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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항쟁사 [2022/11] 경기도 부천군의 만세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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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개항 후 외국인들과 외국 문물 유입되던 길목


육지와 섬에서 만세시위 줄기차게 이어져 


글 | 이정은(3·1운동기념사업회장) 


부천 최초의 만세시위는 3월 20일 계양면에서 일어났다. 나흘 뒤인 3월 24일 더욱 격렬한 만세시위가 계양면 장기리 황어장터에서 벌어졌다. 계양면 주민 40여 명이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같은 날 계남면 소사리에서도 부근 6개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 화톳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시위 참여 인원은 750여 명에 이르렀다. 덕적도 진리(鎭里) 백사장에서는 오후 4시 운동회가 끝날 시간에 학생, 주민 등 100여 명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


물류의 거점 부천


부천은 1883년 인천이 개항되면서 외국인들과 외국 문물이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이 되었다. 6년 후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소사역이 생겼다. 지금의 부천역이다. 소사역은 김포평야의 농산물을 모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하는 물류거점이 되었다. 접객업소와 음식점들이 생겨났고, 경인 가도를 따라 가로촌(街路村)이 형성되었다.


1908년경 일본인들이 이곳에 복숭아 과수원을 시작했다. 과수원 주변에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마을이 커졌다.


일제는 한국을 병합한 후 1914년 인천의 조계를 폐지하고, 일본 조계와 면 일부를 합해 인천부로 삼고, 구 부평군을 중심으로 인천부의 일부와 강화군의 일부 섬, 남양군의 대부면과 영흥면 섬들을 포함하여 15면 160리를 관할하는 부천군을 신설했다. 군청은 문학면 관교리에 있었고, 소사역 일대는 계남면에 해당하였다. 


3월 20, 24일 계양면 시위

 

부천 최초의 만세시위는 3월 20일 계양면에서 일어났다. 계양면은 소사역에서 북북서쪽으로 약 30리(11.5km) 떨어진 곳으로, 지금의 경인운하 윗쪽에 있다. 이날 수백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나흘 뒤인 3월 24일 더욱 격렬한 만세시위가 계양면 장기리 황어장터에서 일어났다. 황어장터라는 이름은 이 일대에서 황어가 많이 잡히고 거래된 데서 유래되었다. 황어는 잉어과 물고기로 강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살다가 연어처럼 강으로 돌아와 산란을 한다. 이 장터는 황어 외에 곡물과 잡화, 하루 500~600여 두 소가 거래되는 우시장(牛市場)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3월 24일은 장기리 황어장터 장날이었다. 오후 2시경 계양면 오류리 농민 심혁성(沈爀誠, 32세)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수백 명의 군중이 따라서 만세를 외쳤다. 온 시장 안이 한참 동안 만세소리로 뒤덮혔다. 오후 4시경까지 눈치를 보며 움추려 있던 부내(富內) 경찰관주재소 순사와 응원순사 등 4명이 시위를 주도하고 있던 심혁성을 체포하여 주재소로 끌고 가려 했다. 시위대 가운데 임성춘(林聖春)이 순사들을 뒤따라가며 군중에게 외쳤다.

 

“심혁성이 붙잡혀 간다! 심혁성을 석방하라! 심혁성을 구출하자!”

군중들이 호응했다. 


“순사를 때려죽이자!” 

시위대 20여 명이 순사들을 에워쌌다. 


“심혁성을 석방하라!”


사람들은 소리치며 순사들을 구타하고, 심혁성을 구출했다. 순사는 칼을 빼들고 대항했다. 선봉에 섰던 선주리의 이은선(李殷先)이 순사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친척 이담(李墰, 이명 李泰鉉)이 이은선 사망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그는 즉석에서 “죽은 자를 동정하는 사람은 오늘 밤 12시에 계양면 사무소로 모여라!”고 하는 회람문을 만들어 면장 안병혁(安炳赫)과 면서기 이경응(李敬應)에게 말했다. 


“면내 각 동리에 돌려주시오.” 

밤 12시경 약 200명의 주민들이 계양면사무소 앞에 모였다. 

”근데 수석 서기 이경응이는 왜 안 보여?”


이담은 면서기 이경응이 보이지 않는 것에 분개했다. 

“갑시다! 이경응이 이놈, 집을 때려 부숴 버립시다!”


이담은 100여 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선주지리(仙住地里)에 있는 이경응 집으로 쳐들어가서 사립문과 벽을 부수어 허물고, 가구를 꺼내 불태웠다. 


“이제 면 사무소로 다시 갑시다!”


시위대는 다시 계양면사무소로 쳐들어가 서류를 꺼내 불태웠으며, 기물과 유리창, 창문과 판자벽 등을 파괴했다. 

