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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스크랩 [2022/12] 12월과 관련된 순국선열의 작은 역사, 소중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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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일본에 선전포고 외 다수 사건


만주 독립운동 세력의 이상과 포부 재조명해야


글 |장세윤(월간 순국 편집위원) 


1929년 12월 중국동북(만주)의 중심도시 길림(吉林)에서 한인 교민 자치단체 국민부(國民府)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세력은 기존의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조선혁명당’으로 개편하고 새로운 통합 독립운동 정당을 표방하였다. 이 당은 12월 20일 ‘선언’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1. 세계의 정세 ①제국주의 모순의 파탄 ②약소민족 및 무산계급의 혁명적 궐기 ③제국주의의 충돌 ④세계혁명과 조선혁명과의 관계, 2. 국내경제 ①일본제국의 조선 독점 ②조선민족운동의 발단 ③일본제국주의의 반동적 폭압 ④일본자본의 조선경제 독점 ⑤조선민족운동의 질적 변화 ⑥조선혁명의 특수성, 3. 결론으로 구성되었다.  결론 부분의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혁명의 진로는 노동자·농민·도시의 직업자·지식자 등 혁명전위분자를 강고히 단결시켜 조선혁명의 중심세력을 확립하고, 전체 대중을 이 중심세력에 긴급히 영도·연결시킴과 동시에 전세계 피압박민족 및 무산계급의 혁명전선과 강고히 결합하여 일본제국주의를 박멸함과 함께, 내부의 일체 압박 및 착취세력을 파괴하고 조선의 절대독립을 완성하여 노농민주정권을 확립하며, 대기업 기관을 몰수하여 국유로 하고 대소유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여(分與)하며, 일체 노력(勞力) 대중생활의 평형발달을 꾀함에 있다. 이것이 조선 피압박 대중의 유일한 살길로써 조선혁명의 전체 행정(行程)이다.”(姜德相·梶村秀樹 編, 現代史資料 29(朝鮮5)(東京: みすず書房, 1972), 669~672쪽) 물론 이 선언 내용 그대로 실천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1929년 말 당시 만주 독립운동 세력의 현실 진단, 현안문제 해결을 위한 이상과 포부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 그 취지와 실천방안을 비판적으로 검토, 고민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조병세, 을사늑약 항거 자결 순국 


조병세(趙秉世)는 1827년 경기도 가평군 가평면에서 태어났다. 1859년(철종 1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을 지냈다. 1888년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거쳐 1889년 의정부의 우참찬을 겸하였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다시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 시 관제 개혁으로 정1품을 받았으나, 사직하고 가평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이후 궁내부 특진관을 거쳐 1902년에 잠시 중추원 의장을 맡았다. 1905년 11월 을사5조약(을사늑약) 체결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일본군에게 궁궐 밖으로 쫓겨났다. 이후 심순택·이근명 등과 함께 을사5조약의 철회와 조약을 체결케 한 을사5적을 벌하라는 연명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우국충정의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결고국중사민서(訣告國中士民書)」라는 유서를 남기고 12월 1일 음독 자결하고 말았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가평]).


만주 항일투쟁의 맹장 오동진  

공주형무소에서 옥사 순국


1944년 12월 1일 만주 항일투쟁의 맹장 오동진이 공주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하였다. 그는 1889년 8월 평북 의주에서 태어났다. 평양 대성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에 일신(日新)학교를 세워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폐교되었다. 1919년 의주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적극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중국동북(만주) 서간도의 관전현(寬甸縣)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윤하진(尹河振) 등과 함께 광제(廣濟)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안병찬(安秉瓚) 등과 함께 안동현(安東縣)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했다. 같은 해 10월 말에는 김응식(金應植)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강변8군(江邊八郡) 임시교통사무국 참사(參事)’로서 지국 시찰 등의 사명을 띠고 국내에 특파되었다. 11월 초에는 안동임시의사회(安東臨時議事會)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1920년 2월 서간도 지역 여러 단체들이 통합되어 광복군사령부가 설치되자 제2영장에 취임하여 변창근(邊昌根)·최시흥(崔時興)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22년 남만주 지역에서 통군부(統軍府)가 조직되자 재무부장에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에 노력했다. 통군부가 대한통의부(統義府)로 개편된 뒤 교통부장·재무부장·군사위원장을 맡아 무장투쟁을 지속했다. 


