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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 [2022/12] 강원도 원주의 만세시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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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서남쪽 끝 부론면에서 동북쪽 변방 소초면까지


작은 동리에 울려퍼진 외침 “우리 살아있소!”


글 | 이정은(3·1운동기념사업회장) 


원주는 일제의 군사적 압박에 목이 눌려 독립운동이 질식할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 때문에 원주 읍내에서는 만세시위가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변방 면과 동리들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작은 동리 주민들은 탄압을 피해 한밤중에 산에 올라 화톳불을 피우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일제의 수직적 억압체제 하에서 질식해 가고 있었던 지방사회 공동체적 자율성이 동리 단위에서는 아직 “우리 살아 있소!” 하는 외침이었다. 비록 원주 읍내에서는 만세시위가 일어나지 못했지만, 원주의 서남쪽 끝 부론면과 동북쪽 변방 소초면에서 만세시위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역사적 변경 원주 


원주는 강원도의 동남쪽 변경에 있다. 북쪽과 동쪽으로 강원도 횡성과 영월, 서쪽으로 경기도 여주와 양평, 남쪽으로 충북 충주와 제천과 접하여 3도(道)에 접한 변경이다. 고대에는 처음 마한,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고구려 남하로 고구려 땅이 되었고,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했을 때 신라 땅이 되었다. 즉 3국의 변경이자 쟁패의 격전장이었다. 통일신라 말에는 중앙권력이 쇠퇴하자 양길(梁吉)이라는 호족이 원주지역을 기반으로 오늘날 강원도 대부분을 차지하여 독자 세력을 구축했다. 변경의 또 다른 특성이었다. 오늘날 강원도청이 춘천에 있지만 조선시대 강원도 감영은 원주에 있어 강원도의 중심이 되었다.  


서울에서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졌을 때 원주 출신 배재고등보통학교 3학년생 장용하는 「조선독립신문」, 「반도의 목탁」 등 비밀 유인물을 등사판으로 밀어 3·1운동이 대중에게 널리 널리 퍼져가도록 독립정신의 산소를 공급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3월 13일 서울에서 만세시위 전파 밀명을 띤 사자들이 원주에 왔다. 원주의 미국 북감리파  선교사가 이 사실을 일본 관헌에 고발하여 체포되게 하였다. 선교사들은 3·1운동이 일어나던 기간에는 평소에 열던 전도사 회의도 중지했고, 예배 때는 헌병을 임석시켰다. 원주는 외국 선교사들의 경계심 속에 독립운동에 적대적인 환경에 놓여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3월 16일 원주의 보통학교 학생들이 시중에 나붙은 조선총독의 만세시위 자제를 당부하는 유고문을 떼어내고, 고종 국장의 상장(喪章)을 부착하는 등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춘천의 일본군 제20사단 제79연대의 병력 20명이 원주에 도착했다. 4월 초에는 일본에서 증파된 병력 중 1개 중대가 원주에 주둔하여 경계를 폈다. 이리하여 원주는 일제의 군사적 압박에 목이 눌려 독립운동이 질식할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 때문에 원주 읍내에서는 만세시위가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변방 면과 동리들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작은 동리 주민들은 탄압을 피해 한밤중에 산에 올라 화톳불을 피우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일제의 수직적 억압체제 하에서 질식해 가고 있었던 지방사회 공동체적 자율성이 동리 단위에서는 아직 “우리 살아있소!” 하는 외침이었다.  


3월 27일 부론면 만세시위  


4월 1일 독립선언 한 달 가까이나 되도록 원주는 잠잠했다. 그러다 3월 27일 원주 군수 오유영(吳唯泳)이 민심 수습차 부론면 소재지 홍호리에 와서 시국강연을 했다. 강연을 듣던 서당 졸업생 몇 명이 항의를 했다. 면서기 유필준(兪弼濬)이 이들을 쫓아냈다. 쫓겨난 졸업생들은 노림리로 돌아왔다. 오후 4시 30분경 서당에서 글공부하고 13살에 장가간 17살 청년 가장 한범우(韓範愚, 이명 志胤, 勤炯)를 중심으로 한돈우(韓敦愚)·한태우(韓泰愚)·한민우(韓民愚)·정현기(鄭鉉基)·김성수(金聖洙)·김일수(金一壽) 등 7명이 모였다.  이들은 ‘朝鮮獨立萬歲’(조선독립만세)라고 먹으로 쓴 깃발을 만들어 들고 나가 군수가 돌아오는 길목에서 기다렸다. 당나귀를 탄 군수가 거드름을 피우며 돌아오는 것을 보자 졸업생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고, 군수를 뒤따라가며 깃발을 흔들며 소리쳤다.  


“철원 군수도 만세를 불렀다. 원주 군수도 만세를 부르라.”


