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 신냉전시대에 다시 읽어본 3·1독립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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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잘잘못 따지고 일본 원망하기보다는
스스로 미래 개척하겠다는 강한 의지 담아
글 | 김세원(월간 순국 편집위원 · 가톨릭대학교 교수)
3·1 독립선언서는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일본을 원망하기보다는 국력을 재정비하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다. 비록 일본이 지난 강점기 동안 우리 민족을 핍박하고, 큰 시련에 빠지게 했지만, 이제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법치 등 공통의 가치를 추구하는 일본은 우리와 맞서는 혐오국이 아니라 중국, 북한 같은 독재국가에 맞서 공조와 협력을 해야 하는 동아시아 가치공동체의 일원이기도 하다.
최근 지인에게서 3·1 독립선언서가 새겨진 기념품 넥타이를 선물받았다. 1970년대 후반에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국어시간에 ‘오등은 자에…’로 시작하는 기미 독립선언문을 외웠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넥타이를 선물받은 것을 계기로 독립선언서의 내용에 새삼스레 주목하게 됐다.
선언서 서두부터 인류사적 관점에서
조선독립 당위성과 타당성 언급
1919년 2월 초 최린, 송진우(宋鎭禹), 현상윤(玄相允), 최남선(崔南善) 등이 선언서에 담을 내용을 협의하였고,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가 세운 선언서 작성의 대원칙을 참고하여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초안을 작성하였다.
33인의 서명을 모두 받은 선언서의 원고는 오세창(吳世昌)을 통해 천도교(天道敎)에서 경영하는 인쇄소 보성사에 넘겨져 2월 27일 2만 1000장을 인쇄하였다. 인쇄된 선언서는 경운동(慶雲洞)에 있는 천도교당으로 옮겨지고 28일 아침부터 전국의 배포 담당자에게 전달되어,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배포되었다.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이 선언은 인류가 양심에 따라 만들어가는 세계 변화의 큰 흐름에 발맞추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고 시대의 흐름이며, 전 인류가 함께 살아갈 정당한 권리에서 나온 것이다.”
독립선언서는 서두부터 인류사적 관점에서 조선독립의 당위성과 타당성을 언급하고 있다.
선언서는 “일본이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후에 갖가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믿을 수 없다고 비난하거나 일본의 학자와 정치가들이 우리 땅을 빼앗고 우리 문화 민족을 야만인 대하듯 무시한다고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탓하지 않겠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도 바쁜 우리에게는 남을 원망할 여유가 없다. 우리는 지금의 잘못을 바로잡기에도 급해서,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 여유도 없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선언서는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일본을 원망하기보다는 국력을 재정비하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다. 독립선언서에 담긴 3·1운동의 정신은 중국의 1919년 5·4운동, 필리핀의 1919년 여름 독립시위운동, 마하트마 간디가 주도한 인도의 비폭력 저항운동 등에 영향을 끼쳤다.
민주 진영과 독재 진영 간
신냉전시대 본격화
지난 6월 말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32차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담에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했다. 73년 나토 역사상, 대한민국 대통령이 참석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은 비회원국이지만 일본·호주·뉴질랜드와 함께 초청받았다. 나토는 이번 회담에서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몇 가지 중요한 결정을 했다. ‘러시아를 가장 심각한 위협’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처음으로 ‘중국은 서방동맹의 이해와 안보, 가치에 도전하고 있다’고 명시한 새 전략개념을 채택했다. 또 오랜 중립국이었던 스웨덴과 핀란드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나토 회원국이 됐다. 러시아에 인접한 폴란드와 발트 3국에 미지상군 배치를 늘리는 한편, 유럽 내 나토의 신속대응군을 현재의 4만 명에서 내년까지 30만 명으로 대폭 증강하기로 했다.
나토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소련이 유럽의 동부지역을 공산화하자 공산권으로부터 서유럽 자유진영을 방어하기 위해 1949년 미국과 캐나다, 유럽 10개국 등 12개국이 창설한 집단방위기구다. 1955년 서독이 나토에 가입하자 소련은 나토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주변 공산권 위성국가들을 규합해 나토에 버금가는 지역안보기구인 ‘바르샤바조약기구’를 창설했다.
