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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더 생각하는 역사 [2022/12] ‘대한제국멸망사’를 마치며 l 우리에게 친일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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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청산이 ‘낙인 찍기’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


우리가 정말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을까


글 | 신복룡(전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과거사 청산은 당사자에 대한 ‘할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식이라면 일본 정부와 지주에게 세금과 소작료를 지불하고 부역(賦役)한 나와 귀하의 아버지도 친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실제로 친일의 죄상을 따지자면 중위보다 오장(伍長)이 더 악랄했다. 진보 진영에 포진하고 있는 오장의 자식들이 중위의 자식들을 친일파라고 배척하는 것은 무지이며 코믹하다. 박정희가 훗날 대통령이 되지 않고 중위로 생애를 마쳤더라도 그의 행적은 친일의 멍에를 썼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해방 이후의 행적에 따라서 해방 이전의 행적을 논의하는 것은 당사자나 그 자식들에게 주홍글씨(stigma)를 써넣는 작업의 성격이 짙다.  


그로부터 해방된 지 80년 가까이 흘렀다. 역사가 바뀌기에 80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이러한 시대에 일본에 대한 시각을 달리 한다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은 아니다. 목청을 높여 반일을 외쳐야 하는 것이 곧 애국인 세상,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에 대해서 누구도 ‘다른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시대에 살면서, 친일과 같은 민감하고 금기시된 문제에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는 것이 얼마나 거칠고 무례한 저항을 받는가를 나는 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에 앞서 친일의 본질을 정교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도대체 친일이란 무엇일까? 그 본질은; 


(1) 의도적으로 일본의 이익을 위해 동족에게 위해를 끼쳤는가? 

(2) 동포에 대한 위해(危害)와 관계없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위해 협조했는가?

(3) 그와 같은 행위로 말미암아 재산이나 신분상의 편익을 받았는가? 

(4) 그 과정에서 일제로부터 사기와 고문이나 위협과 같은 강박이 없었는가? 


적어도 지금의 현실에서 친일 문제를 보는 독립운동사학계의 보편적 시각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1) 민족을 위해 큰일을 했다는 사실이 그보다 작은(?)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아니다. 아울러 허물(친일)이 애국 활동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허물과 공로가 총량(總量)이나 경중(輕重)으로 상쇄되는 것은 아니다. 

(2) 먼저 잘못을 저질렀으나 뒤에 회개한 무리들(前非後改)보다 먼저 훌륭한 일을 했으나 나중에 잘못을 저지른 무리들(前善後非)의 잘못이 더 크다.

(3) 똑같은 폭압의 상황에서 벌어진 허물이라 할지라도 지도층의 허물은 하층민의 허물보다 더욱 준엄하게 묻는다. 


우리 안의 친일


일본의 집요하고도 구체적인 정한(征韓) 전략과는 달리 한국의 대응은 그렇게 절박하지도 않았고 전략적이지도 않았다. 그 밑바닥에는 중화주의라고 하는 백내장이 깔려 있었다. 합방 이전이나 이후를 가리지 않고 지배 계급의 전략 부재로 말미암아 한국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일본에 길들여지고 있었다. 친일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친일인지도 모른 채 친일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1942년 2월에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함락했을 때 조선의 초등학교 학생들에게는 고무 공 하나씩을 선물했는데 그리 기뻐할 수가 없었다.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사형 판결을 받을 무렵 한국인들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죽음을 사죄하는 대죄단(待罪團)을 조직하고, 그의 추모 행사를 준비하고, 그의 동상 제작을 추진하면서 그를 활불(活佛)로 추앙했으며 그를 추모하는 절을 장충단에 지어 이름을 박문사(博文寺)라 했다. 황국신민서사를 지은 것도 한국인이었다. 


우리 안의 친일은 오늘이라고 해서 나아진 것이 없다. 그 한 예로서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인가부터 느닷없이 중국으로부터 수입해온 ‘따오기 복원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예산이 72억 원이라 한다. 그리고 위정자도, 국민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고 있다. 그 노랫말은 이렇다.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메이뇨

내 어머니 가신 나라 해 돋는 나라(1절)

내 아버지 가신 나라 해 돋는 나라(2절)


이 노래에서의 핵심어(keyword)는 처량함, 내 어머니, 내 아버지, 떠나감, “동쪽의 해 돋는 나라”이다. 왜 내 어머니와 내 아버지는 동쪽에 해 돋는 나라[일본]에서 살고 있을까? 왜 우리는 그토록 처량하게 해 돋는 나라를 그리워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이 노랫말에 담긴 메시지는 유쾌하지 않다. 작사자가 어떤 의도로 그렇게 썼는지에 대하여는 각자가 짐작할 일이다. 관계자들은 펄쩍 뛸 일이지만 나는 이 가사에서 교묘하게 은폐된 친일을 느낀다. 따오기의 국제적 학명이 Nipponia nippon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따오기는 꿩과 까마귀와 함께 일본의 세 가지 국조(國鳥)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친일 논리는 지나치게 정죄(定罪)로 흘러가고 있다. 이런 논리가 친일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논리로 인용된다면 그것은 나의 진심이 아니다. 고문 경찰 김태석(金泰錫)과 노덕술(盧德述)을 잡아다가 정죄하고 이광수(李光洙)나 최남선(崔南善)에게 낙인(stigma)을 찍는 것이 친일 청산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오이다. 그러나 50년 가까운 일본 지배 기간에 “민족에게 죄짓고서도 처벌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역사의 죄과(罪科)이다. 이는 어떤 논리로서도 합리화될 수 없는 일이다. 