“당신은 어찌 만세를 부르지 않느냐! 같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자!”


군수는 만세시위를 자제할 것을 당부한 뒤 건등면 문막리 헌병주재소에 달려가 헌병들을 출동시켰다. 한범우는 갖은 악형을 받고 징역 10월형을 받아 수형하다 춘천감옥에서 출옥한 후 4개월 만에 후유증으로 병사했다. 


4월 1일 소초면민들의 횡성 원정시위 


소초면은 원주 북동쪽, 횡성가는 길 중간에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주로 횡성장으로 다녔고, 천도교인들도 횡성에 교구가 있어 횡성으로 참석했다. 4월 1일 횡성군 횡성면에서 천도교인 강사문(姜士文) 등이 천도교인과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시작했는데, 원주 소초면 둔둔리 강만형(姜萬馨)·하영현[河永賢, 하돌임(河乭任 또는 乭林)]이 소초면 천도교인과 주민들을 이끌고 횡성으로 원정 시위를 했다. 횡성과 원주 소초면 주민들이 합세한 1천 3백 명이 넘는 시위대의 만세소리에 온 장터가 진동했으며, 시위군중은 더욱 용기백배하여 태극기를 흔들었고, 몽둥이를 들고 일본 관공서, 문을 닫지 않은 상점 등을 모조리 부수었다. 시위대열이 헌병분견소로 향하자 분견소 병사들이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여 소초면 사람 하영현과 횡성사람 강사문이 목숨을 잃었다. 시위대는 하영현의 시신을 걸머메고 원주 소초면으로 돌아왔다. 강만형은 시위를 주도하다 잡혀 모진 고문 끝에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했다. 


4월 5일 소초면 만세시위


4월 3일 소초면 둔둔리에서 하영현의 장례식이 있었다. 박영하(朴英夏)는 춘천에서 유인석 문인으로 의병투쟁에 참여하고 둔둔리에 숨어서 서당 훈도로 있던 사람인데, 평장리 신현철(申鉉喆)과 함께 이틀 뒤 4월 5일 거사하기로 의논을 맞추었다.

 

“우리 서초면에서도 만세시위를 합세!”


이에 신현철은 동생 신현성(申鉉成), 마을 청년 유재경(柳在景), 김흥열(金興烈)을 시켜 면내의 의관리·장양리·평장리, 교항리에 격문을 만들어 돌렸다. 


“각자 분발하고 마음과 뜻을 다하여 

나라 사랑하기를 내 몸 사랑하듯 하자. 

노예로 사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다.  

모든 사람이 한마음으로 뭉치면  

죽을 지경에서도 살길이 생기리라.’

(惟各自奮發氣力 各勵心志 使愛國至於厚人之 

奴隸甚於惡死 能以萬人之爲一心則 

庶平死中求生之道耳)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격문을 마을 곳곳에 붙였다. 


“나라 위해 소중히 쓰일 때는 내 목숨 또한 크고,

겨레 위해 굴하지 않을 때 죽음 또한 가볍도다.

원수의 노예 되어 한 하늘을 일 것인가

유사무생(有死無生: 죽음만 있을 뿐 살길이 없는) 

기막힌 운명 민족정기 가다듬어 자주독립 외쳐 보세.”


수암리에는 소초면 헌병주재소가 있었기 때문에 연락을 제외했다. 


4월 5일에는 각 마을에서 면사무소로 가는 부채고개에 수백 명이 모였다. 이들은 고개마루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결의를 다진 후 대열을 지어 면사무소를 향해 나아갔다. 시위대는 면장 남상철(南相喆)을 끌어내어 만세를 부르게 했다. 면장을 향해 달려드는 주민도 있었으나 곧 박영하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 소리에 묻혔다. 이날 시위는 둔둔리의 하영현과 강사문의 죽음에 대한 추도집회로 시작된 까닭에 점심 때가 되자 만세시위를 끝내고 각자 마을로 돌아갔다.


수암리 헌병주재소에서 이 사실을 알고 원주 분견소의 지원을 받아 각 마을을 수색하며 만세시위 참가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신현철과 박영하가 체포되고, 많은 주민들이 헌병대에서 태형을 받았다.


비록 원주 읍내에서는 만세시위가 일어나지 못했고, 3월이 다 가는 늦은 시기이지만, 원주의 서남쪽 끝 부론면과 동북쪽 변방 소초면에서 만세시위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소초면에서 원주에서는 드물게 면 단위의 동리연합시위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둔둔리에 천도교인들이 단체로서 중심에 있었고 횡성 원정시위로 결집력을 강화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3·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3·1운동기념사업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 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한국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크고도 깊은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3·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3·1운동기념사업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 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한국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크고도 깊은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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