1925년 이청천(李靑天)·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남만주 지역에 산재한 여러 단체를 규합하여 다시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했다. 정의부에서 중앙행정위원, 재무부장 등을 맡아 군자금 조달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뒤 정의부의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에 선임되어 일제 침략세력과의 무장투쟁과 국내 진입작전을 지휘하였다. 


1925년 10월에는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에서 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국무원에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26년에 양기탁·주진수(朱鎭秀) 등과 함께 길림성(吉林省)에서 고려혁명당을 조직하는 한편, 정의부 의용군 독립군을 지휘했다. 1927년 4월 김진호(金鎭浩)·김동삼 등과 함께 농민호조사를 조직하여 수십만에 달하는 재만한인들의 생활개선을 도모했다. 그러나 1927년 12월 16일 중국동북(만주)의 길장선(吉長線) 흥도진역(興陶鎭驛)에서 밀정에게 속아 신의주 경찰대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무려 6년여 동안의 재판 끝에 1932년 6월 2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상고를 포기한 끝에 무기징역형이 확정되었지만, 1934년 7월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모진 옥고 끝에 1944년 12월 1일 공주형무소 옥중에서 순국하였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4권, 1987).


일본 진주만 기습공격,  

태평양전쟁 도발


1941년 12월 8일(일요일) 일본군은 미국 하와이만의 미군 기지를 기습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로써 세계제2차대전이 아시아태평양지역으로 더욱 확산되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이날 오후 하와이 주둔 미군사령부는 계엄령을 발동하였다. 이에 미국 귀화가 법적으로 금지되었던 하와이의 재미한인 1세들은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적성외국인(enemy aliens)’으로 분류되어 거주지 제한, 은행예금 동결, 직업 변동 및 여행 허가제, 야간통행 금지와 같은 규제를 받게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12월 14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재미한인의 ‘전시국방복무요령’을 발표하였다. 1944년 5월 6일 하와이 군정장관의 일반명령 59호 발표로 비로소 한인들의 적성외국인 분류는 공식 해제되었다(이만열, 『한국독립운동사 연표』, 독립기념관, 2009, 481~482쪽).


대한민국임시정부 일본에 선전포고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은 12월 10일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임시정부가 배포한 「대일 선전 성명서(對日宣戰聲明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3,000만 한인 및 정부를 대표하여 중국·영국·미국·네덜란드·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및 기타 제국(諸國)의 대일(對日) 선전 포고를 삼가 축하한다. 이것은 일본을 쳐부수고 동아시아를 재창조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이에 특히 아래와 같이 성명서를 낸다. 1. 한국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였으니, 한 전투 단위로서 추축국에 선전(宣戰)한다.


2. 1910년 합병 조약과 일체 불평등 조약의 무효를 거듭 선포하며, 아울러 반침략 국가인 한국에서의 합리적 기득권익을 존중한다. 3. 한국, 중국 및 서태평양으로부터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하여 최후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한다. 4. 일본 세력하에 조성된 창춘(長春) 및 난징(南京) 정권을 절대로 승인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5. 루스벨트·처칠 선언(羅邱宣言)의 각 조를 견결히 주장하며, 한국 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것을 적용하여 민주 진영의 최후 승리를 축원한다.” 