먼저 태어난 자의 슬픔과 늦게 태어난 자의 행운


해방정국에서의 가장 다루기 어려운 문제는 친일파 청산이었다. 친일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문제를 만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격동의 해방정국에서 분출하는 복수심과 망국에 대한 추궁의 심리 속에 모두가 애국자처럼 외치는 동안에 이미 이성은 문제 해결의 도구가 아니었다. 더욱이 해외파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의 촉수 안에 머물렀던 국내파 민족주의자들에 견주어 더 몸짓이 거칠었고 목소리도 컸다. 그 가운데에 김구(金九)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도 김구를 추모하는 독자들이 나의 글을 읽고 매우 분노한 댓글을 달았던 것은 내가 “우리의 현대사에서 친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다”는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증류수에서는 고기가 살 수 없다”고 항변한 분의 주장에 대해서도 나는 굳이 반론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쳐 자행된 체계적 권력 남용과 외압 아래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이 체제에 묵종한 사회에서 최종적으로 누가 죄인이며 누가 그를 심판할 수 있는가?


냉정하게 말하자면, 해방이 되자 이승만(李承晩)은 친일 재벌 장진영(張震英)의 돈암장(敦岩莊)에서 살았고, 김규식(金奎植)은 친일 재벌 민규식(閔奎植)의 삼청장(三淸莊)에서 살았고, 김구는 금광 재벌 최창학(崔昌學)의 경교장(京橋莊)에서 살았고(이 집은 일본 공사 다케조에 진이치로(竹添進一郞)의 집이었다), 박헌영(朴憲永)은 함열(咸悅) 갑부 김해균(金海均)이 제공한 혜화장(惠化莊)에서 살았다. 그런 모습은 “받아 마땅한 대접”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모두가 죄인이고 망국의 책임자이다. 지금의 친일 논쟁은 “먼저 태어난 자의 슬픔과 늦게 태어난 자의 행운”이 빚은 갈등이다. 우리의 망국사에는 분노만 분출할 뿐 역사에 대한 자성이나 회오가 없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여전히 “우리 자신의 힘으로 광복을 쟁취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해방정국에서의 친일 논쟁은 이승만에게 너울을 씌우는 구실로 이용되었다. 한민당원들 가운데 친일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친일 논쟁은 한민당으로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화두였다. 가장 격노하여 반격에 나선 인물은 조병옥(趙炳玉)이었다. 당시 정보망을 장악하고 있었던 그는 정치판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친일 비리를 꿰뚫고 있던 터라 할 말이 많았다. 그래서 나온 논리가 친일(pro-Jap)은 먹고 살다 보니 저지른 일(pro-Job)이었다는 것이다.


조병옥은 이어서 싱가포르가 함락되고 마닐라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자 여운형(呂運亨)과 안재홍(安在鴻)이 조선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에게 불려가 소위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에 협력할 것과 황국 신민이 되겠다고 맹서한 전력(前歷)을 공격하고, 김규식의 아들이 상해(上海)에서 일본군의 스파이로 8년간 활약한 사실을 들추었다. 따라서 고의로 자기의 영달을 위하여 민족 운동을 방해하였거나 민족운동자들을 살해한 자가 아니면 취업으로 인정하고 감싸야 한다고 강변하면서(조병옥, 『나의 회고록』, p.173.) 그는 더 따져보겠느냐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에서 본다면 선명성이라는 점에서 김구가 우위에 섰던 것은 사실이다. 이는 이승만의 정치적 야망으로 볼 때 대중 동원이나 정치 자금 그리고 인물을 모아가는 과정에서 지주나 매판자본가를 깨끗이 물리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친일 청산을 주장하는 김구가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을 했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문제였다. 때 묻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숙청을 시도할 경우에 새로운 사회 건설에 쓸 만한 사람이 부족한데 어쩌랴?


지금 이 시대의 가진 자들 가운데 한말부터 일제시대와 해방정국에 이르기까지 100년의 역사를 살아온 조상 3대 3족(친가·처가·외가) 9족의 이력서와 호적/제적등본과 족보를 내놓고 “우리 집안은 정말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집안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다시 국난이 온다면 나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는 조국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장담할 수는 없다. 


