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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2022/11] 베트남전쟁의 영웅 채명신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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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9개월 동안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혁혁한 전공 세워


아픈 병사에게 죽 먹이며 돌본 야전사령관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2013년 11월 28일, 채명신 장군은 국립서울현충원 제2묘역 베트남전쟁에서 숨진 971명의 병사들이 잠들어있는 앞자리에 안장되었다. 채 장군은 생전에 “현충원 묘역을 바라다보면서 베트남전쟁에서 생사를 같이 했던 병사들과 함께 묻히고 싶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사한 전우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니, 그의 참군인으로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전장에서 언제나 사병들과 함께한 야전사령관이었고, 저세상에서도 그들과 나란히 잠들어 있다.  


채명신 장군은 1965년 8월 초대 주월(駐越) 한국군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으로 임명되어 3년 9개월 동안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베트남의 정글을 누비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전공이 ‘부하들의 희생을 통해서 이룬 것’이라고 하면서, 한발 물러섰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항상 부하들의 안전을 최우선시하였으며 자신의 안위를 뒤로 미루었다고 하니, 참으로 존경스럽지 아니한가. 


뿐만 아니었다. 그는 대민지원에도 각별한 신경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언제나 부하장병들에게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일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주문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채명신 장군의 인간다운 면모이다. 


또 베트남전쟁에서 채명신 장군과 함께 했던 장병들은 그를 ‘참으로 용감한 군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총탄이 빗발치듯 퍼붓는 벌판에서 그는 허리도 구부리지 않고 달려와 밑에서 벌벌 떨고 있는 장병들을 향하여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거야, 떨지 마라’며, 독려했다”고 기억했다. “채명신 장군은 우리 장병들에게 무한한 힘을 전해주던 사령관이었다.” 이 말은 방송작가 김광휘의 회고담이다. 


6·25전쟁 육군 최초 특수유격부대 

‘백골병단’ 진두지휘하며 경험 쌓아


채명신 장군은 1926년 11월 27일 황해도 곡산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냈는데, 아버지의 영향으로 동서양의 역사·철학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세상에 눈떠갔다. 그러던 중 소련군이 주둔하면서 공산치하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1947년 2월 홀로 월남하여 군문에 입문, 일생을 군인으로 살았다. 아마 그가 군문에 들어간 것은 그가 북한 공산집단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월남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보인다.  


그는 국방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하여 군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국방경비사관학교가 육군사관학교로 개편되면서, 그는 1948년 4월 제5기로 졸업, 소위로 임관하였다. 그의 첫 임지는 제주도 주둔 제9연대였다. 이때 제주도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반대여론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던 곳이었으므로, 부대 내에도 남노당(南勞黨) 세력이 활개를 치고 있어서 잠시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다해 소대원들과 병영생활을 함께 함으로써 이념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병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아픈 병사에게는 죽을 먹이면서 돌보았다”고 하였다. 


그 후 개성 송악산 전투와 강원도 태백산 전투에서 남파된 북한 유격대와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초급장교로서 전투 경험을 익혀갔다. 이때가 1949년 5월부터였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불법남침에 의한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우리 육군 최초의 특수유격부대인 ‘백골병단’을 진두지휘하면서 전쟁의 값진 경험을 쌓았다. 이때의 전투경험이 뒷날 주월 한국군사령관으로서 용맹을 떨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전쟁에서 수많은 전공 남겨

1969년 5월 제2군사령관으로 전임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는 제3군단 작전참모, 논산훈련소 참모장을 역임하고, 1958년 8월에 준장(准將)으로 진급되어 제1군 사령부 작전참모, 제38사단장, 제5사단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차장을 거쳐 1964년 5월에 제3관구사령관, 1965년 4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보직을 옮겼다. 


이것이 1965년 8월 주월 한국군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으로 임명되기 직전 채 장군의 주요 보직이었다.  


1965년 10월 12일, 전 국민의 축복 속에서 맹호부대 결단 및 환송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 외교사절, 한국군과 주한미군 수뇌들, 정당·사회단체 대표, 파월장병 가족 등 10여만 명이 참석하였다. 


이때 채 장군은 환송식 답사에서 “… 우리 조국이 공산군의 불법침략을 당하여 위기에 처했던 6·25 당시 미국을 위시하여 모든 자유우방 국가들은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면서 우리를 돕고 같이 싸워준 것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지난날 우리와 거의 같은 피어린 수난을 겪고 있는 우방 월남 국민을 돕는 것은 자유진영의 집단방위를 위한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며, 영광스러운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유우방의 적인 동시에 우리 조국의 적이며 또한 자유세계 공동의 적인 공산침략자를 분쇄하여 베트남을 돕고 동남아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장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 


그때 우리는 군가 ‘맹호는 간다’를 부르며, 베트남으로 떠나는 장병들과 채명신 주월 한국군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을 환송하였다. 그리고 월남공화국의 수도 시이공에 ‘주월 한국군사령부’가 창설되었다. 그로부터 베트콩을 향한 게릴라전, 맹호5호작전, 재구2호작전, 오작교작전, 동굴탐색작전, 대민지원과 민사심리전…. 


채 장군은 수많은 전공을 남기고 3년 9개월의 임무를 마치고, 1969년 5월 제2군사령관으로 전임되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국립서울현충원 제2묘역

사랑했던 부하들 곁에 잠들다


2013년 11월 25일, 채명신 장군은 그가 올린 수많은 전공을 뒤로 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고 2013년 11월 28일, 그는 장군묘역을 마다하고 국립서울현충원 제2묘역 베트남전쟁에서 숨진 971명의 병사들이 잠들어있는 앞자리, 그렇게도 사랑했던 부하들 곁에 안장되었다. 1평짜리 사병묘역에 ‘육군준장 채명신의 묘’라는 석비가 선명하다. 그러나 봉분도, 제단도 없다.    

 

채 장군은 생전에 “현충원 묘역을 바라다보면서 베트남전쟁에서 생사를 같이 했던 병사들과 함께 묻히고 싶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사한 전우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니, 그의 참 군인으로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채 장군은 일생을 군인으로 살면서 군인의 본분인 ‘위국헌신(爲國獻身)의 좌표’를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전장에서 언제나 사병들과 함께 한 야전사령관이었고, 저세상에서도 그들과 나란히 잠들어 있다. 


2013년, 채 장군의 영결식에서의 권오성 육군참모총장의 조사가 아직도 필자의 귓가에 쟁쟁하다.


“불멸의 군인, 영원한 지휘관 채명신 장군님, 깊이 흠모합니다. 장군님은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조국을 지켜낸 호국의 간성이셨고, 혼돈의 시기에 올곧은 군인의 길을 걸어오신 참 군인이셨습니다. … 장군님께서 물려주신 뜨거운 나라 사랑의 마음과 군인정신을 잊지 않고 기리겠습니다.” 


필자 권용우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ㆍ법과대학장ㆍ산업노사대학원장ㆍ행정법무대학원장ㆍ부총장ㆍ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正心法學) 포럼 대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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