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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 전쟁과 화해가 섞여있는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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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의 핵심은 상호 신뢰다…  

전쟁이 빚어낸 불신, 화해로 옮겨간 큰 걸음


글 | 김학준(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우리는 6·25전쟁 발발로부터 꼭 50년이 지난 시점인 2000년 6월 13~15일 평양에서 열렸던 제1차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적 의미를 높이 평가하게 된다. 남(南)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北)의 김정일 사이에 열렸던 이 회담은 어느 무엇보다 강대국 국제정치에 의해 분단됐던 남과 북의 최고 권력자가 민족의 자주적 힘으로 분단을 해소하고 통일로 가는 길을 열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 때로부터 22년이 지났다. 오늘날 북은 훨씬 더 진전된 핵무기로써 우리를 협박하고 있다. 북핵문제를 어떻게 푸느냐는 심각한 국정과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에게 6월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1926년에 일어났던 6·10만세운동이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국왕이며 동시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융희황제)이 세상을 뜨자 당시 망국민이었던 조선 8도의 백성들이 거국적으로 들고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그 규모는 7년 전인 1919년에 일어났던 3·1운동보다 작았으나, 그래도 항일의 독립혼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과시했고, 3년 후인 1929년 10~11월에 광주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일어나는 하나의 자극제가 됐다.


뜻깊은 6·10만세운동이 일어난 때로부터 24년 후인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의 남침개시에 따라 이 땅에서는 비극의 전쟁이 일어났다.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마오쩌둥 그리고 북한의 김일성 3자 공모에 의해 동족상잔의 참극이 시작됐고, 이것은 유엔군과 중공군의 개입을 불러일으켰으며 1953년 7월 27일에 한국(=조선)정전협정으로 마무리될 때까지 무려 37개월 동안 계속됐다. 


6·25전쟁이 남긴 상호불신의 벽

평화협정 전환 위한 노력 계속해야


이 전쟁은 남과 북을 통틀어 우리 민족 전체에게 엄청난 재앙을 안겨주었다. 국토는 황폐해졌고,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고 실종됐다. 이른바 ‘1천만 이산가족’이 이때 발생했다. 재앙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남과 북 사이에 불신이 커졌으며,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는 증오의 담이 높게 쌓아졌다. 


북한은 기습남침 직전에도 한국을 향해 ‘평화통일’을 여러 차례 제의했다. 특히 이것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입으로는 ‘평화통일’을 말하지만 행동으로는 ‘적화통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깊이 심어주었다. 6·25전쟁이 오늘날까지 남겨놓은 가장 큰 폐해와 유산이 바로 그렇게 형성된 상호불신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과 북이 상호불신의 늪 속에 빠져 살 수만은 없다. 정전협정은 남과 북이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을 성취할 것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적절한 시기에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시킬 것을 규정했다. 필자는 남과 북이 이 규정에 충실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시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6·25전쟁의 발발로부터 꼭 50년이 지난 시점인 2000년 6월 13~15일에 평양에서 열렸던 제1차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적 의미를 높이 평가하게 된다. 남(南)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北)의 김정일 사이에 열렸던 이 회담은 어느 무엇보다 강대국 국제정치에 의해 분단됐던 남과 북의 최고 권력자가 민족의 자주적 힘으로 분단을 해소하고 통일로 가는 길을 열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아무리 강조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고 하겠다. 


‘남북공동선언’에 담긴 의미있는 약속

남과 북 모두에게 지표 될 것


특히 6월 15일에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서명하고 발표된 5개 항의 ‘남북공동선언’은 오늘의 시점에서 읽어도 감동적이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라는 제1항은 앞으로도 남과 북 모두에게 지표가 될 것이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로 하였다”라는 제2항은 후에 국내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정치학 교과서에 바탕을 두고 말한다면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여기서 ‘연합제’는 정치학에서 말하는 국가연합제를 의미하는데, 국가연합제는 연방제와 차이가 있으나 공통점도 있음이 사실이다. 북한 스스로 우리말로는 연방제라고 쓰지만 영어로는 국가연합제를 의미하는 ‘Confederacy’라는 단어로 번역하는 사실이 그 점을 말한다. 쉽게 말해, 남과 북은 상대방의 ‘국가적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단계를 일정하게 거쳐, 그리고 이 단계에서 불가침을 약속하고 상호 교류·협력을 증진하면서 불신을 해소하는 과정을 거쳐 궁극적 통일을 성취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제3항은 이산가족의 방문단을 교환하고 남에 있는 비전향 장기수 문제의 해결 등 ‘인도적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약속했고, 제4항은 남과 북이 경제협력을 통해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여러 분야에서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해 상호신뢰를 다져나가기로 합의했다. 여기서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구절이 주목된다. 그것은 쉽게 말해 낙후한 북한경제를 비교적 여유 있는 한국이 도와준다는 뜻이다. 제5항은 남과 북이 이상의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해 이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할 것을 다짐했다. 이 5개 항 이외에, ‘남북공동선언’은 김정일이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한다는 약속을 담았다.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적 의미 생각하며

북핵문제 지혜롭게 풀어 나가야 


김정일은 결국 답방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남북공동선언’의 의미는 참으로 컸다. 그것은 6·25전쟁이 빚어낸 참화와 증오 그리고 불신을 화해의 방향으로 옮겨가는 큰 걸음이었다. 실제로 이 회담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후 남북정상회담은 몇 차례 더 열린다.


그런데 제1차 남북정상회담의 문제는 여전히 남았다. 첫째, 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북에 거액을 송금한 사실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남북관계의 특수성에 비춰, 그리고 분단 이후 최초의 정상회담을 실현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묵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법적인 비밀송금은 논란을 낳았고, 특히 첫 번째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적 의미를 일정하게 제약했다.


둘째, 북이 5개 항의 약속을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의 차원을 떠나 보다 더 중요하게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다시 북한의 집권자들을 신뢰할 수 있느냐의 본질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 때로부터 22년이 지난 오늘날 북은 훨씬 더 진전된 핵무기로써 우리를 협박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모두를 감동시켰던 ‘남북공동선언’의 실질적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북핵문제를 어떻게 푸느냐는 심각한 국정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필자 | 김학준 

1943년 중국 심양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켄트주립대와 피츠버그대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단국대학교 이사장, 인천대학교 총장, 동아일보사 사장·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단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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