 

경북 영천  

산남의진 의병장 정환직 순국


1907년 12월 11일(음력 11월 16일) 산남의진 의병장 정환직(鄭煥直)이 경북 영천에서 일본군의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그는 아들 정용기(鄭鏞基)와 함께 부자(父子) 의병장으로 유명했다. 그는 1907년 의병진영을 이끌고 경주로 이동하고자 했지만, 영덕군 소택(小澤)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전세가 불리하여 이튿날에 부근 청하군(淸河郡) 각전(角田)에서 부하들에게 의병부대를 해산하도록 명령했다. 그 뒤 동대산(東大山)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산에서 내려와 일본군에 항쟁하려 했으나, 12월 11일 새벽 고천(高川)에서 일본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일본 헌병은 그를 대구로 호송하면서 회유하고자 했지만, 끝내 굽히지 않았다. 결국 다시 영천으로 끌고가서 재판도 없이 영천 남쪽 교외에서 총살하고 말았다. 최후로 남긴 다음의 비장한 시가 전해지고 있다. “육신이야 죽더라도 마음만은 변치 않고, 의가 중하니 죽음은 오히려 가볍도다. 뒷일을 누구에게 맡기리오. 말없이 앉아 있노라니 오경이 되었구나(身亡心不變 義重死猶輕 後事憑誰託 無言坐五更)”(윤병석,『한말 의병장 열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1, 239~247쪽).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의병장 

피살 순국 


1908년 12월 12일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명성을 떨쳤던 신돌석 의병장이 경북 영덕에서 돈에 눈이 먼 동지에게 피살, 순국하였다. 신돌석은 1906년 4월 경북 평해에서 의병을 일으켜 경북 동해안 일대에서 1908년 후반까지 크게 용맹을 떨친 의병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1908년 후반 일제의 탄압으로 의병 활동이 어려워지자 이듬해 봄, 재기를 기약하고 의병부대 장병을 돌려보냈다. 그 뒤 12월 12일 영덕 눌곡(訥谷)의 부하 김상렬(金相烈)의 집에 은신했는데, 돈을 노린 이들 3형제의 계략에 빠져 암살당하고 말았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윤병석,『한말 의병장 열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1, 229~237쪽).


김구, 한인애국단 조직


1931년 12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 김구가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김구는 중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한중우의(韓中友誼)와 일본 수뇌의 처단을 목적으로 이 단체를 개별적으로 조직하였다. 간부는 단장 김구를 비롯해 이유필(李裕弼)·이수봉(李秀峰)·김석(金皙)·안공근(安恭根) 등이며, 단원은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이덕주(李德柱)·유진만(兪鎭萬)·최흥식(崔興植)·유상근(柳相根) 등이었다.


1931년 1월 8일 이봉창의 도쿄(東京) 사쿠라다문(櫻田門) 의거와 이듬해 4월 29일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는 잘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1932년 4월 이덕주·유진만의 조선총독 응징미수사건, 최흥식·유상근의 국제연맹조사단원 처단미수사건 등이 발각되어 그 배후에 한인애국단이 관련된 사실이 밝혀졌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인애국단」,『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윤봉길 의사, 

일본 가나자와형무소에서 총살 순국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특공작전으로 일본군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郎]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등을 살상했던 윤봉길 의사가 이 해 12월 19일 오전 7시 30분 일본 이시가와현카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총살되어 순국하였다. 처형 이후 일본군은 “윤봉길 시신은 화장했다.”고 신문에 보도했다. 그러나 사실은 근처 노다산 쓰레기 소각장이었던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좁은 길목에 사람들이 밟고 가도록 암매장하는 추태를 보였다. 1946년 김구는 일본에 있던 박열, 이강훈에게 윤봉길·이봉창·백정기의 유해 발굴을 부탁하였다. 이에 따라 윤봉길의 유해는 가까스로 이 해 3월 6일 발굴되어 6월 30일 서울의 효창공원에 반장되었다.


중국 동북지역 민족유일당

조직동맹 개편, 조선혁명당 성립


1928년 9월 중국동북의 중심도시 길림(吉林)에서 결성된 한시적 독립운동 조직인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바탕으로 1929년 12월 20일 조선혁명당이 창당되었다. 1929년 4월 출범한 통합 한인교민 자치조직 국민부(國民府)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이 당은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원칙에 따라 먼저 결성되었던 국민부와는 행정부와 지도당(유일당)이라는 표리일체적 관계로 출발하였다. 초창기 주요 구성원들은 좌·우파 연립정당의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1930년 중후반 좌파세력이 우파세력에 축출되면서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표출하였다.


