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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2/12] 이역만리에서 외친 조선 독립, 유럽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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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전쟁 치른 유럽에서 독립운동에 앞장


일제의 한반도 강탈과 만행 알리고

한국 독립 지원 호소하며 종횡무진


글 | 편집부 

최근 일제강점기 프랑스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등 조국 독립에 힘쓴 홍재하 선생의 유해가 국내로 봉환,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사후 62년 만에 오랜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파리의 독립운동가’로 불리는 서영해 선생은 고려통신사를 설립해 유럽 각국 언론사에 일제의 한반도 강탈과 잔악한 만행을 알리는 데 전념했으며, 유덕고려학우회는 재독한인대회 등을 개최하며 3·1운동을 이어나갔다. 제국주의가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시대에 이역만리 남의 땅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목숨 바친 이들의 뜨거운 항거를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역사소설로 한국 상황 널리 알린 ‘고려통신사’ 
서영해(1902~?)

서영해(1902~?)는 1929년 파리 시내 숙소에 ‘Agence Korea’ 즉 고려통신사(高麗通信社)라는 간판을 내걸고 출판 및 선전 활동에 나섰다. 이를 통해 유럽 각국 언론사에 일제의 한반도 강탈과 잔악한 만행을 알리는 데 전념했다.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을 갖춘 그는 역사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Autour d’une vie Corēenne)을 출간,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소설은 한국인 최초 불어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단군신화로부터 구한말 국제정세와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을 묘사하고 있으며, 소설이라기보다는 당시 한국 상황을 알리는 보고서에 가까웠다. 특히 3·1운동의 「독립선언서」 전문을 프랑스어로 번역·수록함으로써 한국인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널리 알리고자 했다. 

프랑스 언론에서 높은 관심을 보였고 1년 만에 5쇄를 인쇄할 만큼 인기 높았다. 『르 프티 주르날』(역사비평)이라는 잡지는 ‘파리는 망명의 수도’라는 제목으로 서영해를 심층 인터뷰했다. 당시 ‘미국에 이승만이 있다면, 유럽에는 서영해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902년 부산에서 태어난 서영해는 3·1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가 이듬해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국제 외교 무대의 공용어는 프랑스어였지만, 임시정부에선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었다. 

프랑스 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그는 임시정부 주불특파위원을 맡아 본격적으로 외교활동에 뛰어들었다. 1936년 벨기에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 40여 개국 대표들에게 한국 독립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는 등 유럽을 종횡무진 누볐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파리가 나치 치하에 들어가자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임시정부에 유럽의 동향을 전했다. 이때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에 체포돼 6개월간 감금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서영해는 오랜 기간 해외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국내에 기록이 없었고, 1947년 귀국한 후 이승만 대신 김구를 추종했다는 이유로 정치적 입지도 없었다. 해방정국의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정치판과 거리를 둔 채 문화 부문에 힘을 쏟다가 1949년 상하이에서 실종되었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독일에서 관동대지진 학살 고발 
이극로(1893~1978) · 김준연(1895~1971)

‘일제는 독립투사를 교묘하게 고문하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그 잔인성은 중세 때 종교재판소를 훨씬 능가했다.… 남녀의 몸에 대나무 못을 박고 피부를 찢거나 비트는 등의 고문을 자행했다.’

국어학자 이극로,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김준연 등이 1920년대 독일 유학 당시 일제의 3·1운동 탄압과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진상을 고발하는 선언문을 배포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선 사실이 독일 외교부 소장 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경찰국장 보고서(1924년 1월 24일자)에 따르면, 1923년 10월 26일 독일 유학생단체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는 베를린에서 ‘일본의 잔인한 한국 지배’라는 선언문을 독일어와 영어, 한문으로 각각 5천 장, 2천 장, 수백 장을 배포했다.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기념일이다. 유덕고려학우회가 이끈 관동대지진 학살 고발로 독일 외교부·내무부·재외공관은 긴밀하게 문서를 주고받으며 실태 파악에 나섰고 현지 언론이 이를 소개하는 등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덕고려학우회는 독일에 유학 중인 한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1921년 1월 1일 베를린에서 설립된 유럽 최초의 유학생단체다. 1923년 10월 26일 재독한인대회 개최, 1927년 세계피압박민족대회 참여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유덕고려학우회를 이끌었던 이극로(1893~1978)는 1912년 독립군이 되기 위해 서간도에 망명, 1920년 독일인이 경영하는 상하이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를 졸업하고 1921년 독일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현 훔볼트대)에 유학, 1927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시절 조선어강좌를 개설해 유럽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독일 국립인쇄소에서 한글 활자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극로의 독립운동은 유학 기간 내내 계속됐다. 재독한인대회 직후 독일 각계에 편지와 선언서를 보내 한국 독립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독일 외교부에 소장된 1923년 12월 7일 자 슐츠 베를린대 교수에게 보낸 편지가 그중 하나다. 『한국의 독립과 일본의 침략 정책』(1924),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한국과 한국의 독립운동』(1927) 등의 책자를 펴내 독일 정부와 각국 외교관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1927년 귀국 후 한글 연구와 보급에 힘쓰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됐다. 1945년 광복을 맞아 풀려났지만 1948년 4월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북한에 잔류했다는 이유로 서훈을 받지 못했다.

김준연(1895~1971)은 1925년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활약하다 귀국해 동아일보 편집국장, 주필을 지냈다. 홍선표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유덕고려학우회는 유럽의 첫 한인 유학생 단체로 이극로가 재독한인대회를 주도하고 선언문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며 “1960년대 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들이 대한민국 경제를 일으키는 데 기여했다면, 일제강점기 독일 유학생들은 나라를 되찾고자 몸을 바쳤다”고 했다.

프랑스 최초 한인 단체 ‘재법한국민회’ 결성 
홍재하(1882~1949)

홍재하(1882~1949)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와 영국을 거쳐 1919년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는 1919년 12월부터 6개월 동안 받은 일당을 다른 한국인 30여 명과 함께 모아 총 6천 프랑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써달라며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전달했다. 또 프랑스를 포함해 유럽 최초 한인 단체인 ‘재법한국민회’를 조직해 제2대 회장을 지냈다. 1920년에는 유럽에 거주하는 한국인 50여 명과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홍재하는 프랑스에서 한인 동료들과 함께 1차 세계대전 전후 복구 노동으로 힘들게 번 돈을 갹출하여 독립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회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 영국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에 입국한 한인 30여 명은 처음에는 1차 세계대전 격전지였던 지역에서 전사자를 안치하고 묘지를 조성하는 등의 일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되면 가족 모두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가길 꿈꿨지만, 해방정국의 혼란과 한국전쟁이라는 격랑을 맞아 꿈이 무산됐다. 그는 파리에서 미국인 사업가의 집사 등으로 일하며 프랑스 여성과 결혼해 2남 3녀를 뒀다. 고국의 전쟁 구호 활동까지 돕던 그는 끝내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하고 1960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파리 근교 소도시 콜롱브의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2022년 11월 16일 국내로 모셔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1919년 프랑스에 처음 발을 디딘 지 103년,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믿음 속에 살다가 영면에 든 지 62년 만이다. 201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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