미·소 냉전의 산물인 나토는 1990년대 동유럽 공산권 붕괴 이후, 그 역할을 유럽 내 평화유지로 전환하였다가 우크라이나 전쟁과 마드리드 정상회담을 계기로 기존 대서양 세력과 미국·일본·한국·호주·뉴질랜드로 이어지는 태평양 세력이 연대한 자유진영의 보루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북미와 유럽의 미국 동맹국에 아시아의 동맹국이 연결된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중국과 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독재 진영 간의 ‘신(新)냉전시대’가 본격화된 것이다.
마드리드 정상회담에 한국이 초대된 것은 대한민국이 세계중심국가로 진입하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 평화·인류 번영에 기여하는
자주독립 국가 꿈꾼 민족지도자들
독일과 프랑스는 1,2차 세계대전에서 적대국으로 치열하게 싸웠지만 1963년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콘라드 아데나워 독일 총리가 파리의 엘리제궁에서 4년간의 협상 끝에 ‘엘리제 조약(Elysee Treaty)’을 체결하면서 화해하고 동반자 관계로 변했다. 두 나라는 이후 각자의 외교정책과 주요 관심사를 결정하기 전에 정상회담이나 외교 장관 정례회담에서 사전에 협의하는 관행을 만들 정도로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양국은 조약 체결 후 공동선언을 통해 양국의 정상과 외교 국방 교육부장관 등은 정기적으로 회합을 가지고 외교·방위·교육 부문에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수 세기에 걸쳐 내려온 적대의식을 버리고 양 국민이 우호관계를 맺은 것은 역사적으로 획기적인 사건으로 양국 간의 협력 강화는 통일 유럽을 향한 불가결의 단계라고 선언하였다.
우리의 민족지도자들은 이미 103년 전 독립선언서를 통해 “조선의 독립은 사소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이 동양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의 중요한 부분인 동양평화를 이룰 발판을 마련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당시 민족 지도자들은 절망적인 시대를 살았으면서도 한반도와 동양, 아시아를 넘어 세계 평화와 인류 번영에 기여할 수 있는 자주독립 국가를 꿈꿨다.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자주독립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언급했다. 선언서에는 일본을 향한 적개심을 불태우는 선동적 표현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은 자유와 평화의 롤 모델
꿈과 희망의 3·1정신 되새겨야
세계 정세가 재편되는 혼란의 시기에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여전히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4강에 둘러싸여 있지만 1919년과 지금의 상황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한국인들은 식민지배와 6·25전쟁, 분단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우리 손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100년도 되지 않는 시간동안 근대화와 민주화, 경제발전을 이룩하는데 성공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억압받으며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자유와 평화의 ‘롤 모델’이 되고 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019년 대통령선거 1차 투표 후 인터뷰에서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은 주변에 독재국가가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서도 강하고 자유로운 나라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한국은 우크라이나의 롤 모델”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지난해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에 반대하는 대규모 민주화시위가 일어났을 때 미얀마의 젊은이들은 한국을 본받아 근대화와 민주화를 이룩하겠다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반일(反日)은 곧 애국’이요, ‘우리 민족끼리가 최우선 가치’라는 믿음이 아직도 널리 퍼져 있다. G7에 필적하는 경제력과 군사력은 물론, 한류로 상징되는 소프트 파워가 전 세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선도국가임에도 100여 년 전 구한말로 돌아가 피해자 코스프레로 국민을 선동하려 든다. 토착왜구를 외치며 과거사를 들먹이며 아시아 안보를 지탱하는 한·미·일 삼각 축을 흔들어댄다.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법치 등 공통의 가치를 추구하는 일본은 우리의 적대국이 아니라 중국, 북한 같은 독재국가에 맞서 공조와 협력을 해야 하는 동아시아 가치공동체의 일원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본격화된 신냉전시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향한 희망과 꿈을 이야기했던 3·1독립선언서의 정신을 다시 되새겨 보아야 할 때다.

고려대학교 불문학과를 나와 고려대 정치학 석사 및 뉴욕주립대 기술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고려대학교에서 국제통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와 파리특파원, 고려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아주경제 논설고문을 지내고, 현재 가톨릭대학교 교수와 월간 순국 편집위원으로 있다. ‘포스트휴먼의 초상’, ‘문화코드로 읽는 지구’, ‘문화로 세상 읽기’ 등 여덟 권의 책과 다수의 논문들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