계양면은 사흘 동안 해방구가 되었다. 3월 27일이 되어서야 평온을 되찾자 계양면사무소는 당분간 부근 민가를 빌려 임시로 사무를 보아야 했다. 

계양면 주민 40여 명이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담은 징역 2년, 임성춘은 징역 1년, 최성옥과 전원순은 각각 징역 10월, 심혁성은 징역 8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3월 24일 계남면 시위


3월 24일 계남면 소사리에서는 부근 6개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 화톳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소사주재소 순사들이 출동하여 해산시켰다. 이날 계남면과 소래면 등지 시위 참여 인원은 750여 명에 이르렀다. 3월 26일에도 계남면민 약 80명이, 3월 28일 밤 계남면 오류동에서는 150여 명이 산에 불을 피워놓고 만세시위를 하였다.


3월 하순의 다주면, 문학면, 남동면 등지 만세시위 


만세시위는 다주면, 문학면, 남동면 등지로 확산되어 갔다. 3월 27일 다주면을 비롯한 5개 면 연인원 1,700명이, 문학면 관교리에서 약 100명이 뒷산에 올라가 화톳불을 피우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29일에도 문학면 관교리 주민 약 150명의 시위가 이어졌다.   


3월 28일 밤 남동면에서 400여 명의 군중들이 화톳불을 피우고 만세시위를 했으며, 화톳불 시위는 다주면, 계남면, 남동면 등 군내 십여 개 지역에서 동시다발로 전개되었다. 인천경찰서에서 순사가 급파되어 해산시켰다.


3월 31일 남동면 서창리 송윤중(宋潤中) 집에 송성용(宋聖用), 구창조(具昌祖) 등이 모였다. 송성용의 지시로 구창조가 “4월 1일 남동면[소래면] 사천시장(蛇川市場)으로 주민을 모아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는 내용의 통지서를 여러 통 만들었다. 송성용은 김춘근(金春根), 윤영택(尹永澤), 박중일(朴仲一) 등 동지들과 통지서를 남동면 9개 마을 구장에게 배부하여 동리민들을 동원하게 했다. 4월 1일 사천장날에 300명가량의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3월 28일 용유면 만세시위 


용유면은 인천 앞바다 섬인데, 지금은 영종도와 합해져서 인천공항이 되었다. 3월 23~24일경 용유면 남북리 농민 조명원 집에 같은 마을 농민 조종서, 잡화상이자 기독교도인 최봉학, 문무현이 모였다. 이들은 독립운동 방법을 협의하고 ‘혈성단’이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이들은 면포로 대형 태극기를 만들었으며, 4명이 ‘조선독립운동을 거행할 것이니 28일 관청리 광장으로 모이라’는 내용을 쓰고. ‘혈성단 주모(主謀) 조명원 조종서 문무현 최명교(봉학)’의 명의로 격문 80여 통과 편지 1통을 작성했다. 이 격문을 4명이 분담하여 용유면 남북리, 거잠리, 을왕리, 덕교리의 글을 읽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주민에게 배포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하도록 했다. 


3월 28일 면 소재지인 관청리 광장에 25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을왕리의 이난의(李蘭儀)는 을왕리 주민들을 모아 이끌고 태극기를 흔들며 관청리 광장으로 와서 독립시위운동에 참가했다.


4월 1, 6~7일 대부면, 영흥면 만세시위 


3월 31일 대부면 영전리 활터에서 동리(東里)의 김윤규, 노병상, 홍원표가 모여 자신들 동리도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의했다. 그날 밤 11시경 이들은 김윤규 집에서 포목으로 태극기 1개를 만들고, 4월 1일 새벽 3시경 주막 앞에 나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소리에 주민 십여 명이 달려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6일 영흥면에서 50여 명의 군중이, 이튿날인 4월 7일에도 영흥면 내리에서 약 100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4월 9일 덕적면 만세시위 

덕적도는 대부도에서 90리(36km) 떨어진 서해 상의 섬이다. 4월 9일 덕적면 진리(鎭里)의 사립명덕학교 운동회가 진리(鎭里) 백사장에서 열렸다. 교사 임용우(林容雨)는 학생과 학부모, 동리민들이 많이 모이는 이 기회에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했다. 그는 운동회에 온 서당교사 이재관(李載寬), 차경창(車敬昌)과 의논하여 태극기 30개를 만들었다. 오후 4시 운동회가 끝날 시간에 학생, 주민 등 100여 명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 

부천군에서는 이와 같이 육지와 섬에서 만세시위가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필자이정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3·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3·1운동기념사업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 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한국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크고도 깊은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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