 보였던 4월정신에 대한 진정한 보답이다. 그리고 그 보답 위에서 대한민국은 지속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필자 김학준

1943년 중국 심양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켄트주립대와 피츠버그대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단국대학교 이사장, 인천대학교 총장, 동아일보사 사장·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단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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