조선혁명당과 국민부 양자의 관계는 당이 절대적 우위에 있어 행정기관인 국민부에 대한 명령권은 지대하였다. 따라서 국민부는 조선혁명당이 지시하는 행정사항을 표면에서 처리하였고,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부문을 당이 지도했다. 그러나 양자의 구성인물이나 이념, 활동목적은 사실상 큰 차이가 없었다. 조선혁명당 산하에 한인 교민 보호조직이자 독립군인 조선혁명군이 편제되어 1938년경까지 끈질긴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조선혁명당의 당의(黨義)는 “혁명적 수단으로써 원수(仇敵) 일본 침략세력을 박멸하고 4천년을 독립하여 온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고,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며, 국민전체 생활의 평등을 확보하여 나아가 세계인류의 평등과 행복을 촉진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내세운 강령은 거의 사회주의적 색채에 가까운 것이었다. 토지의 국유와 농민 분급, 대규모 생산기관과 독점적 기업의 국영화, 국민 경제 활동의 국가 통제, 노농운동의 자유 보장 등을 천명했다(장세윤, 『재만 조선혁명당의 민족해방운동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논문, 1997).


김도현 의병장 동해 투신 자결  

(11월 19일)


1914년 12월 22일(11월 19일) 김도현(金道鉉, 1852~1914) 의병장이 경북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앞바다 동해에 투신 자결하였다. 


김도현은 경북 영양군에서 태어났다. 1895년 11월 단발령이 선포되자, 12월 1일부터 경북 안동 임동 등지에서 유지호(柳止鎬)·권한모(權翰模) 등과 함께 이에 대처할 방안을 협의했다. 1896년 1월 초 유시연(柳時淵)과 함께 청량(淸凉)에서 의거한 뒤, 안동부로 가서 안동의병부대와 합류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2월에는 인근 7읍의 의진과 연합하여 함창과 태봉 등지에서 적과 접전을 벌여 10여 명을 사살했다. 이후 강릉으로 나아갔고, 4월초에는 삼척에서 접전하였다. 고종 황제의 의병 해산 조칙이 내려지고, 이에 영남 의진이 해산되었으나 영양으로 돌아와 병영을 구축하고 입암(立巖)과 소청(小靑) 등지에서 접전하는 등 끝까지 항거하고자 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것을 알고, 영남 선비들과 상경하여 을사늑약 반대 상소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어 자결, 순국하려고 했으나 동지들의 만류로 귀향했다. 1907년 8월 군대 해산 이후 이만도(李晩燾)와 함께 안동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10년 망국 이후 실의에 잠겨있었다. 1914년 11월 모친이 별세하자 영해의 관어대(觀魚臺)에 나아가 유서와 절명시를 남기고 바다에 투신, 자결하였다. 유시(遺詩)는 아래와 같다. “오백년 왕조 말에 나 어이 태어나서, 붉고 붉은 의분의 피 가슴에 가득하다. 국모가 시해되고 그 뒤에 십구년간, 머리와 수염 늙어 가을서리 다되었다. 나라 망해 피눈물이 마르지 않았는데, 어버이 서거하사 마음 더욱 병들었다. 내고향 푸른산에 홀로 서서 생각하니, 백가지 계책중에 내 쓸 방법 하나없다. 할수없다 넓은 만리 바다를 찾아가자, 새양기 돌아오는 동짓날 초이래에. 희고도 또 흰 바다 그 깊이 천장이니, 이 한몸 간직하기 넉넉하고 남겠네.”(한국학중앙연구원,「김도현」,『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및 윤병석,『한말 의병장 열전』, 115~128쪽)