거대한 국가 폭력 앞에서 한 개인이 저항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흥망성쇠를 겪으면서 의인이 없었던 적도 없지만 역사적으로 애국자가 넘쳐나는 시대도 없었다. 꼭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었다. 조국과 동포를 배신한 사람을 대상으로 정의를 추구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심각한 어려움이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망국의 원인을 몇 명의 친일파에게 추궁함으로써 망국이라는 거대 담론을 희석시켰다. 


어떻게 풀어야 하나?


그렇다면 해방 70년이 지나도록 아직 해결되지 않고 분파를 이루는 친일 부역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나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이 일을 매듭짓는 것을 권고한다.


첫째, 당사자 또는 그 후손은 진정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한다. 최악의 친일파의 후손이 국회에서 죽창가를 외치는 것을 볼 때면 속이 메스껍다. 정신적 외상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의 고통을 거론하고 인정하며 여건이 좋아진 다음에는 “기억과 더불어 사는 법”이다. 남아프리카의 경우에는 인권침해 가해자들이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하여 모든 것을 고백할 경우에는 기소를 면제했다. 후회나 가책의 표현을 요구하지 않았다. 고백을 속속들이 다 듣고 알게 되면 속이 시원할지 모르지만 마음은 더욱 비참해지기 마련이다.(N. Chomsky)


둘째로, 친일의 대가로 받은 일체의 반대급부를 환수한다. 그것은 속죄의 첫 단추이다. 자기들의 재산이 친일의 대가가 아니라 선대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강변할 수 있다. 그리고 일부는 재판에서 승소했다. 친일파의 재산이 모두 친일의 대가는 아니었으며, 선대의 유산도 많았다. 그러나 최소한 죄지은 재물은 내놓아야 한다. 


셋째로, 국민적 합의로 일몰제(sunset law)를 제정한다. 세상의 매듭을 푸는 데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잊어버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 쉽지, 그 아픔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나는 형사법학자는 아니지만 “친일파에게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논리에 법률적 하자가 없는지를 가끔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그 행간에는 연좌제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학살과 같은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나치 치하나 붕괴 이전 공산 치하와 남미에서 저지른 반인륜 범죄의 추적과는 다소 다른 성격의 것이다. 과거만을 지향하는 기억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니다.

스페인의 경우를 보면 오히려 지식인들이 과거를 외면하기로 결정한 망각의 협약이 정치적 안정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프랑코(Franco)의 명예를 훼손하고, 군대와 보안 부대에 대한 숙청을 시도할 경우에 쿠데타가 일어나리라고 믿을 만한 증거는 많았다. 그래서 원칙은 살리되 ‘망각’을 중요 도구로 이용했다. 그렇게 해서 프랑코 정권 아래에서의 부역자 사마린치(Juan Samarinch)도 용서를 받았다.


넷째로, 연좌제를 배제한다. 친일 이야기를 하면서 박정희(朴正熙)를 거론하는 의견이 있었다. 친일파가 정권을 잡아 나라가 이렇게 어려워졌다는 논리이다. 박정희는 육군 중위의 몸으로 일본 군대에서 복무했다. 없었더라면 좋았을 일이니 허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식민지에 태어난 젊은이가 겪어야 할 아픔(karma)이었다. 나는 그를 두둔할 뜻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육군 중위가 친일파라면 그 숱한 한국인 육군 중위와 그 상관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박정희만 문제가 될까? 


씻김굿


과거사 청산은 당사자에 대한 ‘할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식이라면 일본 정부와 지주에게 세금과 소작료를 지불하고 부역(賦役)한 나와 귀하의 아버지도 친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실제로 친일의 죄상을 따지자면 중위보다 오장(伍長)이 더 악랄했다. 오장의 자식들이 중위의 자식들을 친일파라고 배척하는 것은 무지이며 코믹하다. 박정희가 훗날 대통령이 되지 않고 중위로 생애를 마쳤더라도 그의 행적은 친일의 멍에를 썼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해방 이후의 행적에 따라서 해방 이전의 행적을 논의하는 것은 당사자나 그 자식들에게 주홍글씨(stigma)를 써넣는 작업의 성격이 짙다. 그러므로 망국의 문제는 멀리 맹자(孟子)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보면 그 나라가 스스로 멸망할 짓을 저지른 뒤에 다른 나라가 그를 멸망시킨다.”(『孟子』 : 離婁章句(上) : 國必自伐而後人伐之) 강요에 따른 것이었든 자발적이었든, 우리는 그 시대를 살면서 모두가 애국자였을 뿐, 암묵적으로 협조한 바는 없었을까?  


필자 신복룡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객원교수와 대한민국 학술원상 심사위원,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그리고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출판부장, 중앙도서관장, 대학원장,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등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는 『한국분단사연구』, 『한국사 새로 보기』, 『한국정치사상사』, 『해방정국의 풍경』, 『전봉준평전』, 역서 『한말 외국인기록』(전 23권)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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