이재명 의사,  

매국노 이완용 습격, 중상을 입힘 


1909년 12월 22일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李在明)이 대한제국기 대표적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는 의거를 단행하였다. 그는 1887년 평남 평양 출신으로, 8세 때 평양 아청리로 이사했다. 1904년 미국노동이민사 모집으로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제1·2차 한일협약이 강제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1907년 10월 도쿄·나가사키(長崎)를 거쳐 귀국했다. 1909년 1월 전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순종 황제와 함께 평양을 순행하기로 했을 때, 이토를 처단하고자 동지 몇 사람과 평양역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안창호(安昌浩)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산을 거쳐 연해주로 갔다. 그 뒤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사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귀국하였다. 마침 1909년 9월 상경하여 기회를 엿보던 중, 12월 22일 서울 종현(鐘峴, 현재 명동) 천주교회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그달 17일 사망)의 추도식에 이완용 등 매국노들이 참석한다는 신문보도를 보게 되었다. 이에 군밤장수로 변장한 뒤 교회당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11시 30분경 이완용이 식장에서 나와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려는 찰나, 칼로 허리와 어깨 등을 세 번이나 찔러 쓰러뜨리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경찰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고 잡혔다. 그는 이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9월 30일 순국하였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및 『독립유공자공훈록』8, 1990).


일제 대종교 ‘임오교변’ 탄압 


1930년대 중반 이후 일제의 괴뢰 ‘만주국’ 지배하 만주지역에서 대종교 교세가 약화되지 않자 조선총독부와 만주국 당국은 이를 경계했다. 일제 경무당국은 밀정 조병현을 통해 대종교 지도부를 몰래 감시하다가 노골적으로 대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1942년 12월 26일(음력 11월 19일) 만주국 경찰은 영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에 있던 대종교 총본사를 습격하고 제3세 교주 윤세복과 안희제·이용태를 비롯한 24명의 대종교 간부들을 검거했다. 대종교 간부들은 국내를 포함하여 북만주 지역의 신안진(新安鎭)·하얼빈(哈爾濱)·목릉(穆陵)·영안·돈화(敦化)·밀산(密山), 동만(東滿)과 남만(南滿)지역의 연길(延吉)·반석(磐石)·장춘(長春)·영길(永吉) 등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체포되었다. 이듬해 4월에는 총본사찬리(總本司贊理) 이현익도 붙잡혔다. 또한 대종교 총본사에 소장된 신간서적 2천여 권, 구존 서적 3천여 권, 각종 도서 및 교단 서류 6백여 종을 압수당했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사건을 ‘임오교변’이라 한다.


교주 윤세복·안희제 등 25명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됐는데, 이 중에 성하식·김진호·안용수·이종주 등 4명은 무혐의로 즉시 석방됐다. 나머지 21명의 지도자들은 만주국 영안현 경무과에 특별취조본부를 설치한 일제 경찰에 4개월 동안이나 고문과 악형을 받으며 취조를 받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안희제(安熙濟)를 비롯한 애국지사 열 사람이 희생되는 등(이를 ‘임오십현’이라 함)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최봉룡,『만주국의 종교정책과 재만 조선인 신종교』, 태학사, 2009, 318~334쪽).


나석주 의사,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 투척


1926년 12월 28일에 나석주(羅錫疇) 의사가 서울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拓植)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의거를 단행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12월 28일 식민지 조선에 세워졌다. 이 회사는 영국이 인도에 세운 ‘동인도회사’를 모방하여 설립했다. 일본이 조선을 착취하고 토지 및 농업자원 등을 수탈하기 위해 세웠다. 꼭 설립 18주년이 되는 날에 황해도 재령 출신의 나석주(1892~1926.12.28) 의사는 일제 침략과 조선인 수탈을 응징하기 위해 중국청년으로 변장하고,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과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하기 위한 의열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 거사는 아쉽게도 폭탄이 터지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투쟁과정에서 일본인 기자와 척식회사 직원 네명을 권총으로 쏘아 죽이고, 경기도 경찰부 경부(警部) 다하다 유이지(田畑唯次)를 사살하였다. 이후 황급히 출동한 경찰대와 기마대의 추격을 받자 나석주는 자결을 결심했다. 결국 권총 세발을 가슴에 쏘고 쓰러졌다. 경찰이 조선총독부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날 순국하고 말았다. 나중에 그의 순국 사실을 알게 된 김구 등 중국 상하이(上海)의 동지들은 성대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8,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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